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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유시민
[2022.12.27.자 KBS 김석 기자]
인터파크 독자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에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뽑혔습니다. 인터파크는 최근 1년 동안 발행된 도서 20권을 후보작으로 지난달 28일(월)부터 이달 19일(월)까지 20여 일 동안 독자 투표를 진행한 결과,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득표율 18.6%로 올해 최고의 책의 영예를 안았다고 밝혔습니다.
1988년 처음 출판됐을 당시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이 책은 저자의 새로운 정보와 해석을 바탕으로 33년 만에 전면 개정 출간돼 인기몰이하고 있습니다. 2위는 김영하 작가가 9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작별인사’(12.4%), 3위는 힐링 소설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 2’(8.5%)가 차지했습니다. 4위는 한국 대표 지성 고 이어령 교수와의 대담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8.4%), 5위는 영웅이 아닌 청년 안중근을 조명한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하얼빈’(6.6%)이었습니다.
신호영 인터파크 도서사업팀장은 “상위 5위권을 모두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차지, 국내 도서가 약진하고 있는 모습”이라면서 “내년에도 독자들이 풍부한 지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더 다양한 기획전과 프로모션을 선보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인터파크 독자가 뽑은 올해 최고의 음반에는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프루프(Proof)’가 선정됐습니다.
‘작년에 읽었어야…’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서문’에서 저자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 사람이다. 21세기가 열릴 때 마흔한 살이었다. 20세기에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가치관을 형성하고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마음을 열어 세상의 변화를 껴안으려고 노력했지만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기가 늘 수월하지는 않았다.”고. 꼭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다만 그가 마흔하나일 때 나는 마흔도 훨씬 지난 후반이었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책은 20세기 개막을 알리면서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을 시작으로, 20세기 폐막 즈음에 벌어진 독일 통일과 소련의 해체까지 11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들 대부분이 김은봉 여사가 쓴 〈세계사 100장면〉에서 대략 살펴본 기억이 나므로, 많은 사건들 중에 교과서와 언론이 소홀하게 취급한 사건들을 비중 있게 다뤘다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나도 그들 가운데 좀 더 중요하거나, 좀 더 다이나믹한 사건들을 살펴볼까 한다.
〇 드레퓌스 사건
19세기 막바지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은 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여러 내용을 각색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묻고, 가족은 서로 믿고 사랑했으며 그 사랑의 믿음으로 참혹한 불운과 시련을 이겨냈다는 것,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주인공들,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고 부당한 박해를 감수하며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고, 그래서 더 문학적 향기를 풍기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실과 싸운 피카르 중령, 지성과 열정의 화신인 졸라, 끝까지 책임을 다한 클레망소, 이성의 힘을 믿은 세계 시민들,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심을 요구하고 지지하고 응원하고 연대한 세계 지성인들, 그들은 인간이 어리석고 때로 기괴하지만 지적 재능과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했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공화정을 낳고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듯했지만 나폴레옹에 의해 왕정으로 복귀하고, 1870년 다시 혁명이 일으나 세 번째 공화정이 되었으나 군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은 예전 그대로였다. 드레퓌스 사건은 군사법원이 합법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위반하면서 유죄를 선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여러 번의 항소에도, 항소 포기와 특별사면에도 드레퓌스파는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투쟁으로 그들은 승리했고 드레퓌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클레망소는 총리가 됐다. 이후 두 번의 큰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했고 文民優位 전통을 확립했다.
드레퓌스 대위는 적국인 독일에 군사기밀을 넘겨줬다는 누명을 썼다.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에 패전함으로써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고 접경지인 알자스-로렌을 빼앗겼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를 이끌고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했으며,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 최초의 통일국가 ‘독일제국’의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도 했다. 프랑스인이라면 복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과 내각은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이 그랬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민국가와 국경을 맞댄 채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불태우는 상황에서 작은 발단, 작은 불씨만 튀어도 전면전으로 비화할 조짐이 농후했다. 그 일이 실제로 1914년에 터졌다.
