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우산나물
뉴스일자: 2002년 07월17일 22시08분
다만 한 마음 모아 슬렁슬렁 돌아다닌 기록
한송주씨가 펴낸 '그리운 사람은 남행을 꿈꾼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무던히도 쏘다녔다"는 사람.
그냥 쏘다니기만 한 게 아니어서 그 쏘다님의 기록들이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송주(46)씨의 '그리운 사람은 남행을 꿈꾼다'(창작시대 刊).
광주일보에서 20여년 넘게 기자생활을 해온 그는 "역마살이 끼었든지 풍류기질이 거나했든지 어쨌거나 책상머리에 진득이 붙어있지 못하고 일부러 건을 만들어서라도 그저 바깥으로 돌고 보는 게 그동안의 고질이었다"고 고백한다.
그 '고질' 때문에 행복한 건 독자들이다. 발품 하나 들이지 않고 그저 읽는 공력만으로 전라도 곳곳의 바람과 기운과 얼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화순 물염적벽에서부터 김제 벽골제, 진도 남박다리, 신안 흑산도, 위도 띠뱃놀이, 신안 전장포, 여수 사도, 진도 관매팔경,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승주, 진안 마이산, 구례 오산 사성암, 익산 미륵사터, 영광 낙월도, 해남 일지암, 화순 벽나리 벅수, 구례 운조루, 영광 법성포 매향비, 구례 매천사 등등을 찍고 돌아 정읍 배들평으로 맺음하기까지 그를 길잡이삼아 떠나는 여행. 올 여름 먼 여행 떠날 계획 없거든 그가 책속에 낸 길들을 따라 전라도 여행 한바탕 하고 나면 소슬한 가을도 그리 머지 않을 것 같다.
술을 좋아하기로 소문난 그인지라 어딜 가서도 술이야기가 안 빠지고 목적지로 바로 닿는 게 아니라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해찰도 많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멋에 겨운 불성실한 길잡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능청스럽게 거기 가서 해야 할 이야기는 다 하고야 만다. 그저 휘뚜르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한바탕 귀에 익은 '썰'을 풀어내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분방함속에 아무렇지 않게 깊이를 담아내서 말이다.
그래서 부안 반계초당을 찾아서 그가 만나는 것은 <눈에는 안보이는 절경, 착한 한 영혼이 만들어내는 마음속 풍경, 세월이 만들어낸 은은한 향훈 그런 것>이다.
고창 선운사 가서도 상투적으로 동백꽃일랑 찾지 말라 한다. <선운사 동백꽃이 어디 있나? 이울었다. 검단조사의 선풍은 어디 있나? 이울었다. 그 참다랗게 서걱이던 소금 보시는? 이울었다. 그런 것일랑 아예 찾으려 말고 다만 한 마음 모아 슬렁슬렁 돌아다니면 된다. 병든 호랑이처럼 거닐면서 조는 매마냥 게슴츠레 풍경을 구경하면 그 뿐.>
짐짓 '게슴츠레'라고 하지만 볼 것들은 다 봐서 그는 아무도 눈 안대준 것들의 아름다움과 기특함을 발견해낸다. 귀하고 특별한 것들은 이미 닳도록 많은 사람들의 상찬을 받았다. 그런 찬사를 반복하지 않고 그가 정작 감탄하는 것은 문화재니 뭐니 지정도 안된 '진도 남박다리' 같은 '짜잔한' 석교이기도 하다.
<하늘하늘 옷 휘날리는 은빛 보살들은 멈춰라. 살랑대는 스란치마 귀부인도 잠깐, 거기는 당신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다. 행세하는 나으리도 저리, 눈매 붉은 도적들도 모두 가만, 그 다리는 당신들을 위한 길이 아니다.>
그리하여 '찬찬히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그 다리'를 두고 '그저 딴마음 내지 않고 어버이 새끼들 더불어 도란도란 살아가는 이들'의 다리이어야 함을 아름답게 밝혀주는 것이다.
<가을을 보러 간다. 섬진강으로 했다. 또 섬진강이냐, 고작 섬진강이냐, 옆사람에게서 핀잔을 받았다. 한 동네 점쟁이 영한 줄 모르는구만, 이웃집 큰 애기 이쁜 정 모르는구만, 대꾸를 해줬다>.
섬진강처럼 그렇게 '또' 나 '고작'이란 핀잔이 붙을 만한 곳들도 그가 가는 길들은 새로워서 '이웃집 큰 애기 이쁜 정'을 새삼 알게 된다.
사람이야기와 술이야기가 곳곳마다 빠지지 않으니 갈피마다 탁주냄새가 진동하고 전라도 사람들의 사투리와 땀내가 끈끈하다.
<(젊은이들 서넛이 벌이는 술잔치에) 염치불구하고 한다리 끼어 몇사발 얻어 마시니 흑산도 온 보람이 이제야 가슴에 벅차 오른다>고 하는 대목에선 웃음이 난다.
읽다보면 웃음만 있을리 없다. <섬이 변했더라. 얼굴이 쑥 빠졌더라. 쥐 소리도 없고 소금 바람만 서리서리 피어오르고 있더라. 모래톱에 시커멓게 올라선 폐선, 죽은 큰 짐승 같더라. 그 발에 물 적셔주고 싶더라.>같이 신안 전장포에서 느끼는 씁쓸함도 있고 이 길 저 길에서 만나는 깨달음들도 있다.
<장강은 구부러지지 않을 수 없나니. 세사도 그러하리라. 직강 공사에 열올리는 자들이여. 그만 삽을 거두고 땀을 식히시길. 그냥 내버려두시기를. 그러고는 차라리 자네 마음의 그 무망한 경직을 고치게. 둥그스레 휘도록 바로잡게나.>
직강공사에만 열올리는 세상, 효율과 속도만을 좇는 세상을 그가 살아내고 버텨온 방식이야말로 무망한 경직이 아니라 '둥그스레한 마음'이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많은 곳들을 만났다 싶지만 그 무엇보다 한송주란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기인(奇人)'이라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술이든 글이든 예(藝)와 풍류로 부를 만한 것이면 모두 차고 넘치는 사람이다. 기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에게는 일화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다.
아침까지 술마시고 출근해서 책상앞에 앉아 원고지에 1부터 100까지 숫자 먼저 매겨놓고 원고를 쓰는데 파지 한 장을 안 내더라는 이야기로부터 시인 고은에게 책좀 그만 쓰시라면서 "햇볕 좋고 바람 좋으니 시 쓸 겨를이 없네/가을이네..." 라고 한 수 읊어준 이야기라든지.
밤늦은 시간 궁동 예술의 거리 허름한 슈퍼 한구석에서 혼자 술마시고 있거나 술취해 허정허정 걸어가는 사람이 있거든 일단 그를 한송주로 봐도 되리라.
작가 주홍의 조각작품 '한송주'(오른손에 술병 들었죠?^^)
남신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