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3
6월9일[연중 제1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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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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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OWLsb2xfeM
[춘천교구 김상혁 노르베르토(해안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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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바오로 사도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방인의 사도’, ‘모든 민족의 사도' ‘위대한 대설교가’ ‘백 개의 팔을 지닌 일꾼’,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저술가’...
생각만 해도 존경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바오로 사도이지만, 전도 여행차 로마를 떠나 아테네를 거쳐 코린토로 여행하기 전, 이렇게 솔직히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1코린토서 2장 3절)
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는 계속되는 전도여행 중의 갖은 박해와 다양한 위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코린토 12장 7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오로 사도는 변변한 수입도 없어 늘 가난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막 만드는 일과 복음선포를 병행했습니다. 오늘날 너무 편하게 사목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당시 코린토는 아카이아라는 로마 주(州)의 수도인 동시에 로마 집정관의 체류지였으며, 로마 군대의 주둔지였습니다. 또한 동서를 연결하는 국제도시였기에, 다양한 인종, 문화, 학문, 종교, 상업의 집결 장소였습니다.
자연스레 코린토는 죄와 타락의 도시, 거대한 부와 사치의 도시,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도시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코린토 교회 안에는 바오로 사도의 직무 수행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비방하는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가 다른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불림 받은 순수 정통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문제 도시 코린토 교회의 방문을 앞둔 바오로 사도였기에 너무나 당연히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차라리 이곳을 건너 뛰고 다른 도시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피해가지 않고 정면 돌파를 감행합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신은 비록 나약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하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반대자들도 자신이 돌봐주어야 할 양떼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큰 마음으로 포용합니다.
코린토 2서는 바오로 사도가 혈혈단신으로 코린토 교회의 회개와 성장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투쟁하고 있는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목숨 건 전도 여행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바오로 사도가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코린토 공동체 건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참으로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코린토 2서만큼 바오로 사도의 인간적이고 영성적인 탁월성을 느끼게 해주는 편지는 다시 또 없습니다. 이보다 더 열정적이고 눈물겨운 편지 역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명대사입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 코린토 4장 16~5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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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kF66Q-n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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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때마다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하는 예방주사 같은 한 마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성령을 모독할까요? 성령에 자신 안에서 행하려고 하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방은 100% 가능하지만, 일단 걸리면 100% 죽는 병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광견병입니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특이하게도 우리 몸의 면역세포를 다 피해 다닙니다. 뇌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포도, 신경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뇌에 도달하면 100% 사망입니다. 아직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지만, 광견병은 예방주사만 맞으면 100% 예방됩니다. 그런데도 한 해에 지구상에서 6만 명 정도가 광견병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자기 몸 안에 광견병 예방주사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 광견병 바이러스는 무엇이겠고 또 그 광견병을 무력화시키는 예방주사는 무엇일까요? 광견병은 ‘공수병’이라고도 하는데, 물을 무서워해서 목이 말라서도 죽습니다. 사실 물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을 거부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령은 마치 성모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십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긍정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잉태시키지 못합니다. 사람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가 된 천민 아이는 기둥에 들어가 죽은 어머니의 피로 도망치고 싶은 이기적인 자아가 죽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의 자아,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데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게 됩니다.
2002년 4월 29일,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총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에르푸르트라는 도시의 구텐베르크 김나지움(10~19세 학생들이 다니는 인문계 학교)에서 퇴학당해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교사 열두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총 열여섯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진 로베르트(19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되어 퇴학 처리되었고, 복수심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섰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총은 난사하는 그 앞에 60세의 라이너 하이제 교사는 복면을 쓴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복면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 로베르트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이제 교사는 자기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내 눈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보란 말이다.”
로베르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은 실컷 쐈습니다. 이제 재미가 없네요.”