〇 사라예보 사건
사라예보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고 넘어가야겠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자, ‘스르프스카 연방공화국’의 수도이다. 면적은 141.5㎢, 인구는 2013년 기준 369,534명으로 작은 도시국가다. 인근 도시권을 포함하면 688,354명이다. 민족구성은 기준으로 보슈냐크인 80.74%, 세르비아계 3.78%, 크로아티아계 4.94%, 기타 10.54%이다. 내전 이전에는 최대 민족인 보슈냐크인의 비중이 절반이 안 될 정도로 민족구성이 다양한 곳이었다. ‘사라예보’이름의 유래는 터키어 ‘보스니아의 궁전’을 가리키는 단어 ‘사라이보스나(Saraybosna)’가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슬라브화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 시작된 사라예보의 역사의 방증이다. 현대 터키어로는 사라예보가 아닌 ‘사라이보스나’라고 불린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을 도시로, 그 이후에도 현대사에 굵직한 사건을 남긴 도시이기도 하다.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서, 이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의 도시 자격으로 치러졌다. 1973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김순옥, 박미라, 정현숙이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처음 단체전 세계대회를 제패한 도시이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터진 한 발의 총성으로 당시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고, 그로 인해 독일 200만, 러시아 170만, 프랑스 136만, 오스트리아-헝가리 120만 등 940만 명이 죽고, 3,200만 명이 부상당한 세계대전이 터진 것인데, 그것이 단순히 암살사건 때문이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남는다. 사건 후, 한 달 만인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유럽 각지에서 반전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오스트리아 폭군의 권력욕과 제국주의적 탐욕에 독일 병사는 피 한 방울 흘려서는 안 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당 지도부와 달리 정부가 빚을 내서 전쟁 비용을 대더라도 침략국과 맞서야 한다고 했다.
9월 초 파리 근교 센강 지류인 마른강 근처로 독일군 75만이 진군하자 프랑스·영국이 연합해 맞서면서 닷새 동안 전투에서 독일군 22만, 연합군 26만의 사상자가 났다. 참전군인 세 명 중 한 명이 죽은 것이다. 동부전선도 다르지 않았다. 독일군은 타넨베르크(폴란드)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승리한 독일도 1만 2천 명의 사상자가 났다. 독일의 광란에 흑해의 지배권에 위협을 느낀 이탈리아는 독일과 가까웠지만, 연합군에 러시아와 대립하던 오스만 제국은 독일군에, 발칸(산악)반도 동부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차지할 욕심에 독일과 손잡고, 불가리아와 앙숙이던 그리스는 연합국과 제휴했으며, 중립을 표방하던 루마니아는 연합국 편에 섰다가 독일 동맹국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지도를 보면, 이탈리아 반도 아드리아해 동쪽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그 아래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코스보,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그리고 오스만 제국(터키)이 잇대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사에는 좋은 이웃이었던 이웃은 없다. 유럽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터진 전쟁이 급기야 아시아·태평양·대서양에 영향권을 미쳤다. 러시아를 꺾고 조선을 삼킨 일본은 중국대륙에 손을 뻗었고,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독일의 아시아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뒤, 칭따오와 남태평양의 이권을 얻었으며,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하겠다면서 미국 유대인들을 끌어들이고, 아랍 민족에게는 독립국가수립을 약속했다. 1915년 독일 잠수함이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시켰을 때 수백 명 미국인이 사망했음에도 관망하고 있던 미국이 1917년 4월 6일 마침내 참전을 선언했다. 이로써 유럽 내전에서 세계전쟁으로 비화했다.
