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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바른 이해(고동엽)
(출처 : http://blog.daum.net/ipssen / 신학바른이해)
[말라기 3장 10절]"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הביאו את־כל־המעשר אל־בית
베이트 엘 함마셀 콜 에트 하비우
house-of into the-tithe whole-of *** bring
나의집 십일조 온전한 들여
אוצר ויהי טרף בביתי ובחנוני
우베하누니 베비티 쎄레프 웨이히 하오찰
indeed-test-me in-house-of-me food that-he-may-be the storage
나를 시험하여 나의집에 양식 있게할지니 창고에
נא בזאת אמר יהוה צבאות אם־לא
로 임 치바오트 야웨 오말 바오트 나 not if Hosts Yahweh he-says in-this now -
만일 그렇지 아니한--만군의-여호와가 -말한다-그것으로
אפתח לכם את ארבות השמים
하사마임 오레보트 에트 라켐 에페타
heavens floodgates ** for-you I-throw-open
하늘들 문 너희를 위해 붓다.
והריקתי לכם ברכה עד־בלי־די׃
디 베리 아드 보라카 라켐 와하리코티
room-enough not until blessing upon-you and-I-pour-out
풍족히 아니하나 까지 복을 너희위에 내가 부은다
'시험'-잘못된 해석.
"시험하다" 원어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
1.נסה'나싸'- 헬라어 peirazo '페이라조-시험하다(test, tempt)
2.בחנ'빠한'- 헬라어 dokimazo'도키마조'-증명하여(prove)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 "증명하여"이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또한 공동체 자체를 유지시켜주는 그들의 신앙행위의 표현이다.
이 십일조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 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등 에서 행해졌다. 십일조는 종교적 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자가 십일조를 받았다. 아마도 본래 신에게 드렸던 십일조를 신격화 된 통치자에게 드리게 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삼상 8:15-17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기 위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의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될 것이다."라고 하므로서 십일조가 하나님께가 아니고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된다는 왕제도의 폐해의 하나임을 지적하고 있다.
(창 14:18-20)에서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언급된 곳인데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아 그에게 축복하니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바치는 장면이다.
특히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는 제사장 직이 그 후에 나타날 완전한 제사장 직에 대해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구약 제사 제도를 주관했던 레위인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땅의 소출이 아니라 전쟁에서 얻은전리품.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다는 언급이 없다.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에 십일조가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또는 풍습에 따라 드린 행위이다.
(창 28:20-22) 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도중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시고 훗날 자신을 갑부가 되게 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재물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것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후 400년이 지나서야 십일조 제도가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레위기 27:30-33) 여기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았는데 바치는 사람이 자기 임의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20%까지 바치도록 하였다.
(민수기 18:21-32)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주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주께 돌려드린다는 표로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드려야 했다.-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신명기 12:4-19) 백성들은 모두 중앙장소로 가서 거기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에 한정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신명기 14:22-29, 26:12-15) 십일조를 받은 중앙 성소의 책임자들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다. 3년 차 십일조는 사회보장 공동체에서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이 해당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곡식과 가축이라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십일조가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의 대체적인 십일조는 레위인만이 차지하는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전이 아닌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각 성읍에 십일조를 직접 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사회 보장제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레위의 제사장들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십일조로 변해 갔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벧엘에서 제사를 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그러면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는다.
“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려무나"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의식 같은 것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삼 년마다 행하던 십일조를 삼 일에 한 번씩 하면서 복을 더 얻으라, 하면서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비웃으며 비꼬았던 것이다. 즉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교회사적인면에서 십일조가 처음에는 하나님께 자의(自意)로 즐겨 바치는 경건한 신앙행위로 받아들여졌으나, 6세기 이후의 교회는 점차 신자에게 이를 강요하다가, 8세기에 이르러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카를대제 등은 이를 아예 의무화하였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私有敎會制)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世俗領主)들은 자신들의 영민(領民)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公議會, 1078) 및 1179년 그레고리우스의 교회제도개혁 때에도,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소교구(小敎區)의 사제(司祭)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은 대 십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은 소 십일조), {개간지(開墾地}는(신 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허지만 앙시앵 레짐의 말기에는 민중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 1789∼1790년 폐지되었으며, 신앙심이 강한 홀랜드 국가에서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갹출로 이뤄나가는 교회들이 많아졌다. 이유는 신약에서는 레위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 이라는 직분도 없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폐지,
미국 -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 하에 결코 교회세와 강제적인 십일조를 걷지 않음.