로베르트는 순순히 총을 내려놓았고 하이제 교사는 그를 빈 교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습니다. 잠시 후 로베르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하이제 교사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임을 인정할 때 영향을 줍니다. 사실 퇴학 당한 것은 로베르트 자기 탓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마다 하는 “내 탓이요!”는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만들고 말씀과 성체로 오는 성령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기도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원수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힘들고 암에 걸려 죽어가는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탓입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수 같은 인가도 용서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고정원 씨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새워 기도했고 성령께서 용서할 힘을 주셔서 그를 양자로 삼게 하셨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 앞에서 부족한 게 다른 사람 탓이라고 하면 그 선물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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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댈러스 인근에 ‘보현사’엘 다녀왔습니다. 스님도 성탄 때는 성당으로 왔다고 합니다. 보현사에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절의 주지 스님이 ‘여자 스님’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남자 스님인 줄 알았는데 여자 스님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아직 예불 중이라서 법당에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기다리면서 성당과는 사뭇 다른 사찰의 예불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끊임없이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고, 불자들도 따라 하였습니다. 성당의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찰의 예불은 목탁과 염불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은 제대와 신자 석이 있고, 신자석은 대부분 의자로 되어 있는데 사찰은 아직 의자가 아닌 방석이 깔린 바닥에 앉는 것 같았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과 차를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공양하고 가라고 했는데 차만 마시고 왔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천주교회가 동양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서양에 전해지는데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미국에서는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주일로 옮겨서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드리면서 언젠가 미국에서도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비슷한 질문을 아담의 아들 카인에게도 하십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카인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아담은 어디에 있다고 대답하기 전에 알몸이라서 숨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카인도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카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보현사의 지암 스님이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나 어디에 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스님이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사제로 33년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찰의 분위기와 사찰의 문화가 제게는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보현사에서 17년을 주지 스님으로 지내고 있는 지암 스님은 전임 신부님들과도 인사했다고 합니다. 스님 또한 성당의 사제가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출가해서 30년 넘게 불가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당의 분위기와 성당의 문화가 생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스님이 ‘탐, 진, 치’를 멸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자들에게 전하며 팔정도의 삶을 살아간다면 부처님의 물으심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복음삼덕과 향주삼덕’의 가르침을 교우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면 저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함 없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먼저 묻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의 죄를 묻기 전에, 그들이 뉘우칠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에 대한 ‘틀’을 새롭게 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를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는 모두가 불자이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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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0-35: 사탄은 끝장이 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어 당신께로 돌아가게 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마귀가 들렸다느니,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22절)고 한다. 아마 이것은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악마는 언제나 분열시키는 존재이지 일치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제1독서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알게 된 것은 자기들이 맨몸이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실 때, 주님께로부터 몸을 피하여 숨는다. 아담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10절) 하느님께서 아담을 추궁하신다. 그러니까 아담은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라고 했던 하와에게 그 탓을 돌리고 있으며, 하와는 뱀에게 탓을 돌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며, 그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두 번째는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케 하며, 마지막으로 자연과도 관계가 악화되게 만든다. 이렇게 사탄은, 베엘제불은 일치시키는 자가 아니라, 분열시키는 자이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이렇게 먼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며(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나의 죄를 알지 않을까? 생각), 자연과도 관계가 악화(가시덤불과 엉겅퀴) 된다. 사탄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이 모든 관계회복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사탄을 물리친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억지이며, 그것이 바로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탄과 악령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성령 때문이었다. 성령은 모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영광으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성령의 첫 열매는 용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선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사도 4,32)라는 말씀처럼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성령을 거슬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나 자신을 그분 앞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작은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죄를 짓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이런 죄는 하느님께서도 용서해주시지 않을 거야! 하면서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고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 앞에 언제나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서 더욱 복되신 분이시다. 마리아는 말씀을 낳으셔서가 아니라,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셨기에 더욱 복되시다. 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관계도 그 구원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고, 당신을 낳으신 분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그 여인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다.”(마태 12,50; 루카 8,21) 라고 하신다. 진정 하느님 안에서, 즉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살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 내가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라고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형제들, 즉 혈육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참조) 그 혈연관계가 무슨 득이 되었나? 