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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5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루카 16,1-8
불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역시 ‘회개’에 관한 내용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이것을 알고 집사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집사는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이 쫓겨났을 때 맞아들일 친구들을 사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집사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사용한 재물은 의롭지 못한 재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재물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하와도 자신이 가진 선악과로 아담을 사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내어줌은 죄를 퍼뜨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를 ‘나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나의 것을 내어줄 때가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어줄 때 만들어집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면 언제나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친구가 아닌 거래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나를 받아 줄 사람은 거래처 사람들이 아닌 부정한 재물로 사귄 친구들입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공동소유하였습니다.
재물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없었고 그들은 친구요 가족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의롭지 못한 재산으로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이렇게 행복한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고 수많은 이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하여 그 수가 날로 증가하였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약삭빠른 청지기를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2009)은 한 청년이 돈의 노예였다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실화입니다.
1969년 뉴욕주 한적한 시골 부모님이 파산 직전에 놓여 전 재산인 모텔을 넘겨야 하는 처지가 된 엘리엇은
고민에 사로잡힙니다.
누나는 돈만 밝히고 괴팍한 성격의 어머니를 떠나 독립하였고 동생에게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꿈을 좇으라고 하지만 동생은 부모님의 희망이 자신뿐이라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을 상인 협회 회장을 맡아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던 중 이웃 동네에서 열리기로 한 ‘록 페스티벌’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것을 유치해 부모님의 힘겨운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에 나선 엘리엇은 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을 유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수천 평의 농장을 축제 장소로 제공하고, 부모님의 낡아빠진 모텔은 페스티벌의 공식 숙소가 되며
난생처음으로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게 됩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 주차비까지 다 챙겨가며 돈을 긁어모읍니다.
점점 많이 몰려드는 히피족들과 친분이 생기던 차에 엘리엇은 그들이 준 대마초를 피우고 광고 방송에서 헛소리해버립니다.
페스티벌도 공짜고 음악도 공짜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고요하기만 하던 마을에 무려 50만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됩니다.
히피족은 본래 베트남전 패전을 본 20 30 세대들이 기존 어른들의 경쟁과 성공 문화에 저항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자고 생겨난 하나의 불같은 문화였습니다.
엘리엇은 그들 공동체를 보며 무언가 각성하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가 호텔을 넘기지도 않아도 되는 만큼의 돈이 있으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겪고 있었고 50만 명이나 되는 자유로운 공동체 안에 있으며 비로소 이 길이 이상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돈에 얽매이는 삶이 아닌 히피들처럼 자신의 꿈을 찾고 친구를 사귀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엇은 자신이 만난 친구들, 그 수많은 같은 자유를 갈망하는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나누고 자유롭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공동체였습니다.
만약 한두 명이 그러면 큰 변화를 겪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대조되는 50만 명의 공동체는 이제 돈이 그의 것이 아닌 친구를 사귀는 도구로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해 준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우상을 낙타 위에서 깔고 앉았습니다.
라반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가 섬기는 우상은 돈입니다.
야곱과 결혼한 라헬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돈을 엉덩이로 깔고 앉았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본래 주님 것이기에 의롭지 못하게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른 이들도 자기 것을 주장하며 노예 생활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가 정당하게 일하여 번 돈은 자기 것이라고 가르치면 더는 세상에서 매력을 발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돈에 대해 자유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는 나머지 십의 구도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의롭지 못한 재물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이 어차피 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정신이 죽으면 내가 가진 것이 나의 것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 믿으면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바칠 수 있었을 때 그들이 나누는 재물은 진정 그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루카 16,1-8
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태도
채무 이행자들에게 주인 몰래 자기 마음대로 막대한 빚을 탕감해준 불의한 집사의 스토리는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할 복음구절입니다.
자칫 잘못 해석하면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불의한 집사의 행동 하나 하나를 따라가 보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었습니다.
집사란 직책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꽤나 비중 있는 직책이었습니다.
아무 집이나 집사를 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지역 유지나 명망가 집사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대신해서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주인 대신 돈을 빌려주기도 했고 거기에 따른 이자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마구 낭비한다는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죄질이 워낙 좋지 않아 더 이상 그 자리에 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주인은 집사에게 정식으로 해고를 통고합니다.
기한을 정해주며 그때 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집사에게 인수인계할 것을 명했습니다.
해고의 사유는 공금 유용 및 횡령죄입니다.
해고 된 후 앞날이 캄캄해질 것을 예상한 집사는 더 좋지 않은 악수(惡手)를 두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조용히 사라져도 부족할 판에 더 큰 비리를 저지릅니다.