독일에서는 1807년에 폐지,
오스트리아 -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자기 수입의 1%만 내고,
덴마크 - 시에 따라 차이가 조금 있지만, 국가에서 걷는 세금형태(교회세)로 1%만 내고,
핀란드 - 시에 따라 다르지만. 세금형태(교회세)로 1%~2.25% 내고
이탈리아 - 세금형태로 0.8% 받아 그것을 위의 비율대로 카톨릭교회, 이탈리아정부 등이 나누고
스웨덴 - 세금형태(교회세)였으나 2000년에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고 그 후엔 개인적으로 교회에 내는 건 가능하고
스위스 - 공식적으로 십일조를 걷는 곳은 없고, 일부 주에서 2.3%까지 세금형태(교회세)로 거두고
아일랜드 - 1869년 폐지.
스코틀랜드 - 2000년 폐지.
스페인 - 1841년 폐지.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에선 각각 폐지되었던 것이다.
왜 한국교회만이 복의 빌미로 삼으면서 십일조를 거둬들이는가?
말3:7-12의 십일조 문제는 흔히들 강조하는 십일조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BC 5세기의 이스라엘 사회는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아주 암울했었다. 파사의 식민지로서 이사야.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이 외쳐대던 영광스런 메시야 왕국이 가시적이면서 즉각적으로 임할 것으로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BC 537년 제1차 바벨론포로 귀환 1세기가 지났는데도 이뤄지지자 의심이 깊어만다. 좀더 구체적인 배경설명에 있어서 느헤미야와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적 상황을 들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와 말라기는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A). 느헤미야 10:37-39; 12:44-47;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한다. 백성들이 예물로 드리는 밭의 소산물을 받고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갖다 놓으라고 한다.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지원토록 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거두어들인 십분의 일 중의 십분의 일을 성전 창고에 있는 각 방에 두어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에도 성전을 잊어버리지 않고 체계적인 십일조와 헌물 관리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해 율법이 정한 십일조, 거제물, 처음 익은 곡식, 등을 여러 마을에서 수집하여 성전 창고에 쌓으라고 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하나님 섬기는 일만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포로 후 이런 조처가 있었지만 십일조의 혜택을 받아야 할 레위인은 정작 생계문제 때문에 성전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느 13: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
그래서 성전제사는 중단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이 방치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던 제사장이 성전 창고에 모아둔 십일조를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 13:7-9 "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
근본적으로 십일조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횡령의 문제였다. 당시 엘리아십 제사장과 도비야라는 사람이 서로 공모하여 성전창고 바로 옆에 자기 개인창고를 만들어놓고 십일조 및 각종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창고로 빼돌림으로서 그 식량이 바닥났던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적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말 3:8, 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제사장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그리하였다고 했지만, 그것이 성전에 있는 창고와 관련이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보다는 성전과 관련이 있는 제사장, 레위인, 지도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도적질 이라는 표현은 전 백성들의 문제가 아니라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성전 창고 강탈 행위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의 종들과 동일시 하셨기 때문이다.
말라기 2장은 제사장들의 도덕적 부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이 담겨 있고 3장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더러움을 깨끗케 해서 드려질 것과 헌물이 가난한 자들에게서 착취하였던 자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으로 요청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십일조와 헌물”도적질 하는 것을 중단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구절 역시 1,2장에서 제사장들에게 행한 심판 내용의 연속이다.
(말라기 3:7-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본문은 구약성경에 언급된 십일조와 관련된 마지막 언급으로서 십일조 지지자들이 인용하며 복의 근거로까지 제시 한다. 십일조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선 말라기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말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말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 니라")* 병든 짐승들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림으로써(말1:8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저주하시고 그들의 복을 저주하리라는 말씀을 내리신다(말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말라기 3:10 본문에 언급된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레위인을 비롯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창고에 저장해두어야 하는 십일조이다(느 10:37-39). 그리고 계속해서 과거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착에 이르는 동안에 하나님 내리신(밤낮으로 만나와 메추라기) 풍족히 먹고 남은 것 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과연 그 성전일하는 자들과 가난한자들에게 줄 십일조를 성전 옆 창고에 들이고 제사장들은 그것들을 몰래 빼돌리지 말고 정직히 행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지 아니 주시는지를 시험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잘못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도 "주"를 달았다시피'시험하여'라는 단어도 잘못된 이해이다. "시험하다" 원어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 נסה'나싸' 와 בחנ'빠한' 이다.נסה'나싸'는 헬라어 peirazo '페이라조'인데 이는 글자 그대로 '시험하다(test, tempt)' 뜻이고 בחנ'빠한'은 '마음의 상태를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는 dokimazo'도키마조'(prove)이다.
이는 성경의 다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할 때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נסה'나싸'단어 이지만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모두 이 두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며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 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고만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말라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던 백성이 이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관계회복과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기 때문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바른 헌물과 제물을 드리는 온전한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몇 구절 있다.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18:12 그리고 히브리서 7:1-10이 유일한 본문들이다.