사라예보에서 열혈 독립투사 프란치프가 황태자 부부를 향해 쏜 총알은 폭발의 계기였을 뿐 원인은 아니었다. 그날이 꼭 1914년 6월 28일이어야 할 필요도 없었고, 황태자가 죽어야만 했던 것도 아니다. 자존심 전쟁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자존심이 그해 여름 유독 강했다고 볼 근거도 없다. 전쟁을 처음 오스트리아가 시작했어야 할 필연성도 없다. 자본주의 강국들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식민지를 넓힐 방법도 땅도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어느 정도 필연적 사건이었다. 돈과 권력을 향한 탐욕이 과학혁명에 날개를 달고 벌인 참극으로 ‘위대한 조국’을 들먹이며 민중을 현혹하는 권력자는 지금도 있다.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랑케’가 말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라고.
〇 러시아 혁명
어찌 보면 지금의 푸틴 대통령과 닮은 것 같은 레닌(본명 : 부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은 1917년 4월 16일 밤에 핀란드 열차 종점역 페테스브르크 역 광장에서 한 연설을 보면, 어떻게 민중을 선동하고 새 역사를 시작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싶다.
“여러분이 임시정부의 약속을 다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이 달콤한 말로 많은 것을 약속하면서 민중을 속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합니다. 민중은 평화를 원합니다. 민중은 빵을 원합니다. 민중은 또한 땅을 원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전쟁과 굶주림만 줄 뿐 빵을 주지 않습니다. 지주계급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
레닌을 빼고는 볼셰비키 혁명을 말할 수 없다. 그가 없었다면 러시아는 입헌군주국이나 왕이 없는 공화국으로 그대로 갔을 것이다. 처음 혁명의 시작은 19세기 초에 일어났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인구 3천만 가운데 2천만 명이 농노로 그들이 생산한 부로 귀족들은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1812년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추위로 철수했을 때 러시아군의 장교들은 유럽의 민중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었고, 청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861년 농노를 폐지하고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징병제도를 개혁했다. 이때 시베리아 철도가 부설되었고 대도시에는 생산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농노 시절보다도 더 비참했다. 산업재해에도, 직업병에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견디다 못해 일으킨 폭동은 차르 군대에 의해 짓밟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레닌은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정적인 트로츠키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을 때, 레닌은 지상 권력을 차지할 결정적 시기를 기다렸다. 노동자들은 일해야 아이들과 먹고 살 수 있었으므로 파업에서 대거 이탈했다. 소비에트(평의회)는 정치범 석방과 사면, 신문 검열 폐지와 출판의 자유, 8시간 노동제 실현을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이에 정부는 특공대를 투입해 소비에트 간부들을 잡아들였다. 집행위원장이던 트로츠키는 유배형을 받고, 차르 군대는 수천 명을 살상하고 무장봉기를 진압했다.
1905년 5월 조선 지배권을 두고 일본 해군과 맞선 러시아 발트 함대는 전멸해 차르의 위신은 땅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건재했다. 말로만 정부를 비판했고, 사회민주노동당은 내분에 빠져 있었다. 레닌은 차르 정부를 타고 하고 새로 세울 정부를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또는 ‘절대다수의 소수에 대한 독재’라고 했다. 이들은 볼셰비키(다수파)를 자처하였고, 반대파를 만셰비키(소수파)라고 했다. 두 정파는 완전히 갈라졌고 1917년에는 총을 들고 서로를 죽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러시아 혁명가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안전하지 않았다. 레닌이 이해 5월 오스트리아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러시아의 패전과 차르 정부와 싸우는 것이 오스트리아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그를 풀어주었다. 레닌은 스위스로 도망쳤다. 러시아가 자본주의 후진국이라 사회주의 혁명은 시기상조라는 멘셰비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러시아의패전은 혁명을 촉진했다. ‘사회주의자는 조국이 전쟁에 패배하게끔 노력해야 한다’이것이 레닌의 주장이었다. 레닌은 평생 누군가와 싸웠는데 그것은 적이 아니라 노선이 다른 혁명가들이었다. 1895년 그는 비밀결사 청년들과 「노동자의 대의」라는 신문을 제작하다 인쇄소를 덮친 경찰에 붙잡혀 1년간 구금당하고 3년 유배형을 받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망명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이스크라(불꽃)」라는 정치 신문을 만들었는데 공장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퍼뜨렸다. 레닌의 민주주의를 경멸했으며 대중의 정서를 따르지 않았다. 노동자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사람들을 ‘꽁무니 주의자’라고 비꼬았다.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노동자 대중조직을 만들려고 하는 혁명가들은 순진하다고 놀렸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사회주의적 혁명 의식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강철같은 규율을 갖춘 혁명적 전위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가져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적 대중정당이 아니라 전투적 비밀결사를 원했다.