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잉태하였을 때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혈족관계도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나날이 새로워지는 내적인간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으로 가야할 것이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며 언제나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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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율법 학자들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비난하시며 다음과 같이 이르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심지어 신성을 모독하는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의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서(1,10 참조)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성령으로 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행위의 근본적 의미는 죄의 용서입니다. 곧 성령의 행위는 죄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행위를 거부합니다.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자비를 청하며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 용서하시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행위를 거부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령의 행위는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행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의 용서와 구원을 믿지도 받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용서를 거부하고 우리를 죄의 상태에 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비를 청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죄든 모두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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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탄의 새로운 전략 전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르 3,22-30)
1) 여기서 ‘베엘제불이 들렸다.’라는 말과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렸다.’ 라는 말은, 뜻이 같은 말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그런 말로 비방하고 비난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는 존재들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인정하기가 싫고,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생각해낸 논리가 바로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입니다. <하느님의 힘도 아니고 사람의 힘도 아니라면, 남는 것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식적인 논리로 그 억지 논리를 반박하십니다. 만일에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마귀 우두머리가 마귀들을 쫓아낸 것과 같은 일인데, 사탄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살 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반박입니다. <사탄과 마귀들은 자살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2)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비방한 것은,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그런 것인데, 어쩌면 그것이 사탄의 전략 전술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사탄의 일’로 깎아내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일이고, 사탄은 바로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을 빌려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사탄이 사탄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원래 천사였기 때문에 주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해서 나타나고(2코린 11,14), 성인 성녀들의 모습으로도,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도 위장하고, 어떤 경우에는 성모님으로도 위장하고, 심지어 예수님으로도 위장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으로는 위장하지 못한다고 전해집니다.>
율법학자들이 사탄의 편에 서려고 한 것은 아닌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방하고 깎아내림으로써 자신들도 모르게 사탄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렇게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유혹 당하는 줄도 모르고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3) 옛날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비방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갖긴 했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어쩌면 ‘무관심’이 사탄의 새로운 전략 전술일 수도 있습니다.
선교활동을 할 때,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에 반대하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이라면 설득하거나 깨우쳐 줄 수 있는데, 관심 갖지도 않고,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더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또 구원의 진리나 내세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전혀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현대인들은 도대체 무엇에 관심을 쏟을까?
요즘 TV에, 소위 ‘먹방’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에서는 맛있는 음식만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 풍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복음 선포는 별로 효과가 없고, 성소자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냉담자는 더욱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인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 또 육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사탄의 새로운 전략 전술일 수도 있습니다.
4) 똑같은 스마트폰을 사용해도, 그것으로 복음 말씀을 찾아서 읽으면 그 기계는 구원의 도구가 되지만, 가짜 뉴스나 보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동영상만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사탄의 도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TV도 그렇고, 라디오도 그렇고, 신문이나 잡지나 영화나 각종 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복음이 널리 선포되고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양으로 사탄의 유혹도 퍼지고 있습니다. 양적인 면만 본다면, 인터넷은 이미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걱정과 우려만 하고 있을 수는 없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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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님]
<영적 투쟁에서 싸워 이겨 주님께로 나아가자.>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통한 복음 선포의 활동이 진행될수록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의 오해와 비난의 강도도 높아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몇몇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 3,22 참조)라고 예수님을 모함합니다. 베엘제불이란 우두머리 마귀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 ''미쳤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내고 있다고 재차 모함합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와 구마행위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며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라는 단순한 이치를 제시하며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사탄을 묶어놓는 이는 사탄보다 더 힘센 이, 곧 하느님 능력을 드러내는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시는 일을 사탄의 것으로 돌려 예수님을 통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느님 편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하느님을 반대하는 세력의 인격화된 표현들이 마귀·사탄·악마·유혹자·원수 등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그런 세력들이 언급돼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기에 신앙생활에서도 그들과의 영적인 싸움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기도하는 사람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성인들, 그리스도 자신이 기도란 일종의 싸움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누구와 싸우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이며, 인간에게 기도를 외면하게 하고, 인간과 하느님의 일치를 깨뜨리려는 유혹자의 계략에 맞서는 싸움이다. (?)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을 위한 ‘영적 싸움’은 기도의 싸움과 분리될 수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5항 참조)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물리쳐 이기신 분이니 하느님의 반대자들을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영적 투쟁에서 우리가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보다 더 깊은 일치를 위해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기도생활을 실천해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표현은 오늘날 근동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나 가까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란 그분의 친척들로 이해됩니다.
