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낸 16밀리 영화필름으로 양 테를 두른
밀짚모자,
그 모자 덮어쓰면, 차르르 돌아가는 햇빛 영사기,
내 머릿속 내 일생은 아랑곳없이 밀쳐내고
영화 한편 돌아갑니다
한 남자에 두 여자거나 한 여자에 두 남자
그도 아니면 환과고독, 하나같이
멋지고 슬픈, 비극이고 희극인 인생이랍니다
(나 역시 저와 같으리)
세상에 나지 말라 그 죽기가 괴로우니
세상을 버리지 말라 새로 나기가 괴로우니
더 줄이면, 죽기도 살기도 모두 괴로워라
원효 스님의 한 말씀 생각납니다
나도 한 말씀, 죽고 삶을 나눔이 부질없는 일,
기분 나면 영화 필름 갈아 끼고
마음대로 인생을 골라 사는 이 재미,
그 밀짚모자, 40년 지난
오늘, 내 추억 모니터에 나타났어요
오늘부터 저 밀짚모자, 잠잘 때마다 쓰고 자렵니다
―《유심》2009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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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천 / 1945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과. 1966년 《현대문학》 추천 등단. 시집으로 『장자시』『나무 舍利』『SF-교감』등. 저서 『마음의 샘』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강우식 공저)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한국의 명시를 찾아서』등이 있음. 『박제천시전집(전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