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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풀잎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이풀잎
4342(2009)년 7월22일 오후3시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선 난리법석을 떨면서 딴나라당 구케으원들, 기어히 '언론악법'을 날치기로 통과했다고 우기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무효였다. "초등학교 반장선거"만도 못한 세계적인 웃음껄이 짓거리를 '고소영당 패거리'가 저지른 거다. 이 장면들은 거의 모두 기록되었고, 찍혔고, 방송카메라에 촤령됐지만, 웬일인지 아직도 모르는 백성이 있구먼 허허 허-
* 조그만한 내 꿈 하나 /윤구병 지음 /보리 1995.7.15
<어느 바보의 죽음> 제가 무척 감동을 받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에 농부 한 분이 살았는데 너무 성실하고 총명하였습니다. 이 분은 1920년대에 야학에서 한글을 깨우쳤습니다. 해방이 되기까지 스무 해 남짓 걸핏하면 주재소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행적으로 보면, 한글과 함께 민족의식도 깨우쳤던 모양입니다. 어떤 때는 하도 많이 맞아서 지게에 실려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똥물을 마시면서 몸을 추슬렀는데 동네 사람들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닮아서 법 없이도 살 이분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어쩌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왜놈말을 쓰는 걸 보면 몹씨 야단을 친다든지, '대동아 전쟁' 말기 왜놈들이 쇠붙이란 쇠붙이는, 하다못해 부러진 숟가락 몽둥이까지 빼앗아 갈 즈음에 제사에 쓰던 유기 그릇들을 땅에 묻어놓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놈들이 유기 그릇 가져다 어디다 쓰는 줄 아세요? 독립군들 죽이는 총알 만드는 데 쓴답니다."하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미상불 '왜놈'들이 '불령선인'으로 몰아 닦달을했음직하다는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고나자 이분은 갑짜기 바빠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분이 똑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유식하고 지도력이 탁월한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 농민조합, 소작쟁의.... 매사에 뛰어난 일꾼이었습니다. 꼼꼼하면서도 너그러원서 인근에 이분을 믿고 다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고 '빨갱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분은 '빨갱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부역했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모질지 못해서 '우익 반동'을 처단하는 데는 늘 뒷전이었습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온 나라에서 좌익이 밀 때는 우익 인사들 '줄초상'이 나고 우익이 밀 때는 좌익 인사들이 '떼죽음'이 나는 소동이 벌어질 때도 이분이 사는 곳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드잡이질이 거의 없었습니다. '인공'이 끝나고 '수복'이 되자 전국 각지에서 '빨갱이 소탕'이 벌어졌습니다. 그 동안 행적으로 보아 이분도 '죽은 목숨' 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모질게 닥달을 당하고 꽤 여러 해 징역을 살았지만 아무튼 겉으로 보기에는 몸 성히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이분 덕에 목숨을 건진 우익 인사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손을 써서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들은 이분이 바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에 빛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숫제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었습니다. "쯧쯧, 그 똑똑하던 사람이 줄창 똥물을 마셔대더니 저렇게 얼간이가 되어 버렸어.." 처음에는 이렇게 동정을 하던 사람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이분을 깔보고 천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 초상이 나면 이분이 염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썩은 시체를 만지던 손을 씻지도 않고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찌거기를 맨손으로 집어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동네 궂은 일은 모두 도맡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꾸역구역 하는 이분을 처음에는 고맙게 여겨 공치사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란게 참 묘해서 고마운 일을 해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으면 고마운 줄을 모르는 법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분이 아무리 자기들을 도와주어도 '바보 저 좋아서 하는 짓'이려니 여겨 나중에는 종놈 부리듯이 부리면서 유세까지 부렸습니다. 황토물이 뻘겋게 밴 고의적삼 차림에 검정 고무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가끔 동네 꼬마들을 만나 히죽 웃을 때를 빼면 열릴 줄 모르는 입, 욕을 해도 흉을 보아도, 손가락질을 해도 바뀌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얼굴 표정, 이 모든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바보의 상징이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두 자국이었습니다. 바보 지아비와 아버지를 둔 아내와 자식들이 겪는 수모와 멸시도 엄청났습니다. 이분은 일흔 살 되던 해 봄에 죽었습니다. 죽기 얼마 전에 마치 자기가 언제 죽을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맏아들에게는 가위로 머리와 수염을 손질해 달라고 부탁하고 아내에게는 깨끗이 빨아 놓은 옷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역죄로 감옥에 갔다가 나온 뒤로는 명절날도 새 옷을 찾지 않았던 남편이 생뚠스럽게 새 옷을 찾은 것입니다. 임종이 가까워서 이분이 자식들에게 남겼다는 말을 간단히 적습니다. "그 동안 못난 아비 지켜보느라 마음 고생 많았을 것이다. 반동의 시대에 인민에게 봉사하려는 사람은 가끔 똥물도 먹어야 하고, 가끔 멍청이도 되어야 하는 법이다." 207-209쪽
