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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
주변을 살펴보면 라자로 못지않게 참혹한 고통을 하루하루 견뎌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찢어질 듯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
선천적 장애로 인한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고통,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
한번 나름대로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보지만 꼬이기만 하는 인생으로 인한 고통...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고통, 좀 잔잔해졌나 싶으면 또 다시 엄습해오는 고통,
도대체 고통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왜 고통은 끊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인류 역사상 고통은 우리 인간 모두의 ‘화두’였고,
대화의 단골주제였고,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삶과 분리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절대로 분리시킬 수 없었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 8장 22절)
오늘도 고통은 우리에게 한 가지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탐구’입니다.
‘고통의 구원적 의미의 이해’입니다.
다행히 고통이란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에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신 분이 계십니다.
고통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스스로 고통의 가장 극점인 십자가 위로 걸어 올라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오늘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
조금이나마 완화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위로의 말도 아닙니다.
달콤한 격려의 말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 나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입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그래. 나만 고통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저기 봐.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잖아?’하면서
내 고통의 정도가 순식간에 완화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도 고통의 인간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고통을 모두 거두어 당신 고통에 합하십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미 거의 거두어 가셔서 별로 무게도 나가지 않는 너무나 가벼운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통과 십자가를 당신 한 몸에 지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홀로 골고타 언덕을 오르고 계십니다.
고통의 전문가였던 바오로 사도는
오랜 세월 고통에 대해 연구하고 또 연구한 끝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통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콜로새 1장 24절)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 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게 다가온 이 고통,
기꺼이 견뎌낼 때마다 예수님께서 느끼고 계신 고통의 강도가 조금이나마 완화된다는 것,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고통,
기쁘게 이겨낼 때 그리스도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우선 지난 1박 2일 동안 성소후원회 임원 MT 잘 다녀왔음을 보고 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아울러 앞으로 성소후원회가 어떻게 나아갈 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간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내가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던지는 데에 익숙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있듯이,
내가 베푸는 만큼 그대로 받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의 높은 지역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자신이 잘못한 일 때문에 어머니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산으로 올라가서 절벽 벼랑 끝에 서서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반대편 산을 향해 “나는 당신을 미워해요! 나는 당신을 미워해요!”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계곡 반대편에서 산울림이 울려왔습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해요! 나는 당신을 미워해요!”
이 소리에 깜짝 놀란 소년이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흐느끼면서 “나를 미워한다고 소리치는 나쁜 사람이 누구예요?”하고 물었지요.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절벽 벼랑 끝으로 올라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하고 크게 외치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외치는 대로 산울림이 되어 되돌아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산울림은 아들이 한 말을 부드럽게 반복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껴안고 말했지요.
“아들아, 이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네가 주는 대로 돌려받는단다.”
이 인생의 법칙을 우리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그 법칙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받기만 하는 데에 익숙했지,
고통 속에 있는 나자로를 향해서 전혀 베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세상의 삶과는 정반대로
저승에서 큰 고통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나눔과 사랑의 계명이며, 희생과 봉사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주는 대로 돌려받는다는 인생의 법칙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인생의 법칙은 이제까지 절대 예외가 없었습니다.
- 인천교구청 성소국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재물이 재난이 되는 날>
병원에서 어떤 중년이 되신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귀 수술을 받기 위해 기다리시는 중이었는데
제가 사제인 것을 알고 당신도 천주교 신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당에 나가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하도 몸이 안 좋아 귀, 코 수술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자신만 왜 이리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성당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결혼도 못하고 평생 혼자 살아온 것에 대한 불만도 컸을 것입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미혼이었습니다.
수술을 하러 들어가기 전에 기도라도 하라고 했더니 망설이기에
저도 기도를 해 주겠다고 했더니 기뻐하셨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에 그는
오랜만에 수술 시작하기 전과 끝나기 전에 기도를 하였고 얼굴이 마비될 수도 있는 복잡한 수술이었는데도 다 잘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분께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분을 보면서 거지 라자로를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지 라자로가 천국 들어간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착한 일을 한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거지로 불쌍하게 산 것 밖에는 없습니다.
부자가 지옥 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특별히 무엇을 잘못 해서 지옥에 갔는지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지옥에 가서까지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하기 위해 라자로를 다시 부활시켜달라고까지 청하는 어쩌면 착한 사람입니다.