그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며 오히려 반문하십니다. 그런 말씀이 어머니에게 불효하라거나 친지들과 반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강조점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기준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교회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세워졌고, 하느님 뜻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더 자주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에 담긴 하느님 뜻을 실천해 일상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여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20240609 가톨릭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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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조철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어머니와 어느 교우의 편지>
대만에서 자취 생활을 하며 공부하던 시절, 나의 몸과 마음이 너무나 엉망이 되어버린 때가 있었다. 다급했던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아들 신부를 위해 대만으로 넘어오셨고, 주방도 없는 단칸방에서 나를 위해 손수 식사를 챙겨 주셨다. 어느덧 한 달의 시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공항에서 어머니는 나에게 두 통의 편지를 건네주셨다. “신부님, 여기 두 개의 편지가 있어요. 하나는 내가 신부님에게 어머니로서 쓴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신부님을 가장 사랑하는 교우가 쓴 편지예요. 여기서 읽지 마시고 집에 가셔서 읽으세요.”
자취방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사랑하는 아들에게’라고 적혀 있는 첫 번째 편지 봉투부터 조심스레 열고 읽어 보았다. ‘아들아, 엄마야! 우리 아들 많이 힘들지? 엄마는 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단다. 나는 네가 공부를 끝마치지 않아도, 훌륭한 사제가 아니어도 전혀 상관없어. 힘들면 언제든지 포기하고 돌아와도 괜찮아. 엄마는 우리 아들이 그냥 건강하기만 하면 돼.’
그리고 ‘신부님을 가장 사랑하는 어느 교우가’ 라고 적혀 있는 또 다른 봉투를 열었다. 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아들 신부님, 신부님은 누구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제라고 생각해요. 어서 빨리 한국에 돌아오셔서 신자들에게 좋은 말씀도 들려주시고 착한 목자로서 살아가기를 늘 기도드립니다. 신부님 힘내세요!"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한 아들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사제를 위하는 교우로서, 두 가지 마음을 두 통의 편지로 남겨 주셨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다. 그런데 성모님은 ‘나 예수님의 어머니야’ 라고 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그냥 들어가셔도 될 법한데, 밖에서 조용히 예수님을 찾으신다. 예수님을 찾아온 성모님의 두 가지 마음을 묵상해 본다.
우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아들이 미쳤다.’ 라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핍박받고 있음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여인으로서의 마리아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모님은 아들 예수가 걱정도 되었지만,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방해가 될까 봐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형제들과 밖에 서서 예수님을 찾고 계셨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으신다는 말씀을 듣고 군중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35).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당신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이시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잘 실행한 여인이시다.