내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1997년9월이다. 동국대 한의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전공으로 경혈학을 택했다. 경혈학을 택한 이유는 내 은사이신 '김봉한 박사의 학문적 성과와 업적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봉한학설은 동양의학 전통에서 말로만 전해 오던 경락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기념비적인 이론이다. 물론 과거에나 지금이나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경락연구소에서 일했던 김박사와 우리 연구진들은 생체실험을 통해 경락내에 존재하는 물질, 즉 "봉한소체와 산알'을 추출하는 등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봉한학설을 철석 같이 믿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봉한학설은 경락 내에 존재하는 조직 순환체계를 이론화한 것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경락 내에 봉한관이 있으며 봉한관 내에서 '산알이라는 생명체가 만들어져 이것이 자가 증식을 통해 세포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봉한학설이 새로운 학설과 이론으로 검증되고 인정되면 양의학이든 한의학이든 상관없이 세계 의학계가 발칵 뒤집히게 되어 있다. 산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인체의 노화 방지는 물론이고 생명 연장까지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의학은 말할 것도 없고, 오래 전에 이를 입증한 바 있는 북에서조차 정치적인 이유로 김 박사를 사장시킨 후에는 이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봉한학설을 재현하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곳에서는 변변한 면허증도 없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을 바쳐 의학을 공부한 의사임을 자부하는 나로서는 생명의 기초를 밝히는 봉한학설을 이대로 썩히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물론 북에서야 공식적으로 사장되었다고 해도 봉한학설의 성과까지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에 동의학을 통해 어느 정도는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빛을 이용한 치료'이다. 빛 치료란 산알이 빛에 의해 증식되는 특성을 활용한 것으로, 병을 치료할 때 아시혈에 침을 찔러 산알이 나오게 한 후 빛을 쪼이면 산알이 증식해서 세포로 성장한다는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북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도의 응용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북에서는 이를 공식적인 봉한학설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고 있기에 나로서는 더욱 안타깝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봉한학설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를 지도하는 임종국교수도 처음에는 봉한학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지금은 태도를 바꾸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임 교수가 이끄는 '경락, 경혈학회' 회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부의 지원비를 받아 실험과 연구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내가 봉한학설의 재현에 매달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자연요법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요법의 핵심은 우리 산천에 나는 식물의 생명력과 면역력을 인간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나는 다세포 식물에도 '산알'이 존재한다고 본다. 북한장수연구소에서 백 가지 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때도 이런 관점에서 시작했으며,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따라서 봉한학설을 연구하고 진척시키는 작업과 자연요법을 확대하고 대중화하는 것과는 무관하지 않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한 것이 남한에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봉한학설의 진정한 후계자로 거듭나기 위한 정진은 남은 내 생을 좀더 풍부하게 만들어 가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내가 그 일깜에서 훌륭한 성과를 얻고 만족할 수 있기를 나는 밤마다 기도한다. 299-301쪽
어린이들에게 비타민D가 부족하면 구루병이 생기고 어른에게는 뼈연화증 또는 골다공증이 생긴다. 오징어뼈 - 부드럽게 가루내어 한번에 3-4g씩 하루 3번 먹는다. 오징어뼈에는 탄산캉슘이 80-85%이고 적은 양의 인산칼슘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무기질과 유기질이 있다. 굴조개 껍질 - 불에 달구어 부드럽게 가루내어 한번에 4g씩 하루 4-5번 먹는다. 굴조개 껍질에는 많은 양의 탄산칼슘과 인산칼슘이 들어 있으며 비타민D도 있다.
