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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재난 방송사 KBS의 침몰
2014.06.06
이 아름다운 계절에 침몰한 건 꽃다운 젊음들을 수장한 세월호뿐만이 아닙니다. 국가 재난 방송사를 자임하던 KBS 역시 세월호의 소용돌이 속에 속절없이 침몰하는 중입니다.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해온 KBS의 두 노조는 이사회가 그 결정을 미룬 지난달 29일부터 한 주일이 넘도록 파업을 벌였습니다. 국가 재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일으킨 국가 재난 방송사의 파업이라니. 노조가 내걸었던 가장 큰 명분은 보도의 독립성이 훼손된 데 대한 책임입니다. 또 하나는 보도국 인사 개입입니다. 길 사장이 외부 입김으로 세월호 침몰 사건을 축소, 왜곡 보도하도록 지시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인사권도 없다면 사장은 뭣 하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KBS 사장의 진퇴는 노조가 결정하게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이사회는 결국 노조의 요구에 굴복, 지난 5일 길 사장의 해임을 결정했습니다. 사태는 이렇게 끝나게 됐습니다. 길 사장은 떠나고 노조는 돌아오고. 그러나 이것이 KBS 정상화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KBS 독립성 강화라는 긍정적 효과와 동시에 노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영진을 언제든 몰아낼 수 있다는 그릇된 노사관계를 고착시킬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입니다.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채널에서 매 정시에 진행되던 뉴스 보도가 대부분 반 토막으로 줄었습니다. 아예 다른 프로그램으로 땜질되는 파행도 이어졌습니다. 뉴스 진행자 대부분이 교체됐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도 연발했습니다. 후배가 현장을 떠난 자리에 긴급 투입된 한 베테랑 아나운서가 한순간 순서를 잃고 허둥대는 모습이 TV 화면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습니다. 한때 앵커우먼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 베테랑은 방송을 마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파업에 동참해 자리를 박차고 나간 후배 아나운서는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작과 보도 현장을 떠난 사람들의 속마음이 궁금해집니다. 언젠가는 되돌아갈 테니 부디 나 없는 동안 잘 버텨 달라? 내가 떠나면 얼마나 망가지는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 혹시 시청자들이 느낄 배신감 같은 건 생각해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영원히 잊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았을까요.사회 환경을 감시하고 사실을 밝혀 알리며, 대중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계도하는 일, 그것이 언론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요 사명입니다. 그래서 언론을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말합니다. 취재 현장을 떠난 기자를 참 기자라 할 수 있을까요. 제작 현장을 떠난 언론인을 진정한 언론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떤 명분이나 구실로도 본분을 망각한 제작거부, 파업은 용인될 수 없습니다. 공정 보도를 위한 노력과 투쟁 역시 그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어느 신문에 공개된 KBS 현 사태의 발단은 치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도국장이 사석에서 한창 민감한 세월호 희생자 수를 일반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비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를 한 기자가 노조에 고발했습니다. 문제가 커질 것에 두려움을 느낀 사장이 보도국장의 사표를 종용했습니다. 혼자 당하기는 억울하다고 생각한 보도국장이 사장으로부터 전달받았다며 외압을 폭로했습니다. 구조 작업 중인 해경의 비판을 자제해 달라는 주문까지 포함해서. 선후배, 임직원이 서로를 불신하고 배척하는 조직, 고자질하고 물고 늘어지고 보신에만 골몰하는 조직, 그것이 오늘날 KBS의 실체입니다. 팀워크가 생명이라 할 조직의 붕괴, KBS의 침몰은 세월호처럼 불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KBS에는 언제부턴가 노조가 경영진을 길들이려는 묘한 풍조가 흐르고 있습니다. 새 사장이 들어오면 으레 기 싸움, 힘겨루기가 시작됩니다. 1990년대 이후 KBS 사장은 으레 출근이 저지되거나 퇴진 운동에 시달리거나 제작 거부 또는 파업을 겪어왔다고 합니다. 근본적 원인은 역대 정부의 낙하산 인사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인사가 사장 자리에 앉으면서 노조를 달래기 위해 건전하지 않은 타협을 벌입니다. 노조는 그 틈에 영향력을 키우고, 반대파는 어떻게든 사장을 흔들 구실을 찾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온 것입니다. KBS의 이 같은 행태에 실망한 사람들 가운데 ‘공영방송 무용론’이 일고 있습니다. 비효율 고비용에 대한 비판도 무성합니다. 감사원은 지난해 KBS의 1급 이상 직원 382명 중 무보직자가 열에 여섯 명꼴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급의 평균 연봉은 1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먹고 노는 억대 연봉자를 방치한 채 KBS 상하 모두 수신료 인상에만은 한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국영, 또는 공영 방송사로서 KBS는 그동안 국가적인 행사와 재난 방송에 선도적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채널의 다채로운 방송사들이 경쟁 체제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민간 방송사 간 선의의 보도경쟁으로 국민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충실히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굳이 강제로 수신료를 털어가지 않고도 국가 재난 시 민간 방송사를 활용한 재난 방송 시스템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KBS 임직원들은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구성원들의 달라진 의식, 달라진 자세 없이는 공영방송 KBS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