언젠가 미사 중에 “오늘 미사 중에 제 어머니가 함께 미사에 참례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니 신자들은 누가 본당 신부의 어머니일까 두리번거렸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미사에 오신 여러분이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오늘 미사에도 어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오늘 미사에 나오신 본당의 모든 어르신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나의 어머니이시다. 대만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교우가 쓴 편지의 내용처럼 나에게 맡겨진 어머니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더욱더 사랑하기로 다짐해 본다. 그리고 나 또한 하느님의 뜻을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며 ‘예수님의 형제’라고 불릴 수 있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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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최재원 펠릭스 신부님]
<성령을 거스르는 죄>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29)
다른 모든 죄는, 심지어 신성을 모독하는 경우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데,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으니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화시키고, 구원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일을 악이 저지르는 일로 생각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의 빛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 색안경을 끼워 구원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구원의 빛을 어둠으로 보게 만든다면 참으로 빛이신 분을 어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을 더러운 영으로 모독하는 이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이런 비뚤어진 죄악의 시선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성령마저도 악령으로 바라보았고,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일마저 마귀 우두머리의 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자신의 색안경을 다른 사람에게도 끼워주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색안경은 참된 용서를 거부하고 참된 주님을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열심 할수록 빛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악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그는 용서를 청할 수조차 없으며 영원히 자신의 죄에 매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색안경을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드러난 일로서, 열매로서 나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일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행위로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병자는 치유받고, 마귀 들린 이는 구마되고, 죄인은 참회하며 돌아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내시는 열매들은 그분이 참된 주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생각이나 말만이 아니라,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행위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참된 하느님 자녀임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매(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갈라 5,22-23)가 맺어진다면 나는 주님의 형제, 자매, 가족입니다. 우리는 이 열매를 잘 맺고 있는가 주의 깊게 살피며 주님의 길 안에 머물도록 노력하고 매번 사랑의 삶을 살아 이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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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생로병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지요. 인간이라면 이 네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뜻밖의 사건으로 ‘늙음’을 겪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모두를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生)’에 대해서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물론 이 역시 자기의 기쁨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쁨입니다), ‘로병사(老病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하려는 우리입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그 순간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본당에서 봉성체하며 만났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봉성체 갈 때마다 이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너무 아파서 못 참겠는데 자녀들이 병원에도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자녀들이 수시로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그때마다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는 대답만 하셨습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미웠던 것입니다. 그 미움이 커져서 더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 나 혼자 이를 이겨내야 하니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혼자면 더 아픕니다. 나눠야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 외톨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가족들을 계속 욕하는데 과연 사랑으로 계속 받아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를 낮춰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춰야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하라 명령하신 것은 우리 고통을 조금이나마 낮춰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또 율법학자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그들 모두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려는 마음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독한 죄는 모두 하느님께 대항하는 행위이기에 무거운 죄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한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할까요?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즉, 성령을 모독한 죄는 회개하지 않는 죄,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함께하려고도 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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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유혹을 받아 봐야 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를 통해서 거듭 태어날 기회를 챙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 초기에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일행 주변에는 항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들 수조차 없다는 없다는 소문이 있었고 심지어 “미쳤다‘는 소문까지 떠돌았기에 친지들은 사람들이 수군덕거리는 것이 듣기에 거북해서 붙잡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곱지 않게 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3,21) 혹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30)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비딱한 시선은 당시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누려 왔던 율법적, 영적 권위가 약화 되는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 헛소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모습이 드러나듯이 험담은 험담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 놉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행위,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마음이 비뚤어져 하느님께 속한 자비와 사랑, 용서를 고의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벌은? 스스로 거부하여 자비와 용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두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혈연을 떠나 이미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이는 구원 활동과 가르침을 배척하는 적대세력과 구별하여 은총을 누리기 위해 모여든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말씀입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뒤로 밀쳐질 처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섭섭한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군중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요, 누이요, 어머니의 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 가족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정복하는 것보다는 섬기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내어주는 사랑으로 가족애를 돈독히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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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희망하라, 공부하라, 회개하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참 자주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옛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물음이기도 했고, 이렇게 삶의 길을 찾고자 부단히 읽게 되는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 회고록입니다. 이 물음은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미사때 한 강론 제목이지만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묻는 질문이고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의식주만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찾는 사람이요 희망과 꿈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길없이는, 희망과 꿈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희망과 꿈을 잃어 혼란이요 죄도 병도 많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우리에게는 주님의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삶의 좌표가 되어주는 무수한 성인들이 있고, 무엇보다 날마다 미사를 통해 주님은 친히 당신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고 희망과 꿈이 되어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 답을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품위있는 삶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첫째, “희망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말해 주님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희망이 다 희망이 아니라 궁극의 희망, 우리의 영원한 꿈과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희망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곳,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곧장 찾아오는 영육의 병이요 죄의 유혹이요 내적부패와 타락입니다.