비타민PP(니코틴산)이 모자라서 생긴 병으로 비티민B군의 부족도 펠라그마가 생기는 것을 돕는다. 피부증상과 설사가 기본이다. 햇볕을 받는 드러난 피부 즉 손등, 발등, 목, 얼굴의 피부가 대칭적으로 거칠어 지면서 검게 되며 가렵고 아프다. 이런 증세가 봄철에 더 심해지며 해마다 거듭 된다 또한 입 안이 헐며 입맛이 떨어지고 소화가 안 되며 설사가 멎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고 쉽게 피로하며 우울해진다 기억력, 사고력이 나뻐지는 것과 같은 신경계통의 증상도 나타난다. 다시마 - 깨끗이 손질한 것 300g을 물 1l에 1시간 동안 담가두었다가 그 물에 갈아서 10분 정도 끓인 다음 설탕을 400g정도 넣고 계속 끓이면서 식물성 기름 4ml, 우무 5g을 넣고 2-3분 더 끓인다. 여기에 안식향산 나트륨 1g을 넣어 쟁반에 펴놓아 식히면 묵이 되는데 이것을 한번에 30g씩 하루 3번 식전에 먹는다.(임상자료 참조) 간유 - 한번에 30-40g씩 하루 3번 먹는다. (임상자료) 비타밈PP 결핍증 환자를 위의 방법으로 치료한 결과 일주일 사이에 피부소견이 없어지고 2주일 지나 입 안이 허는 증상이 나았고 30-40일 지나선 소화가 잘 되고 입맛이 좋아지면서 설사가 멎고, 두통을 비롯한 신경증상도 없어졌다. 대상 환자 가운데 15일 안에서 0.8%, 16-30일 안에는 44%, 31-45일 안에는 22%가 완전히 나았고 나머지 환자들은 완전히 낫지는 못했어도 일정한 정도로 효과를 보았다. 545-547쪽
하지만 처음에는 티격태격 싸우던 남녀가 종국엔 사랑에 빠지고 마는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따르듯, 나도 그만 이 책의 저자 딜라드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일상의 일들을 전투 치르듯 해치우면서 어떻게 하면 나도 성공한 '그들'처럼 '시간을 입체적으로 디자인하는 비법'을 터득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던 나에게 딜라드의 이 책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이 책은 빨라지는 삶의 속도에 비례해서 좁아져만 가던 내 마음과 의식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로부터 저 광대한 우주의 세계까지 담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딜라드의 글은 발전 이데올로기에 빠져 늘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 물론 딜라드는 자연을 그저 이상화하거나 낭만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자연 속에 가장 요란하게 들?는 소리는 먹잇감을 우적우적 씹는 소리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재빠르게 달아나는 소리이다. 살아있는 존재치고 물어뜯기지 않는 것이 없다. 나무의 단 한 잎도 온전한 것이 없고, 대부분의 생물들은 기생물들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자연은 폭력성과 상처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비롯하여 수많은 존재들이 살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온전하고 새로워진다는 점에서 경이롭다고 딜라드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관찰되는 상처와 부패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진 짙푸른 얼룩 중 하나이며, 존재 중 물어뜯기는 부분은 존재하기 위해 바쳐야 하는 십일조 같은 것이 된다. 이 세계가 모든 것이 들어맞는 빛나는 세계가 아니라 하드라도, 인간이 아름답고 깨끗한 존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존재들이 피 흘리며 상처를 입고 있으며 나무가 벌레에 갉아먹히고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피조물들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애니 달라드는 말한다. 달라드의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느낀 점은 지혜와 영감이 나이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물아홉이라는 젊고 푸른 나이가 전하는 삶의 깊은 통찰을, 독자들도 함떼 나누길 바란다. 457-458쪽
에고는 정신이상이다. 두려움 안에서 에고는 모든 곳everywhere 너머에 있으며, 모든 것All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무한Infinity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자신의 광기狂氣 안에서 자기가 신을 이긴 승리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끔찍한 자치권 안에서 신의 뜻이 파괴되었다고 "본다" 에고는 벌罰을 꿈꾸며, 자신의 꿈 안에 등장하는 형상들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전에 그를 찾아 죽이려 드는 적들- 을 보고 두려움에 떤다. 신의 아들에게 몸나(에고)는 없다. 신 안에 살고 있는데 어찌 광기나 신의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영원한 기쁨 안에 살고 있는데, 어찌 슬픔이나 고통을 알 수 있겠는가? 영원히 갈등이란 없고 평온하며 아주 깊은 침묵과 고요함 속에 있는 영속적인 평화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거늘, 어찌 두려움이나 벌, 죄나 죄책감 그리고 증오나 공격을 알 수 있겠는가? 실재實在를 안다는 것은 몸나, 에고의 생각과 일과 행위와 법 그리고 에고의 믿음과 꿈과 희망, 에고의 구원 계획 그리고 그것을 믿는 댓가 등을 일체 보지 않는 것이다. 고통 안에서 에고를 받드는 댓가는 너무도 커서, 에고의 어두운 사당에서는 매일 신의 아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병적인 에고의 추종자들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제단 앞에는 선혈이 흘러야만 한다. 그러나 용서의 백합 한 송이만으로도 어둠을 빛으로, 환상의 제단을 생명을 위한 전당으로 바꿀 것이다. 그리고 신이 자신의 아들로, 자신의 거처로, 자신의 기쁨으로, 자신의 사랑이며 완전히 자신의 것이요 완전히 자신과 하나로 창조한 거룩한 마음은 영원한 평화를 회복할 것이다. 258 - 259쪽