1917년 봄 러시아는 혼돈에 빠졌다. 소비에트를 장악한 멘셰비키는 자유주의자의 권력 장악을 용인했지만. 입헌민주당의 자유주의자들은 소비에트를 불편하게 여겼다. 열차로 핀란드역에 도착한 레닌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모으고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소비에트가 지주의 재산과 땅을 몰수하고, 모든 생산시설을 장악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6월초 개최한 ‘소비에트 전국대회’에서 대의원 777명 중, 볼셰비키는 105명 뿐이었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248명과 285명이나 됐다. 압도적 찬성으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을 상대로 대공세를 펴다가 참패한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끝내자고 선동했다. 임시정부는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고 소문을 퍼뜨리며 반격했고, 레닌은 폴란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몇 달 뒤인 10월에 개최된 소비에트 전국대회에서는 볼셰비키가 몰표를 얻었다. 볼셰비키는 군대를 보유한 거대세력으로 거듭났다. 레닌은 페트로그다드에 잠입해 볼셰비키를 불러 모았다. 11월 7일 새벽에 붉은 군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가 수도를 장악했다. 레닌은 혁명의 성공을 선언하고 ‘노동자 농민의 정부’위원장이 되었다. 케렌스키는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했다. 이를 ‘10월 혁명’또는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한다.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바꿨다. 소련은 민족자결, 반제국주의, 식민지 해방을 내세워 중국·인도·조선·베트남 등 식민지 종속국들에게 민족해방투쟁을 부추겼고, 서유럽과는 다른 방식의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동유럽을 사회주의로 편입시키며, 여러 나라에 소련식 모델을 전파했다. 중국과 함께 50년 동안 세계 냉전체제를 구축했으며, 미국과는 군사력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소련의 권력자와 공산당은 혁명의 이상을 스스로 짓밟았다. 볼셰비키의 이상주의는 권력의 쾌락을 이겨내지 못했다. 사회혁명으로 바꿀 수 없는 생물학적 본성이 호모사피엔스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〇 대공항·대장정
둘에는 ‘大’자가 들었지만 둘 다 재미난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은 전세계 교역량을 이전의 3분의 1로 떨어뜨려 최저수준을 기록한 1932년 7월, 영국은 캐나다 오타와에서 ‘대영제국 경제회의’를 열어 연방과 식민지 안에서는 자유무역을 하기로 하고, 다른 나라에게는 고율의 관세를 물리기로 했다. 다른 나라들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다. 세계는 블록으로 갈라져서 무역전쟁을 벌였으며, 대결적 외교정책과 군비확장 경쟁으로 이어져 ‘평화와 번영의 시대’는 겨우 15년 만에 끝나고 세계전쟁이라는 폭풍우가 다시 인류 문명을 강타했다. 수많은 경제학자, 정치가, 이론가들의 이론이 맞지 않았던 것이 대공항의 결과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1990년 이후 자본주의는 ‘더 나은 대안이 없는’경제체계가 되고 있다.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 혁명과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생산력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런 불황과 ‘승자독식’으로 흐르는 양극화 현상에서 보듯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임의로 통제하지는 못한다. 대공황은 더 많은 상품의 생산에 열광하고, 물질적 부의 축적을 최고선으로 여기던 시기에 세상을 덮친 먹구름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불러낸 요술램프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다. 앞으로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질까?
