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 - ③ 동일성의 사유를 넘어
교수신문/ 길에서 펼쳐진 비평의 성좌 … 사유는 어떻게 단련됐나
③ 동일성의 사유를 넘어 성좌의 사유로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이 인간에게 도래한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다가 마침내 아도르노는 그 주범을 찾아냅니다. 그는 보편자나 개념을 통해 모든 개별적인 것들 혹은 비개념적인 것들을 지배하려는 인간 이성의 본성을 바로 그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부정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일성(identity) 사유는 어떤 것이 무엇에 속하며 그것은 또한 무엇을 대표하는 본보기인지를, 즉 그것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이지요.
예를 들어 동일성 사유라는 것은 “아도르노는 남자다” 혹은 “최명란 시인은 여자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남자라는 개념에 강하고 외향적이라는 이미지가, 반대로 여자라는 개념에는 약하고 내성적이라는 이미지가 깔려 있지요. 그렇지만 과연 아도르노는 강하고 외향적일까요? 혹은 최명란 시인은 약하고 내성적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도르노는 집에서 꽃을 키우는 일을 행복으로 여길 수 있고, 최명란은 철인 3종 경기를 할 때 삶의 희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성 사유에 따르는 사람은 아도르노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최명란은 여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권력자라면 아도르노에게 꽃을 키우지 못하게 할 것이고, 반대로 최명란에게 집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강요하겠지요. 바로 이것이 아우슈비츠를 낳은 전체주의의 내적인 논리입니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그렇게 집요하게 동일성 사유를 비관했던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사회 역시 동일성의 사유가 완전히 지배하는 사회로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요? 직접 획인해 보도록 하지요.
동일시의 원칙은 교환이라는 사회적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또 동일시의 원칙 없이는 교환도 있을 수 없다. 교환을 통해서 비동일적 개별 존재나 업적들이 통분될 수 있고 동일해진다. 이러한 원칙이 확장되면 전 세계가 동일자로, 총체성으로 된다.
―《부정변증법》
아도르노, 들뢰즈, 강신주라는 세 남자가 공원 벤치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고 해 보지요. 짐을 부리던 아주머니 한 분이 “저, 여기 남자 한 분만 와서 도와주세요” 하고 요청합니다. 이 상황에서 아도르노가 가도 되고, 들뢰즈가 가도 되고, 물론 강신주가 가도 됩니다. 이럴 때 아도르노, 들뢰즈, 그리고 강신주는 서로 ‘교환’ 가능한 존재로 간주됩니다. 물론 이것은 남자라는 개념에 이 세 사람이 모두 속해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자본주의가 얼마나 확고하게 동일시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나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별 존재들을 거의 대부분 돈으로 환산해 버리는 체계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니까 말이지요. 자본주의하에서 모든 개별 존재들은 일종의 상품으로 변질되고 말지요. 인간 역시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 일정한 액수의 임금을 받고 자신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팔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제 아도르노가 하고자 했던 일이 분명해집니다. 그는 보편자 또는 개념에 의해 억압된 개별자 혹은 비개념적인 것들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동일성의 사유를 넘어서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유해야 우리는 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정변증법》의 진정한 위대함은 아도르노가 이런 의문에 진지하게 답한다는 데 있습니다.
대상이 처해 있는 성좌(constellation) 속에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자체 내에 저장하고 있는 과정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론적 사상은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개념의 주위를 맴돈다. 마치 잘 보관된 금고의 자물쇠들처럼 그 개념이 열리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때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부정변증법》
여기에는 ‘성좌’, 즉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이라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스텔라(stella)’는 별을, 그리고 ‘콘(con)’이라는 말은 ‘함께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콘스텔레이션은 별들이 모여 있는 것, 즉 성좌(星座)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별의 위치는 다른 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지요. 그래서 A라는 별은 B라는 별과의 관계에선 동쪽에 있다고 확인되고, C라는 별과의 관계에선 서쪽에 있다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 “A라는 별은 동쪽에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가 이 별을 결국 B라는 별과 함께 동시에 보고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좌에 입각한 사유란 바로 이런 겁니다. 동일성의 사유와는 확연히 다르지요. 동일성의 사유라면 A, B, C는 모두 별이라는 보편자에 속한다고 사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테니까 말이지요.
지금 아도르노는 우리에게 개념의 성좌라는 이미지를 통해 사유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아도르노가 강조한 개념은 동일성 사유에서 말한 개별자를 포섭하고 억압하던 개념은 아니니까요. 아도르노의 개념은 구체적인 개별자와 관련된 생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개별자에 대한 생각, 예를 들면 ‘동쪽에 있는 A라는 별’과 같은 생각이 아도르노의 개념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동쪽에 있는 A라는 별’이 그냥 단순히 별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도르노는 ‘동쪽에 있는 A라는 별’을 의미 있게 하는 다른 개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열 자리의 번호로 구성된 열쇠를 여는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이 경우 열려고 하는 열쇠는 결국 ‘동쪽에 있는 A라는 별’이겠지요. 이 경우 이 개념은 오직 B라는 별을 함께 확인할 때에만 열릴 수 있을 겁니다. 결국 B라는 별은 A라는 별의 열쇠가 열리도록 하는 적절한 비밀번호였을 겁니다.
《부정변증법》이라는 책을 통해 아도르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 동일성 사유에 있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더욱 중요한 가치는 그가 동일성 사유의 대안으로 성좌에 입각한 사유를 제안한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사실 아도르노의 주저가 《부정변증법》이라기 보다 오히려 1951년에 출간된 《최소의 도덕―상처받은 삶에 대한 성찰(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ädigten Leben)》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이 책은 《한 줌의 도덕》이나 《미니마 모랄리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이 책에는 바로 성좌에 입각한 사유, 그러니까 개별자들을 억압하지 않은 아도르노 특유의 성좌의 사유가 시처럼 매력적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이 책이야말로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말하려고 했던 핵심을 간결하게 잘 정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시인들은 시를 통해, 개별자를 보편자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 또는 개념에 의해 억압된 개별자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상처받기 쉬운 작은 것들, 그러나 스스로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시이니까요. 아도르노는 성좌에 입각한 사유를 통해서 철학을 시와 유사한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하면서 아도르노가 의도했던 것, 그리고 “이 지상엔 사람이 없다. 하늘엔 해도 없다 달도 없다. 모든 신앙도 장난이다”라고 말하면서 최명란이 호소했던 것도 이제 좀 이해가 갑니다. 두 사람 모두 스스로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의 억압을, 그리고 그것들의 절망을 이야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철학자와 시인의 절망이란 진정한 절망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절망은 침묵할 때 진정한 절망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절망을 시로 혹은 철학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오히려 희망의 계기로 반전되는 법입니다. 마치 냉정한 진단만이 고질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강신주, 도서출판 동녘,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