주인 허락도 없이 채무자들을 한명 한 명 불러들여 그들이 지고 있는 막대한 빚을 탕감해줍니다.
탕감의 정도도 어마어마합니다.
기름 백 항아리를 오십 항아리로 고칩니다.
밀 백 섬에서 팔십 섬으로 경감시킵니다.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알게 된 주인이 그 불의한 집사에게 큰 형벌을 내려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를 크게 칭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불의한 집사의 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일생일대의 큰 위기 앞에서의 불의한 집사가 취한 신속하고 영리한 대처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집사에 대한 주인의 칭찬을 교회적, 종말론적 시각으로 해석해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을 통한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의 목전에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눈먼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한 강한 경고 말씀이 불의한 집사에 대한 칭찬인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리는 세속의 자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죽기 살기로 머리 싸매 고민하고 할 수 있는 백방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의 전형입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유가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목전에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언젠가 맞이하게 될 작은 종말인 우리 각자의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머리를 싸매 고민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금쪽같은 시간들, 어찌 보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들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인 영원한 생명의 획득과 구원을 위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지향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콜라보를 보여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루카 16,1)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이 비유는 사실 우리를 좀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결과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등장 인물인 집사의 불의하고 얄팍한 꼼수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주인에게 칭찬까지 듣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속의 아버지나 주인은 대개 하느님을 상징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결과만 좋으면 하느님께도 다 좋은 것인가 반문하게 됩니다.
"집사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루카 16,1)
주인과 집사의 관계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관상해 봅니다. 사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그분의 재산(모든 피조물과 재화, 탈렌트와 권력, 명예와 관계 등)을 관리하는 집사일 뿐이지요. 이 재산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횡령, 남용은 주인 입장에서는 낭비이고, 주인과 주인의 뜻을 위해 쓰는 것이 선용이지요. 우리는 그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만, 주인의 태도로 보아 그분의 뜻대로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당장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집사는 꼼수를 씁니다. 주인의 재산으로 사람들의 환심이라도 사서 앞날을 보전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이들, 즉 가난한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 수량을 제멋대로 줄여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그럴듯해도 동기와 과정이 모두 선해야 진정한 선이라고요. 그러니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된 집사의 선행(처럼 보이는 행위)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그런데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선해야 한다는 논리에 붙잡혀 있다면 이 구절에서 좌절 비슷한 심정이 됩니다. 주인은 바보인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한 사람을 칭찬하다니? 게다가 오히려 그의 처신이 영리하다고?
다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돌아가 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의 지향이 천사처럼 그저 마냥 순수하기만 했던가 되짚어 보면 답이 보일 겁니다.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지만, 신앙의 태동, 봉사의 시작, 성소의 출발, 직분의 수락은 때때로 아주 허술하고 인간적인 지점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하느님은 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맞춤형 그물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약하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를 당신 사업에 합류시키시면서 지향을 따져 묻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릇된 지향이라도 당신의 섭리 안을 걷다 보면 정화되고 성화될 수 있고, 그렇게 이끄실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집사의 꼼수를 모르지 않으면서 인내하고 견디며 기다려 주는 주인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집사는 자기가 살려고 거짓을 꾸몄지만 결과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가 평소 정의와 자선에 대한 지향이 있어서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집사와 결탁해 짐을 덜어낸 채무자들의 부정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느라 주인의 큰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은 누가 그릇된 지향에서 출발했더라고 그 굽은 자를 가지고 직선을 그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집사의 죄조차도 선익으로 돌려놓는 분이시지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맞습니다. 세상 물정에 영악한 이들은 서로 결탁해 정보를 독점하고 사회적 경제적 이권을 끼리끼리 주고받습니다. 거짓도 죄악도 불사하면서요.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그 열매를 쓰시는 분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하시는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선으로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릇된 지향조차도 언젠가 좋은 열매로 바꾸시는 분이시니까요.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인의 칭찬"은 구원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의한 집사처럼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악도 선으로 쓰시는 하느님께 승복해 지향과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주인의 그림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받은 이방인 선교의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15,17)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뽑혀 그분과 삶을 나누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분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 중 누구도, 바오로 자신조자도 자기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올 줄 꿈에도 몰랐겠지요. 너무 다른 출발점이었지만,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유다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바오로를 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인이신 분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집사로 불러 당신의 사람과 재산과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기심과 탐욕, 자기 영광에 한눈 팔면 주인의 재산은 쉬이 낭비되고 말지요. 부족하나마 주인의 뜻을 헤아려 허락하신 영적 물적 재산을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잘 써 주시도록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놓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