1934년 10월 16일, 중국 남동부 장시성(江西省) 징강산(井岡山)에서 숨어있던 9만여 명 홍군(紅軍)이 행군을 시작했다. 그들은 포위망을 뚫고 서진하다 원난성(雲南省)에서 북으로 틀어서 이듬해 10월 20일 감숙성과 산서성 일대에서 행군을 끝마쳤다. 368일 동안 9.600㎞를 걸었으며, 매일 한 차례 이상 전투를 치렀고, 강을 서른네 번, 고지대를 포함한 산을 열여덟 개를 넘었으며, 적의 포위망을 열네 번 돌파했다. 대장정을 시작한 9만 명 중에 완주한 사람은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세계 전쟁사에서 이런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이 장거리 행군을 ‘대장정(大長征)’이라고 한다.
풀뿌리로 연명하기도 하고 추위와 더위와도 싸워야 했던 이런 전쟁을 왜 했을까?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 한고조, 주원장, 누루하치 등은 농민군이나 부족의 군대를 이끌고 대륙을 정복했지만, 그들은 자신이 무너뜨린 것과 다르지 않은 전제국가를 그대로 이어 갔다. 그러나 장제스(蔣介石)는 아시아적 전제국가의 폐허 위에 자본주의 경제와 공화정을 들이려 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모택동은 장제스와 일본군을 상대로 20년 넘게 싸운 끝에 중국을 통일해 사회주의국가를 세웠다. 이들은 볼셰비키 혁명과 달리 무장봉기가 아닌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군사적 지구전을 펼쳐 국가권력을 차지했다.
홍군의 대장정은 겉으로 ‘항일 구국전쟁을 위한 장정’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생존을 위한 탈출이었고, 군대의 도주가 아니라 국가적 도주였다. 국민당 정부와 군벌의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농민들은 농기구와 가축을 챙겨 뒤따랐다. 그렇지만 대장정은 강하고 운 좋은 자들만 살아남은 군사작전이었다. 국민당 정부와의 피나는 혈투는 여기에 다 열거하기도 힘들다. 시안(西安)으로 여행갔을 때 홍군이 이름을 바꾼 ‘8로군’기지와 대만에서 장제스 군대의 주둔지를 둘러본 것이 그래도 기억에 남는다.
중국을 삼키려 했던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에 남경(南京)에서 방화·약탈·강간을 저지르고 30만이 넘는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청년과 국민당 패잔병들이 앞다투어 홍군에 입대했다. 홍군은 일본군과 싸우면서도 국민정부군과도 싸워야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을 불바다로 만들자 미국은 장제스가 이끈 국민정부의 협력을 요구하면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스탈린도 홍군보다 국민정부군을 동맹으로 여겼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고, 8월에는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국민군과 공산당의 합작은 명분을 잃었다. 1946년 4월 홍군과 국민정부군은 생사를 건 전면전을 벌였다. 430만 대 127만으로 병력도, 미국의 지원도, 장비도 모두 국민군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1947년 5월 산동성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인민해방군(紅軍)이 승기를 잡았다. 1949년 1월에는 선발대가 베이징(北京)을 점령했고, 3월 2일 황제의 별장 이화원에서 중앙정치국을 설치했고, 5월 국민정부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상하이(上海)를 점령해, 10월 1일 마침내 텐안먼(天安門)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렇게 반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시안사건’때문이었다. 동북군사령관인 장쉐량(張學良)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민족을 사랑한 애착으로 장제스를 포로로 잡고 겁박해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 것이 공산당을 도운 격이 되어버렸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옮겨가서 원주민을 학살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그는 1975년 죽을 때까지 총통 자리를 지켰다.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의 중국은 어떻게 될까? 현대 중국정치는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로써 ‘집단주의 버전’이다. 공산당은 무엇이 철인, 또는 현자인지 알고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공산당 지도자는 전권을 행사하면서 국가를 운영한다. 권력 분산·상호견제·복수정당제·언론자유 따위는 서구민주주의에나 필요하다고 여긴다. ‘신민주주의’를 중국 실정에 맞는 정치체제라고 옹호한다. 통일 왕조가 무너질 때마다 혹독한 내전의 고통을 겪은 중국 민중들은 적어도 당분간은 공산당의 지배를 용인할 듯이 보인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이 지구상에 없다.