신망애, 믿음, 희망, 사랑의 순서로 말하지만 맨먼저 와야 할 희망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방향을, 길을 가리키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희망이 있어야 기다림의 인내도 가능합니다. 사랑의 사도, 기쁨의 사도, 감사의 사도인 바오로요 이보다 희망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오늘 제가 제2독서에서 반갑게 찾아낸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놀랍게 펼쳐지는 내적변화의 현실이 우리에게는 샘솟는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아,우리 현대인의 비극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영적 시각을 잃었습니다. 세속주의, 물질지상중의, 현실지상주의가 만연한 세상이요 이에 중독된 세상입니다. 쉽고 편하고 빠른 것을 찰나적인 것들만 찾는 불나방들 같습니다.
삶의 깊이와 무게가 없어 삶도 날로 천박해 집니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나 많은 디지털, 인공지능의 문명입니다. 결코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더욱 심각히 묻고 답을 찾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우리의 희망을 북돋웁니다.
“우리의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삶도 바로 여기 희망의 샘, 주님으로부터 기인됨을 봅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주님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의 지식공부가 아니라, 평생 주님의 학생이 되어 평생 주님을 배워 닮아가는 공부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이, 역시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우리의 주님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공부가 짧아, 무지로 인해 만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 하니 저절로 실소가 나옵니다. 무지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니 이들 역시 주님 공부가 한없이 부족한 무지에 눈먼 자들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무지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다음 말씀 역시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성령의 역사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주님을 모시고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평생 배움의 여정에, 겸손과 경청, 순종과 섬김의 자세는 필수입니다.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가 참된 공부이며 이런 공부에 충실한 자가 진짜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 이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셋째, “회개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주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된 회개가, 영적혁명같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회개하면서 하느님 방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회개의 사랑, 회개의 용기, 회개의 진실, 회개의 정직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바로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서두부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주님의 물음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창세기에서 나무열매를 먹은 사람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는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대답합니다. 이때라도 회개할 때인데 그는 이걸 놓쳤습니다. 죄를 지으니 두려움이, 부끄러움이 어둠처럼 그 마음에 스며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 두려움없이 살았던 사람인데 죄로 말미암아 숨게 된 사람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도록 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제대로 다하는 회개의 삶에 충실할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어지는 결과가 이를 보여줍니다. 이들의 죄를 추궁했을 때 회개는커녕 책임 전가에 바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기에 먹었습니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 저 여자와 저 여자를 아내로 주신 하느님 당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뱀에게 죄를 전가하는 무책임한 여자입니다.
죄의 결과는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가 파괴되었고, 이어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어 힘껏 노력해야 살 수 있는 험하고 거친 땅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관계의 회복에, 복원에 진정한 회개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다시피 죄의 도미노 현상처럼 세상에 만연되기 시작한 죄입니다. 누군가는 지금 지옥은 텅 비어 있다 말합니다. 모든 악마들이 지옥에서 나와 세상 곳곳에서 활개치며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회개가 필요한 때입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선택이요 회개의 실천 훈련에 회개의 습관화가 절박합니다.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균형을 갖춘 일과표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비록 수도원같은 일과표는 아니더라도 회개의 일상화를 위해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기도시간은 동시에 회개시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물으실 때, “예, 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언제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주님을 희망하십시오!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꿈을 두는 것입니다.
2.주님을 공부하십시오!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입니다.
3.주님께 회개하십시오!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회개의 선택, 회개의 훈련, 회개의 습관화, 일상화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참가족, 한가족입니다.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입니다. 더불어의 삶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는 말마디이기도 하며 어제 교황님이 사제들에게 한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많은 사제들이 ‘소속감’(sense of belonging)으로 대변되는 ‘생명선’(lifeline)을 잃고 있음을 주목하자! 사제들은 ‘편안히(at home)' 느끼는 것이 본질적이다."