<영혼은 죽지 않는다> - 그러면 몸나肉身와 함께 살아있는 사람이 어떻게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유는 땅地 표면 위에서 우주비행사의 중량과 밀도, 궤도 안에서의 중량과 밀도 차이일 것이다. 여기에 아주 명백한 증인이 있다. 한 우주비행사가 지구인력을 훌쩍 벗어난 일이 있는데, 그러자 어떤 가느다란 나이론 선 같은 은줄銀線을 따라 우주 캡슐에 도달하였고, 그러면서 대단히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저 밑에 보이는 지구와 자신이 완전히 분리된 야릇한 느낌과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주공간에 머물고 싶은 강한 욕망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나(육신)의 죽음으로 자유로워진 영혼과 몸나 속 영혼의 차이란 우주 공간에서 떠다니(부유하)는 우주비행사와 우주선의 제어장치에 묶여 있는 우주비행사 간의 차이와 거의 흡사한, 단지 밀도와 진동의 차이일 뿐이라고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비유를 일단 받아들인다면, 천지창조로 거슬러 올라가 맨 처음 자신을 인식하게 된 영혼들을 상상해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지구는 처음에 거대한 불덩어리로 탄생하여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아메바류에서부터 동물이 출현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영혼이라 불리는 것들이 지구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지구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중력과 밀도의 법칙이 적합했다는 것이다. 지구 위를 떠다니든 영혼들은 이러한 진화과정에 매혹되어 따르기 시작했고, 다시 동물이 암수로 나뉘게 되자 그들은 동물적 진화의 길을 벗어나 사람의 모습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아직 그들의 몸이 깨끗한 정신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를 우주비행사의 예로 설명하자면 '무중력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에드가 케이시는 이러한 발전 단계에서의 그러한 상태를 거론할 때 줄곧 '사고思考 형태thought - form'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의 사고형태란 문자 그대로 뜻하는 바와 같다. 즉, 하나의 형태는 응집된 사고로 형성되는 것이지만, 아직 지상에서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의식적 마음 외의 모든 심적 수준에서는 "사고란 곧 존재"이며 그러므로 일단 형성된 하나의 사고 형태는 그것을 만들어 낸 마음과 똑같이 실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런데 의식적 마음에게는 하나의 환영 혹은 환상으로밖에는 안보인다. 가령 LSD(귀리에 생기는 맥각麥角으로 만든 강력한 환각제)를 분별없이 사용하는 사람은 의식의 보호장치가 깨져서 그때 그때 떠오르는 사고 형태와 곧바로 접촉하게 된다. 이러한 극한 접촉이 유해한 것일 때, 그의 정신에 파괴적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하다. 유능한 최면술사가 최면상태에 들어간 피실험자에게 당신 손에 오렌지가 하나 있으니 먹으라고 암시를 주면, 피실험자는 어느 모로 보나 진짜 오렌지를 먹는 것과 같은 결과를 느낀다. 피실험자는 요컨대 사고가 곧 물질인 무의식 수준에서 그러한 '사고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에드가 케이시는 타락하지 않은 영혼은 자유의지로 보다 밀집된 물체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으며, '마치 아메바가 고여있는 물 속에서 자생하듯이' 스스로 변형하며 이미 형성된 조건에 적응해 나갈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창조주의 뜻은 영혼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때는 아직 영혼이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있지도 않았다. 그랬으므로 동물의 생식 수단이 영혼한테는 매우 부적합했던 것이다. 영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마치 소라게가 다른 종種의 빈 껍질을 이용하듯이, 동물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소라게의 경우에는 그 껍질이 이미 비어 있었다는 점만 다르다! 따라서 전혀 다른 형태의 생명체들이 하나의 신체를 공유할 수 있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는 영혼들은 동물의 보다 밀집된 진동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려 했다. 보다 현명하고 분별있는 영혼들은 망설였고,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그러자 육신의 감옥에 갇혀버리게 된 영혼들은 자신을 구할 길이 없음을 알아챘다. 물질계와는 영 맞지 않는 그들은 이가 안 맞는 톱니바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상처 입으며 계속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생식 과정에 말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구상에는 인간도 동물도 아닌, 즉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동물의 진화 법칙을 따를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기괴한 잡종이 생겨나게 되었다. 