〇 하이! 히틀러
독일군 장교들이 충성을 맹세하며 외치던 구호가, 아니면 단결을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던 ‘하이 히틀러’는 영화에서 많이 봤다. 그들의 어깨에는 한자 卍와 비슷한 견장이 그려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궁금했다. 선사시대부터 게르만 민족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한 ‘하겐크로이츠’라는 갈고리 십자가인데, 그것이 죽음의 상징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1921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에게 1,320억 마르크의 전쟁배상금을 내게 했는데, 이는 국내총생산의 10%를 내야 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국채를 발행했고, 국채는 제국은행이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 통화량이 급증하자 인플레이션이 덮쳤으며, 1923년 8월 독일 마르크화는 전쟁 전의 110분의 1로 떨어졌고, 9월에는 2,354분의 1, 10월에는 60억분의 1로 폭락했다. 빵 한 덩이를 사기 위해 30억 마르코를 리어커에 실어야 했다. 1조 마르크짜리 지폐가 나왔고 연일 폭동이 일어났다. 화폐개혁 등으로 1924년 진정세를 보였지만 말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일자리를 주고, 물가를 안정시켜 준 히틀러를 미워할 독일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24살 때 독일 뭔헨으로 이주했고,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제국 군대에 들어가 참호에서 전우애를 체험했다. 1918년 해군의 반란으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세워졌다. 하지만 자본가, 지주들은 재산과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고 제국시대 공무원과 판사들이 행정과 치안을 주도했다. 군대·정부·민간단체를 불문하고 집권 사회민주당을 비판하는 것은 금기시했다. 국민의식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극우적 군부와 왕정복고파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히틀러는 뛰어난 연설로 1921년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을 창당해 바이에른 주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당원들은 그를 지도자가 아닌 선전원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음했다. 1934년 힌데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국민투표에서 승리해 총리 겸 총통이 됐다. 경제에서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둠으로써 지지기반을 다졌다.
히틀러의 경제개발은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했는데, 도로 건설, 토지개량, 대규모 병영과 비행장 등의 건설에 중장비 대신 인력을 쓰게 했으며, 군대와 경찰을 대폭 증원했고 친위대도 5만 명 넘게 채용했다. 감옥과 수용소를 지어 반대파를 가두고, 유대인 상점을 폐쇄하고 직장에서 쫓아냈다. 미혼여성에게 자금을 대 결혼하게 하고 직장내 기혼여성은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일자리는 ‘게르만 남자’에게 돌아갔다. 노동자와 빈곤층 남자들은 환호를 질렀다. 600만이 넘던 실업자는 거의 사라졌다. 독일에서 대공항의 그림자를 걷히고 승승장구했다.