(마 23:23; 눅 11:42; 18:12)“너희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23:23). 그리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나 이것들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23:23). 이 말씀은 십일조 지지자들에 의해서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십일조 실행을 정확하게 말씀하심은 찾을 수 없다. 마태복음 23장에 언급된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십일조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어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십일조를 실행했다거나 가르침이 없을까?
그러면 헬라어 원문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ouai umin, grammateiV kai farisaioi upokritai, oti
우아이 휘민 그람마테이스 카이 파리사이오이 휘포크리타 호티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화 있을찐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외식하는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기 때문이다.
apodekatoute to hduosmon kai to anhqon kai to
아포데카투테 토 헤두스몬 카이 토 아네돈 카이 토
ye tithe the mint and the dill and the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kuminon, kai afh kate ta barutera tou nomou,
쿠미논 카이 아페 카테 타 바루테라 투 노몬
cummin and ye{haev}left the heavier things of
버렸도다 더 중요한바 것 들인 율법의
thn krisin kai ton eleon kai thn pistin tauta .
텐 크리신 카이 톤 에레오온 카이 텐 피스틴 타우타
judgment and -- mercy and -- faith but these things it .
의와 인과 신은 그러나 이것들도
de edei poihsai kakeina mh afienai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아페이나이.
behoved to do and those not to leave
행했어야했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었도다.
poihsai(포이에-사이) :행하다 부정과거시제이고, afienai(아피에나이): 버리다 ->부정과거시제이다. 현재형은 afihmi(아피에-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그러나 이것들도[tauta-타우타] 행하고 저것들도[kakeina- 카케이나-버릴 수 없는 저것들'은 십일조를 포함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다양한 제사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둘다 복수형이다)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는 말씀은 그렇게 행하라는 명령형 문장이 아니라 직설형 미완료 동사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게 행했어야 했었다는 당위성만을 말하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율법을 지킨다고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참으로 율법을 지키려면 물질의 십일조만 드릴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더욱 중요한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고 다 지켜 행했어야 했었다는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뿐이지 그렇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십일조를 안하는 사람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지나칠 정도로 철저히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책망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물질에만 집중하고 있고 의와 인과 신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말씀을 이용해서 십일조 철저히 바쳐야 한다는 구절로 설교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본래의 뜻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본문은(마 23:23) 그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맥락에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이 유효한 시기이며, 바리새파인들이 십일조에 대해 충실해야 함은 사실이다. 십일조는 의식법에 속하고, 성전 예배도 진행 중이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십일조에 필요로 했다. 예수님의 구약적 입장에서 말씀하셨다는 근거는 “때가 찼다”는 선언인 것이다. 새 시대의 실제적인 전환점은 그분의 죽으심,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써 이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는 자신을 율법의 규정에 복종하셨으며(갈 4:4), 그분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구약 시대의 문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부탁을 하신 것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십일조와 같은 의식법과 관련된 언급들은 신약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십일조가 신약의 어디에서도 “폐지되었다”것을 못 봤다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안식일과 제사 제도에 대해서는 “폐지되었다”는 문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과 일반이다. 똑같은 원리로 신약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로서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고는 했으나, 그러나 자신은 그것이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요구하지 않고(고전 9:15, 18),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8에서 감독이 복음을 전하면서 수고비를 받아야 할 것을 언급했지만 구약의 기업이 없던 레위인들이 하던 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만 언급하였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를 도우려고 사용되는 돈을 모으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특히 고린도)에 알리고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울 것을 호소하였지만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 그대로 따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롬 15:25-27).
고린도 교회에게는 이런 식으로 드리는 헌금의 정신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고 썼다. 이것을 바울은 “참 연보” 즉 넉넉히 주는 선물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헌금을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함으로써 현대 교회가 일괄적으로 “십분의 일”을 부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헌금 방법을 실시하였다(고후 8:12).신약성경에는 우리가 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표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이 없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
십자가에서 율법[의식법에 속하는 십일조 등]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기능은 종결되었던 것이다. 구약의 피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 그 원형이다.
[히7:19]"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
그래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았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의 기능의 종결에 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다. [히7:27]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모든 것을 다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7:18]" 전옛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율법을 폐하셨다.
[롬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고 완성인데도 옛 언약의 백성들은 제사제도를 계속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 제도를 하나님은 성전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고 자신의 심장을 내보이셔서 물리적 방법으로 폐지하셨다. 그래도 성전이 있는 한 레위제사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 로마의 디도장군을 들어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시키셨다.
그후 성전재건은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 대전 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을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으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코헨은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헨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율법을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하셨기 때문에 구약 율법중 의식법인 십일조 등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다시 허물어 버리는 아주 무서운 저주의 행위인 것이다. ♣
[출처] [스크랩](십일조) 십일조 바른 이해(고동엽)|작성자 맑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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