에드가 케이시는 말한다. "우리는 저 병형된 형태의 사람에 딸들을 찾는 창조적 힘의 아들들을 본다. 그들의 타락을 본다. 아들들은 따들과 결합함으로써 타락해 갔다. 그리하여 남의 자유를 무시한 채 치욕과 증오와 피를 불러왔고, 자기욕망만 채우려는 충동을 야기시켰다." 자유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던 영혼들도 그들을 구원할 수가 없었다. 자유로운 영혼들은 그저 당황하면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창조주는 완전한 사람을 만들어 '구원 될 영혼들'이 안전하게 사람으로 화신化身할 수 있도록 깨달은 이들을 보냈던 것이다. 129 - 131쪽
* 생활의 기술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박윤정 옮김 /황금나침판 2006.3.15
깨달음의 불꽃 - 힌순간이라도 마음이 아주 고요하면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차린적이 있는가? 생각을 통한 언어화 작용이 멈추었을 때 깨달음의 불꽃이 일어난다. 한번 실험해 보라 그러면 마음이 아주 고요할 때, 생각이 사라졌을 때, 마음이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소음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때, 순간적인 깨달음과 놀라울 정도로 빠른 통찰력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회화,아이, 아내,이웃, 이 모든 것 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마음이 아주 고요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고요는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요한 마음을 닦는다면, 그 마음은 이미 고요한 마음이 아니라 죽은 마음이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질수록, 그것을 이해하려는 의도가 강할수록, 마음은 더 단순하고 투명하며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장황하게 언어로 표현하는 일도 그만두게 된다. 생각은 곧 말이며, 바로 이 말이 우리를 방해한다. 말의 장막인 기억이 도전과 반응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로 도전에 반응하는 것을 우리는 지적인 작용이라고 부른다. 수다를 떠는 마음, 장황하게 말로 표현하는 마음으로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닌 관계 속에서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추상적인 진리란 것은 없다. 진리란 아주 미묘한 것이다.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 때, 밤도둑처럼 아주 은밀하게 다가오는 것이 진리다. 282쪽
만약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으면, 미지의 것을 알 수 없다. 우리 자신이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나는 신이야"라거나 "나는 사회적인 영향력의 덩어리 혹은 여러 특질들의 다발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즉 자신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미지의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미지의 것은 자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성은 지력으로 방어하지 않을 때, 지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을 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때만 주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내면으로부터 생겨난다. 다시 말해 자발적인 사람이 되려면, 새로운 존재, 미지의 존재, 헤아릴 수 없는 존재, 창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통제하고 지시하는 지적인 작용인 의지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서적인 상태를 잘 주시ㅣ하면, 커다란 기쁨과 환희는 계획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감정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신비롭고 비밀스럽게 생겨난다. 283쪽
하늘나라가 - '하늘나라' 혹은 '천국天國'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신국神國'과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 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메르어나 셈족 언어에서 '하늘'과 '하느님'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3절 풀이에서 자세히 밝혔기에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이 '나라'라는 것이 땅덩어리를 의미하기보다 하느님의 주권, 다스리심, 임재臨在, 등을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 또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때, 그것이 지금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문자적의미에 따라 이해하는 것처럼 하늘 어디에 있고,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으로 임할 곳 등 '장소'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왔다 -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을 때 그것을 시간 개념으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을 두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그분 생전에 곧 임할 임박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이중적인 뜻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이런 식으로 '언제'의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을 시간의 개념보다는 '거리' '공간' '어디'의 개념으로 보고 싶습니다. 