1940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덴마크·노르웨이·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를 점령한 독일은 폴란드를 러시아와 분할 점령하고,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까지 차지했으며, 이탈리아, 일본과는 삼국동맹을 맺었다. 미국은 참전을 거부하면서 영국과 중국의 국민정부를 지원하기만 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과 영국은 동맹을 맺었다. 소련군 65만 명이 죽었고, 독일군도 25만 명이 죽었다. 독일 괴뢰정부가 인도차이나를 일본에 넘겨주자 미국은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수출을 중단했다. 그러나 12월 7일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고, 뒤 어이 독일과 이달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세계는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과 독일 등 주축국으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일본군이 버마·말레이시아·싱가포르·필리핀을 점령하고 남중국해와 인도양까지 호주를 공격한 1942년 봄까지는 주축국이 우세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러시아 전선과 태평양·대서양에서 전세를 뒤집었다.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했고, 1944년 6월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부전선을 장악해 파리를 탈환했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 도시들을 모두 폭격했으며,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겼고, 이듬해 8월에는 본토를 공격하다가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나치와 이들은 군인 2천만, 민간인 4천만의 목숨을 앗아갔고, 제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치는 유럽에 살던 유대인 절반에 해당하는 600만 명을 죽인 것으로 추정한다. 1948년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운 뒤에 예루살렘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만들었고 희생된 사람 300만의 신원을 확인했다. 홀로코스트란 구약성서에서 희생물을 통째로 태우는 종교의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온주의자는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런 인종주의는 나치의 전유물이 아니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미국의 인종주의는 지금도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게는 ‘가해자’가 됐다. 소련은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을 폭력으로 짓밟았고 지금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며 우크라이나를 짓밟고 있다. 독일의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남겼다. 사이비 과학과 인종주의를 내세운 히틀러를 독일국민은 왜 그토록 지지하고 열광했던가? 독일 군인과 공무원은 히틀러의 학살명령을 왜 그대로 집행했는가? 독일국민은 집단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책임은 후세에게 상속되는가? 독일 국민은 나치와 맞서 싸우지 않았다. 누구도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적은 없다. 그렇지만 독일 정부와 국민은 나치시대 국가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는 있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책임을 이어받고 있다. 독일 정치 지도자와 시민들이 나치시대의 기억을 새롭게 되새기는 이유는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〇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땅 사이에 이스라엘이 끼어 있는지,‘이스라엘’사이에 ‘팔레스타인’이 끼어 있는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두 나라가 위치한 그곳에는 19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인구 50만 가운데 유대인은 고작 2만 5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는 인종차별이나 종교갈등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시온주의 운동이 가열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토지를 매입하고, 나중에는 아랍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았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의견을 묻거나 권리를 고려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대인은 민족국가를 세우려고 했고, 오스만제국과 싸우던 아랍인의 열망은 완전히 무시했다.
1945년3월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시리아·레바논·요르단·예멘의 대표들이 카이로에 모여서 ‘아랍연맹’을 창설했는데, 이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반면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자극받은 시온주의자들은 매우 전투적이었다. 그 땅을 점유하고 있던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관공서, 영사관, 민간호텔 등을 무차별 공격했다.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나누어, 두 개 국가를 만드는 안을 채택했다. 그냥 지도 위에다 나눈 두 개 나라는 이후 오늘날까지 끝없는 전쟁을 이어오고 있다.
전 세계에 유대인은 1,500만에서 1,800만 명이 사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에만 가장 많은 600만 명이 산다. 생물학적·문화적으로 유대인을 단일 민족으로 보기는 어렵다. 구분의 기준이 종교뿐이기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 민족이 기원전 10세기 무렵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을 세우기는 했지만,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등의 침략을 받아 이집트로 도망가는 등 멸망했다. 그 뒤 페르시아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예수가 등장한 1세기 무렵 반란을 일으켰다가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때 대부분 이베리아나 프랑스로 흩어졌다.
시온주의자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비타협적이며 공존하는 어떤 방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규모 파업과 협상 주의자 아라파트를 암살했고, 게릴라 부대는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했다. 유대인도 그에 못지않아 이스라엘 군대는 항의시위를 진압하면서 청년들을 사살했고, 아라파트와 협상을 벌였던 라빈 총리마저 암살했다. 팔레스타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수백만 팔레스타인 민중의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이고, 세계의 화약고일 뿐이다. 20세기에는 1,2차 세계대전, 대공항, 홀로코스트,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도 모두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됐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비극은 지나가지 않았다. 80년 동안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은 자신들이 유럽에서 수천 년 동안 당했던 홀로코스트 참극을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고스란히 떠안기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공존에 대한 합의를 찾지 않는 한 유대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를 얻기는 영원히 어려울지 모른다.