라자로와 부자가 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갔는지는 우리가 추측해보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비유말씀을 하시는 대상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즉 돈만 아는 부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재물,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을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라자로는 거지에다 종기투성이였고 개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 되면 구약의 ‘욥’을 떠올려야 합니다.
욥은 매우 부자였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그만큼 섬기는 사람이 없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거두시고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라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욥은 발밑에서 머리끝까지 종기가 돋아나서 토기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하느님을 욕하라고 하지만 욥은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라고 대답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라자로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이유 없이 내려진 고통들이라고 하더라도 다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으려니 하며 ‘불평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부자도 원망하지 않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먹으며 살았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때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병원에서 만난 그 중년분이 하느님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에게 오는 고통이 컸기 때문입니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큰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정말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불평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천국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이란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라자로에 대해서 생각 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말씀을 하시며 이름을 말씀하신 것은 ‘라자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왜 예수님은 라자로라는 이름을 쓰셨을까요?
그 이유는 라자로와 부자들인 바라사이들을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사이들도 라자로를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타니아에 사는 마르타와 마리아 두 여동생을 둔 큰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부자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로 닦아 준 인물입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300 데나리온, 즉 2,000만 원 정도입니다.
요즘 2,000만 원짜리 향수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것도 아끼지 않고 한 번에 깨어서 써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은 이 세 남매를 매우 사랑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자였음에도 돈을 아끼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돈은 문제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라자로를 살려내어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하지만
그것은 형제들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가타리나 성녀에 의하면,
지옥에 가면 서로 헐뜯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서로 가까웠던 사람끼리 고통을 주게 되는데
자신들이 지옥에 오게 된 이유를 상대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자는 형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그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죽어서 이미 썩은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기적을 보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예언서도 믿지 않으면 그런 기적을 보여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즉, 죽은 라자로가 썩어 냄새가 날 때에 그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활시키십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해주듯이 그들은 죽었다 살아난 이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결국 예수님과 다시 살아난 라자로까지 죽이려듭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로 미래를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지옥에 가게 되었을까요?
부자는 거지 라자로가 자신의 집 앞에 뻔히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음식을 주지 않아 떨어지는 음식만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하느님 것임을 잊고 산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부자로 만들어주셨다면
그 돈을 하느님 뜻에 따라 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끼게 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돈의 주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즉,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은 것 자체가 죄란 뜻입니다.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살립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반지나 시계 등을 팔았다면 몇 명은 더 살렸을 것이라며 크게 후회를 합니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는 우리가 남겨놓고 가는 재산들이
우리의 죄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처럼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우상숭배자,
즉 ‘내가 주님(주인님)!’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라자로를 축복해주기 위해 부자로 만들지 않고
부자를 벌하기 위해 가난하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누가 부자로 사는 것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면
오늘 복음을 다시 읽어보라고 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성모님도 마찬가지고, 욥도, 거지 라자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보다 하느님 보시기에 더 기쁘실 수 있고,
사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순종이 세상을 구원한 것입니다.
남편이 또는 시어머니, 자녀들이 왜 저러냐고 한탄하기보다는
라자로처럼 모든 것에 순응하는 모습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병원에서 만난 그 분에게
자식을 매질하고 나무랄 때 자식이 부모에게 어떠한 감정을 갖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당연히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질 때도 있지만
언젠가 부모가 되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고통들을 지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깨닫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저에게 30년 만에 고해를 하셨습니다.
라자로처럼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불평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결국엔 라자로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가시기를 바랐습니다.
- 로마 유학중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가난한 나자로는 누구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부자가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 곳 가고, 갖고 싶은 것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돈 가지고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다.
한 마디로 부자가 되면 얼마든지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 수 있다.
그러니 부자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누구나 부자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재물이 곧 하느님이요, 재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란 어떤 사람이고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란 이기적인 인간을 말하고
가난한 라자로는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우선 이기적인 인간인 부자에 대해 묵상하자.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루카 12,16-21)
복음에서 부자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남과 나누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이기적인 인간을 말한다.
즉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부자들이다.
생명, 시간, 건강, 능력, 이웃, 아름다운 자연,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연인,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많은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많은 친구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저녁에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 온갖 다양한 아름다운 꽃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는가?
부자란 이 모든 것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이다."
