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은 퉁구스 계통의 말갈족에서 분화된 민족으로 함경도, 중국의 만주 일대, 러시아의 연해주 일
대 등지에 폭 넓게 분포해 있다. 말갈족은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고구려나 당나라 같은 강국에
서 변방의 종족을 가벼이 여겨 부르던 명칭이었다. 말갈족은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 주류 종족 가운데
하나로 국정에 동참했으며, 발해가 멸망한 뒤부터 원래의 이름인 여진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숙신‧
읍루‧물길 등도 다른 종족이 여진족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여진족은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울 때도 동참하여 주축을 이루었으며, 발해가 멸망한 926년부터
스스로 금나라를 세워 발해의 잔존세력을 통합한 1116년까지 190년 동안 줄기차게 발해의 부흥운동
을 주도해왔다. 그 사이 여진족이 수립한 정안국‧오사성발해국‧흥료국‧·대발해국 등이 명멸했다. 금
나라의 정사인 『金史』 제1권에 의하면,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조상은 신라계 고려인 김함보였
다. 아골타는 7대조인 김함보의 성을 따서 국호를 金으로 지었다. 금나라는 1115년부터 몽골족에게
멸망한 1234년까지 9대 119년 동안 존속했다.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뒤 원나라를 북으로 몰아내고 중국대륙을 장악하자 요동지역에 거주
하던 여진족은 명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여진족은 평안도 북부 일부와 함경도 일부에도 흩어
져 살았는데, 고려의 공민왕이 원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동북9성을 영토로 편입한 뒤부터 고려와 여
진족 사이에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 여진족은 1391년에 점령한
함경도 만포진과 갑산에서 정주하고 있었다. 국내의 혼란이 가라앉자 태종은 함경도 주민을 만포진
과 대거 갑산으로 이주시켜 여진족을 견제했다.
세종 14년(1432) 10월, 건주위 여진족 기병 400여 명이 갑산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한동안 잠잠하던 국경지대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명나라는 국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 일대에서 여진족의 자치를 눈감아주고 있었다. 추장 이만주가 이끄는 건주위 여진
족은 만주의 송화강 일대와 함경도 회령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일찍 뿌리를 뽑지 않으면 명나라에
밀린 여진족이 결국은 조선을 침공할 것이 뻔했다.
재위 15년 4월 10일, 세종은 최윤덕을 도통사에 제수하여 1만 5천 장졸로 여진족을 압록강과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도록 명했다. 도통사 최윤덕을 필두로 각 장수들은 병력을 나누어 분담된 여진족의 영
채로 진군했다. 각중에 조선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여진족은 뿔뿔이 달아나거나 항복했다. 토벌군은
저항하는 여진족 170명을 베고 236명을 포로로 잡았다. 조선군 전사자는 4명이었다. 이만주를 비롯
한 추장들은 낌새를 채고 도주한 터라 사로잡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진족이 월강하여 노략질을 일삼자 세종은 1433년 12월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에 제수하
여 여진족의 침략을 근절시키라고 명했다. 김종서는 6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두만강의 요충지
에 성곽을 축조하는 한편, 후방의 민가 2200호를 뽑아 새로 개척할 강변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영북
진절제사 이징옥은 여진족을 씨도 남기지 말고 섬멸하자고 주장했지만 김종서는 공존을 도모했다.
김종서는 두만강변에 6진을 설치하여 북변을 튼튼히 해두었다. 1445년 세종은 김종서를 예조판서에
제수하여 12년 만에 내직으로 불러들였다.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수양대군이 보위를 찬탈했을 때, 여진족은 즉위식에 경하사절단을 보내 공
물을 바칠 정도로 조선과 친숙한 관계를 원했다. 다만 옹졸한 명나라가 조선과 여진의 교류를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명나라의 학정에 분개한 여진족은 1466년 11월 요동에서 항전을
벌여 명나라 군사를 요동 밖으로 몰아냈다. 1467년 8월 명나라는 조선에 여진을 치라고 명했다. 도통
사 강순은 9월 26일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가 건주위 여진을 단숨에 제압하고 돌아왔다.
조선군은 건주위 여진의 두목 이만주와 그의 아들 10여 명을 참수했다.
이만주 사후에도 건주위 여진은 여전히 강대하여 성종 10년(1479) 명나라는 다시 여진과 일전을 벌
이면서 조선에 출병을 명했다. 성종은 도통사 어유소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여진을 치도록 했다. 그러
나 여진 토벌에 반대하는 어유소는 압록강 남쪽 만포진까지 갔다가 강이 상굿도 얼지 않았고 대부분
의 병사들이 동상에 걸렸다는 이유로 철군한 뒤 해산시켜버렸다. 성종은 어유소를 유배한 뒤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기병 3천을 이끌고 출병하도록 명했다. 윤필상은 건주위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여진족을 베고 개선했다.
강순과 윤필상이 무인지경으로 건주위를 휩쓸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여진의 주력부대가 요
동으로 출격하여 명나라와 싸우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여진은 조선에 대해 적개심이 없었다. 한때 고
구려의 주축을 이루었던 여진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나 고려를 계승한 조선을 같은 핏줄로 인식하
고 있었다. 여진이 북방을 어지럽힌 것도 일부 세력이었을 뿐 조선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
나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한족의 졸개가 된 조선 왕족과 사대부들은 여진을 적대시했다. 이후 조선
과 여진 사이에는 오랫동안 화평이 유지되었다. 여진이 금나라에 이어 청나라를 세운 뒤 조선을 침공
했을 때, 청 태종이 인조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도 오직 복속을 바랐을 뿐 조선과 조선인들을 해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어제 내린 비와 바람으로 낙엽이 많이도 떨어진 스산한 나목이 되어 가고 있지만 오히려 만추의 풍경을 더하고 있습니다. 한철 겨울을 맞겠지만 또다시 봄은 오리라 여겨 세월의 순리를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옷 한겹 더입고 주변을 산책하는 오늘이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