〇 베트남 전쟁
베트남 민족의 끈질긴 투쟁성과 역사 등 많은 이야기 중 한국과 관련된 부분만을 살펴본다. 1964년 비전투 요원을 파견했으나,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했는데, 이 가운데 5천여 명이 전사하고 10만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독성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심각한 휴유증을 앓았고 아직도 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1992년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맺고 2015년에는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으며, 작년에 중국을 제치고 제1의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문화·스포츠에서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으며, 특히 박항서 축구 감독의 활약은 베트남에서 영웅대접을 받기에 충분한 모양이다. 그러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다. 베트남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이유다. 기억을 지우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따이한’부대가 그토록 전공을 세웠다면, 그보다 못한 무기를 가졌던 베트남해방전선의 피해는 얼마나 컷을까를 짐작하게 한다. 어린이를 포함한 양민 70여 명을 학살한 퐁니·퐁넛 사건은 한국군이 저지른 양민학살 사건이었다.
문제를 덮어두고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없다. 나치도, 일제의 조선 침략도, 제국 시대 불행한 일이었고 ‘좋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잊어버리고 덮고 가자’는 것은 일본 우익과 다를 바가 없다.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기회를 잡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을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이란 없다.
〇 핵무기
북한이 연이어 핵무기 개발로 상대?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핵 개발이 전쟁을 위한 무기로만 쓰인 것은 아니지만, 그 위험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꼬마(Little Boy)’는 12.5㏏에 불과한 포신형 원자폭탄이었고, 3일 뒤에 나가사키에 투하된 ‘뚱보(Fat Man)’는 플루토늄 폭탄으로, 지금 세계 여러 나라가 보유한 메가톤급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 것은 주민 38%인 16만 명, 나가사키 것은 주민 27%인 7만 5천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들 도시에 끌려갔다가 살고 있던 조선인이 10만 명 정도였으니 둘 중 한 명은 피해를 입었다. 생존자는 평생 빈혈·갑상선장애·폐암·혈액암 등을 앓고 있다. 미국은 나가사키에 ‘뚱보’를 투하하기 한 달 전인 7월 16일 뉴멕시코 사막에서 핵실험을 했다. 3천만분의 1초라는 짧은 시간에 다이너마이트 2만 톤과 맞먹은 위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300㎞ 떨어진 곳에서도 섬광이 보였고, 150㎞ 떨어진 지점까지 굉음이 들렸다. 지름 300m 구덩이가 파지고, 반경 1.5㎞ 안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졌고, 철탑도 증발했다. 이 일이 있은 4년 후에는 소련이 핵폭발 실험에 성공해 미국의 핵독점을 깨버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적진으로 쏘아 보낼 미사일 개발에 돈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이제 여기에 북한도 가세하고 있다.
〇 에필로그
20세기 마지막 ‘독일과 소련의 해체’이야기가 남았지만, 아마도 읽어볼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다 간추리기는 싶지 않을듯 싶어서 프롤로그 ‘믿을 수 없는 미래’를 보며 줄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지만 진화의 동물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바꾸어 놓았고 바꾸고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돌도끼를 들고 짐승을 쫓던 석기시대 사냥꾼이나 핵폭탄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들고 사냥감을 찾는 권력자나 똑같다는 뜻이다. 인간은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낯선 것을 경계하고 내가 아닌 외부 집단을 적대시하면서 살았다.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성취할수록 이 본능은 변하지 않고, 앞으로 더 커질지 모른다. 핵무기를 가진 두 나라가 핵전쟁을 벌이면 두 나라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핵 주권과 환경주권은 각각의 국가에 있다. 모든 국가는 다른 나라를 불신하고 경계하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지구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인 호모사피엔스는 신이 되려고 한다면서 힘은 세지만 책임의식이 없는 신이 가장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만약에 인간이 신이 된다면 그런 위험한 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인간이 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가 유전자를 조작해 생명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능력을 확보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핵전쟁이나 기후변화로 이전에 절멸할 확률보다 높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절멸할 운영을 피하는 데 성공할 만큼 현명해 진다면 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경우든 우리가 아는 20세기는 끝났듯이 ‘역사의 시간’은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논리적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