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소명召命은
근원적 관계성에서 오고 있으며
영성적 앎의 차원입니다.
소명은
각 개인에게
인생 전체에 주어진 일이나 과제가
있다는 개념입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교에서 신의 섭리 작용에
구체적 도구로서
개인의 역할을 설명하지요.
불교에선
인연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살핍니다.
유교에선 천명天命이
인도 전통에선
스와다르마Svadharma가 있는데
'자신의 고유한 의무'로 해석하여
신분제의 장치로도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와다르마'는
'스스로 가지는 법도'로 이해될 수
있는데
우주적 법칙을 체화體化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범아일여' 곧 사마디samadhi의
상태에 관한
구체적 과제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노자에게서
표면만 읽으면
사회가 부여하는 직분이나 도리를
부정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노자 철학의 요지는
우주적 질서 속에서
개인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지요.
노자에게서
개인의 고유한 본성은 무엇일까요?
그는 덕德을 얘기하지만
유교의 도덕적 착함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통나무(순박할) 박樸을 통해
규정되지 않은 잠재력을
중시하며
사회적 틀을 부정하지요.
그리고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는데
자기 중심성에 갇히지 않은
전체를 향한 확장을
의미합니다.
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통해
인위성
즉 개인의 차원에선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으며
'역할을 강조하지 않는 역할' 을
언급하지요.
이 역할은
행위 없음이 아니라
솟구쳐나온 샘물이 흐르듯
자연스런 행위를 가리킵니다.
노자에게
개인의 고유한 본성은
인도 '스와다르마'와 같이
우주 속에서
스스로 지닐 수 밖에 없는 본성
곧
무아無我의 경향성이지요.
이 구도는
기독교의 소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개인의 인위적 법도가 아닌
신의 의도에
혹은 경향성에 순응하고 동화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스스로 작동하는 스와다르마,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무위자연,
개인 의지 밖의 섭리인 소명
이 모두가 가리키는 것은
'나' 라는
개인의 갇힘을 벗어나도
행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벗어나면
공허한 無가 아니라
더 커다란 흐름을 만나게 되지요.
'無'라고 언급하면
사람들은
관찰자인 '나'는 그대로 둔 채
세상의 無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나 노자의 無는
세상이 아닌
'我' 를 부정하지요.
현실의, 자연의, 인간의 본성은
행위입니다.
노자의 무위는
'행위 없음'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런 행위' 이지요.
영성은
'나' 라는 울타리 밖의 영역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차원과 연결되면
자연스런 행위의 방향을 알게
되지요.
이것이
너무 명확하게 다가오기에
임무나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소명이라 표현하지요.
이것은 천명天命일 수 있고
인연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상호 깨어질 수 없는 관계성의
확립이지요.
기독교는 이것을 믿음이라
요가에선 박띠bhakti
영성적으론 '앎' 의 차원입니다.
불교에선 기이한 능력이나
전지적 지식을
반드시 포함해야만 하는 깨달음을
언급하지만
영성적 앎이란
흐르는 물과 같은 편안함이지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이 일어나지 않는
현상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상선약수는
그 지점을 가리키지요.
소명은
부분성을 지닌 개인의 경향성이
확장된 경향성으로의
편승입니다.
우리 모두에겐
성장으로의 소명이 있으며
이것은
각기 고유한 형태를 띠고 있지요.
이것은
개인적 과제처럼 다가오는데
우리의 출발선이
부분성이기에 그러합니다.
소명을 인식하는 지점까지 왔다면
이미
많은 길을 걸어온 것이지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이끄는
관계성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소명의 길을 통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얀 눈은 모호함 더해도
선명하게 줄지은 울타리
뿌연 두려움 개의치 않아
언덕 향하는 가벼운 걸음.
..260821小野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소명따라 그저 갈 뿐~^^ 고맙게 사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