부자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즉 부자란 하루 24시간을 몽땅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하느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루 24시간을 자신이 먹고 마시는 일에, 친구를 만나는 일에, 자기 취미 생활에, 일을 하는 데에, 여기저기 구경하는 일로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에,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일에는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부자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 많은 시간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즉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또는 하느님에게는 인색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가난한 라자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가난한 라자로인 예수님은 부자인 인간의 문 앞에 버려져 있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가난한 모습으로 와 계신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인 눈을 가난한 이에게 돌리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있으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35-40)
왜 예수님은 가난한 라자로가 되셨는가?
예수님이 처음부터 가난하셨던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같은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필립 2,6-7)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셨기 때문에 가난한 분이 되셨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난한 삶에 대해 바오로는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코린 후 8,9)
라고 설명해 주셨다.
결국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얼마나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부자요,
이웃에게 나눔의 삶을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부자는 항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늘 부자로 살 것이고,
가난한 이는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비록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늘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생활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요,
정말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늘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인색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물 한 잔도 청하지 않으셨고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
아니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까지도 인간을 위해서 다 흘리셨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철저하게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이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동안에도 가난한 삶을 사셨고
죽으실 때에도 몸에 걸쳤던 옷까지도 다 벗기우신 채 가난한 죽음을 맞으셨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옵니다."
라고 끝까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그 순간에도
당신의 죽음을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죽어 가는 왼쪽에 있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라고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 전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
더불어 삶>
오늘 복음 묵상 중 떠오른 여러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얼마 전 “물러나는 대통령이 지지율 80%라니…”는 신문 기사 제목이 언뜻 눈에 띠어 읽어 보았습니다.
8년 임기를 마치고 퇴장하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에 관한 신화와 같은 기사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은 4년 밖에 받지 못한 채 산전수전 다 겪은 후
대통령이 되어 재임 8년 중 성과가 참으로 눈부셨습니다.
2003-2010까지 성장률 0.5%-7.2%, 실업률 12.3%-6.9%, 물가상승률 10.4%-4.%,
빈곤층 3200만명-신중산층 편입, 빈곤층 43% 감소 등
기적 같은 성과로 분배와 성장의 두 토끼를 다 잡았다는 극찬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괄목할 점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빈곤층을 감소시켜
성장의 과실을 ‘더불어’ 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새삼 교육의 목적은
‘제 앞가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과
‘더불어 사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란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실 이 두 능력은 사회 공동 생활에 필수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읽은 짧은 두 일화도 어렴풋하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느 부자이면서도 이웃을 도울 줄 몰랐던 인색한 할머니가 지옥에 떨어지자
옥황상제께 지옥에서 건져 달라 했더니
옥황상제가 착한 일 한 것 한 가지만 있어도 가능하다 했고
마침내 그 할머니는 간신히 가난한 이에게 파 한 개 준 것을 기억해내 말하자
하늘로부터 파가 줄처럼 내려왔고 그것을 잡으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니다.
웬걸 파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많은 이들이 자기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보자
대노한 할머니는 온몸을 다해 흔들어 이들을 떨어뜨리자
파도 뚝 끊어져 자신도 다시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만 알고 더불어 살 줄 몰랐던 인정머리 없는 할머니의 말로였습니다.
또 한 이야기는 어느 사람이 뜻밖의 은총으로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다 합니다.
신기한 것은 둘 다 똑같은 환경인데
천국의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에 얼굴은 빛났는데
지옥의 사람들은 기쁨 없는 얼굴에 몸은 말할 수 없이 여위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웬일인가 가만히 밥 먹는 것을 들여다보니
두 쪽 사람들은 다 뻗힌 팔을 구부릴 수 없었는데
천국의 사람들은 숟가락에 밥을 떠 서로 먹여 주고 있었고,
지옥의 사람들은 구부릴 수 없는 팔로 서로 자기만 먹으려 하기에 먹지 못해 결국 말라 죽게 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평범하듯 하나 심오한 진리가 담긴 이야기로
더불어 삶이 바로 천국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 오래 전에 스치듯 읽은 이야기인데
선명한 기억으로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올랐습니다.
또 오늘 복음 묵상 중 떠오른 게 삼각형이었습니다.
하느님, 나, 너의 세 꼭지점을 연결한 삼각형이었습니다.