영어로 'at hand'라는 번역이 더 실감납니다. 즉 "손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어느 때쯤에 올것인가 하는 문제로 보기보다 공간적으로 바로 내 손 닿는 지근至近고리에 있다는 것은 결국 내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도마복음>에서 계속 강조하는 '내 안의 하느님 나라' '내 안의 신성' '내 안의 참나'라는 기본 가르침과 어떻게 다를 수 있겠습니까? <도마복음>으로 공관복음에 나오는 '내 안의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이 더욱 분명해지고 뚜렷해졌다고 볼 수는 있을지언정,<도마복음>이 공관복음의 가르침을 무조건 무효화시키거나 경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430 - 432쪽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발견하면 그는 고통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의 속뜻을 풀어낼 수 있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 금세기의 가장 예리하고 지성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아주 깊이 있는 책을 한 권 썼다. 그 제목은 "성聖의 개념The Idea of Holy"이다. 그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하나는 '무서움tremendum'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mysterium'이다. 그대가 이 고통의 지점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그토록 무서운 현상이 된다. 그것이 '무서움'이다 그대는 그 안에서 정신을 잃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마음이 기능을 못하는 것처럼 그냥 미쳐버리게 된다. 이곳이 바로, 마음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다. 이제 마음은 떨어져나가야만 한다. '무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지진, 내적인 지진이다. 화산이 폭발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부서져내리고 산산조각 남다. 그대가 만일 이러한 '무서움'을 통과한다면, 그 다음에는 '신비'가 일어난다. '신비'란 무었인가? 그 신비는 어떤 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신비는 지복이며, 아름답고 황홀하다. 그러나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이다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다.그것을 넘어서 갈 수는 없다. 거기에 초월은 없다. 그대는 그것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분석할 수는 없고, 그것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지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것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이론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비'이다. 궁극의 신비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의 속뜻을 풀어내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 존재의 최종적인 신비를 맛본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오직 마음 때문에 존재함다 죽음은 오직 몸나(에고) 때문에 존재한다. 죽은 오직 그대가 육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존재한다. 만일 그대 안에 그 미치광이 몸나ego에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대의 존재 안에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죽음은 사라진다 죽음은 그대가 거짓되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다. 623-624쪽
서로의 연으로 사립문 소리에 완전 세상에는
자랑스런 민주시민은 '10월재보궐선거 지역'에 "용산학살 현장"과 "날치기 언론악법 본디무효"를 철저히 알려줘야 합니다 !
얼이 말이구 말이 글이 됐다네 그리하여 얼말글 속에 깨우침이 http://cafe.daum.net/nicebook 말없이 옮겨선 안돼는 글..? 좋은책나눔에서 이풀잎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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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풀잎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이풀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