사제들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보금자리 공동체의 울타리가 사라져 소속감의 생명선이 사라질 때, 방황이요 혼란이요 사람은 살아남기 힘듭니다. 날마다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 사랑의 한가족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편안히(at home)' 더불어 머물며, 주님을 희망하며, 주님을 공부하며, 주님께 회개하며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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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급선무>
오늘 연중 제10주일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누구와 싸울 것인가?’, ‘무엇과 싸울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정작 싸워야 할 것과는 싸우지 않고 괜히 엉뚱한 것을 붙잡고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과의 두려운 만남을 앞두고 형과 싸우기보다 하느님과 씨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소소한 잘못을 놓고 싸우곤 하지요.
우리 인생은 남의 잘못이나 갖고 싸울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먼저 내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급선무(急先務). 급선무란 급하고 앞서는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우리는 급선무 식별과 급선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발이 썩어들어가고 있으면 그것부터 고치는 일이 급선무이지 그 발로 산티아고 걷는 꿈이나 꾸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남의 눈의 티나 빼주겠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엉뚱한 짓을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급선무를 놔두고 한가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지난 수요일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비겁함의 영 때문이고, 자신의 죄와 악과 직면한다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 강론을 요약해 옮기면 이렇습니다.
비겁(卑怯)이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비란 비천이나 노비라고 할 때의 ‘천함’과 ‘천민’의 뜻이고 겁이란 ‘겁나다/두려워하다’, ‘약하다’, ‘피하다’는 뜻으로서 비천하고 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겁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감기조차 두려워하듯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악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죄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하는데 그 피하는 방법 곧 회피의 방법이 다양합니다.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정입니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이 두려워 일단은 자기는 그런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경우, 그런 자신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것인데 오늘 독서에서 보듯 아담과 하와가 한 짓이 바로 이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이런 존재였다면 제2의 하와는 그 반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주님은 악령이 들린 분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고 악령과 맞서 싸우신 분이시지요.
그리고 마리아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의 정배요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지요.
이런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성령의 정배가 되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고 초대하시고, 새로운 하와가 되어 안과 밖의 악령과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와 싸우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래서 나와 싸우지 않고 남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싸우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어 남과 싸운다면 쩨쩨하게 나와 마찬가지로 약한 인간을 악하다고 하며 싸우지 말고 야곱처럼 하느님과 싸우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악령과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영적으로 제일 강한 것입니다. 자기 안의 육의 정신과 싸우는 것이 제일 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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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참 신앙공동체 만들자!>
오늘 복음(마르3,20-35)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주된 활동은 세 분야입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드러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엾은 군중이 예수님께 모여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그분을 붙잡으러 옵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두고,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성령을 모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메이게 된다."(마르3,23ㄴ.28-29)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냐?"(마르3,33)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4-35)
생각과 말과 행위로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은 지연, 혈연, 학연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것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참 신앙공동체'로 나아가지 못하고, 또 하나의 '친목공동체' 안에 머물게 됩니다.
참되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함으로써,
아름다운 참 신앙공동체를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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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tu0RkzRJ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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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르 3, 34)
우리는 어떤
어머니이고
어떤
형제들입니까.
가족의 닫힌
마음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큰 사랑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슴으로
가족들을 뜨겁게
보듬어 주십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이 느낌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가족이
되어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건강한 가족의
시작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갈등을 치유하고
아픔을 위로합니다.
가족을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족
구성원들입니다.
실행으로
이어진 가족은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압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피붙이도
예수님과
함께할 때
더 소중한
관계가 됩니다.
가족을 잊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뜻을 실행하는
참된 사랑에서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만납니다.
우리들 또한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전달하는
예수님의
가족이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을 나누는
뜻 깊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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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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