온전한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삼각형 구조의 공동체적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삼각형 구도에서 보면 오늘 말씀 이해도 분명해집니다.
위의 꼭지점에 하느님이 있고,
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단히 우리를 높이의 삶으로 전환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를 보십시오.
하느님 꼭지점이 없습니다.
하느님 의식이 전무한 사람입니다.
위로 하늘 한번 바라보지 않은,
전혀 높이의 영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자리에 그대로 재물 우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게 살았다.”
전혀 탓할 바 없는 모습입니다.
내가 벌어 내 맘대로 쓰는 데 죄책감도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있어도 재물과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재물 우상을 섬김으로 하느님과 단절될 때 구제불능입니다.
하여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질타하는 대상 역시 탐욕에 눈먼 부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이들에게 가차 없이 심판을 선언하는 아모스입니다.
복음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지옥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는 복음의 부자의 처지와 흡사합니다.
오늘 2독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이것들을 피하십시오.
오히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니다.”
재물 우상 대신 하느님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것들을 피하십시오.’가 빠졌는데, 이 빠진 내용이 중요합니다.
바로 전 구절(1티모1,9-10)이 ‘이것들’에 해당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삼각형 위의 꼭지점 자리에 하느님 대신 돈을 놓아 패가망신한 사람들,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요.
삼각형,
옆 꼭지점에 너로 대변되는 이웃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가 부단히 우리를 넓이의 삶으로 전환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는 너의 이웃인 라자로와 완전 단절 상태입니다.
하느님과의 불통에 이어 이웃과의 불통입니다.
‘그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너무나 실감나는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이렇게 현실적입니다.
뜬구름 잡는 환상이 없습니다.
과연 나는 이런 부자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실 이런 부자들 부지기수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이를 집 대문 앞에 놔두고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 수 있겠는지요.
사람이 부자가 되면 이렇게 막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자에게 거지 라자로는 사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보다 하느님께 대한 모독도 없습니다.
더불어 구원인데 부자는 재물에 중독되어 라자로와 단절됨으로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로 높이의 삶을 잃었고,
이웃인 라자로와의 더불어 삶의 단절로 넓이의 삶을 잃었습니다.
바로 복음의 ‘큰 구렁’이 상징하는 바 바로 이 단절의 구렁입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 놓여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이미 살아생전에 생긴 단절의 큰 구렁이 죽어서도 계속됨을 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 너와의 단절로 고립된 꼭지점 하나의 나가 바로 지옥입니다.
하느님 없는 나는, 이웃 없는 나는 하나의 환상입니다.
도저히 나를 알 수 없어 환상 속의, 깊이가 없는 거짓 나의 천박한 삶입니다.
산전수전 삶의 현실 체험을 통해 깊이에서 발견되는 참 나입니다.
바로 부자들의 삶은
현실 삶이 아니라 환상 속의 삶이기 십중팔구입니다.
동병상련입니다.
부자가 어찌 가난한 삶의 현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에어콘 장치가 잘 된 곳에 사는 이가 농사꾼의 뙤약볕 더위를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많은 이들 현실이 아닌 환상 속의 단절된 삶을 삽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완전히 하느님 현실과, 이웃 라자로 현실과 단절된 환상 속의 삶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얻고 자기를 잃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환상과 현실을 이번 중국 여행 중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림에서 본 백두산 천지의 사진의 환상과
실제 눈으로 본 백두산 천지의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얼마나 환상에 속아 살아가는 사람들인지요.
어느 미국인이 ‘너는 왜 사진을 안 찍느냐?’ 물었을 때
저는 빙그레 웃으며 짧은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I take a picture in my heart).”
백두산 천지보다 제가 더 즐긴 것은
백두산까지 천리 이상 거리에 7-8시간 차타고 가면서 끝없이 펼쳐지는 길림성 만주 대평원의 현실이었습니다.
삼각형 구조의 공동체적 인간입니다.
첫 꼭지점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높이의 삶입니다.
둘째 꼭지점인 이웃인 너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넓이 삶입니다.
셋째 꼭지점인 나는 하느님과, 또 이웃인 너와의 관계와 비례하여 참 나의 깊이의 삶입니다.
하느님과 너와 나와 관계가 깊어지면서
높이의 삶도, 넓이의 삶도, 깊이의 삶도 이루어집니다.
이래서 좋든 싫든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공동체 삶은
참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총을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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