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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 오히려 더 행복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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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오히려 더 행복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결혼생활을 몇십 년 하고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다.
하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결혼생활은 행복하고 성공한 결혼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이런 부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냐는 물음에
대부분이 특히 여성들은 선택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부모 특히 엄마들은 다시 태어나도
다른 유명한 이가 아니라 자기 자식을 사랑할 거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행복한 부부관계와 부모 자식 관계는 자신들에게도 행복이고
보는 이들에게도 아름답고 귀감이 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제가 가끔 곤란한 질문을 어머니들께 드립니다.
죽어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다시 지금 내 아들의 어머니 되는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왜 이런 곤란한 질문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하며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다시 진지하게 질문을 드립니다.
지금 내 아들과 딸의 엄마와 아버지가 되는 것 대신,
주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되시겠는지.
이렇게 질문에 많은 분이 되물으실 겁니다.
꼭 그렇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지?
주님의 어머니도 되고 지금 내 아들의 어머니도 될 수는 없는 것인지?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저세상을 동시에 소유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불가한 이유를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부자 청년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팔 것을 요구하셨고,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가진 모든 것과 부모와 형제와 자녀마저 버리라 하셨고,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처럼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오셨을 때도
“내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비록 지금 육신으로는 내 아들의 어머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영적으로 주님의 어머니가 되고,
육신의 어머니보다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더 행복한 사람들이 우리는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아들과 딸로도 나는 행복하고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사는 동안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두고 떠나야 하고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를 돌려드렸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를 떠나신 것 같지만 실은 돌아가신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돌아가셔야 할 분을 제 어머니라고 붙잡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이셨겠지요.
저를 놓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가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 인생은 이 세상 소풍을 왔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인생이고,
우리는 같이 소풍을 즐기다가 더 즐거운 하늘로 돌아갈 인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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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상속 문제로 형제가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형제들 간의 재산 문제를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시는 분도 있었고, 상속 다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면서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분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더군요. 실제로 가족을 만난 적도 있지만, 첨예한 갈등으로 인해 서로 원수가 되고 맙니다. 이런 갈등이 생각납니다.
큰아들이 제사를 지내줄 것이라면서 전 재산을 큰아들에게만 물려준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까지 모셨던 사람은 큰아들이 아니라 막내아들이었는데, 막내아들에게는 어떤 재산도 남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형제들은 공평한 재산 분배를 요구했지만, 큰아들은 부모님의 유언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재판까지 가게 되었고, 재판 이후 형제들은 서로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신 보지 말자고 선언했고, 실제로 재판 이후 만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상대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체념한 상태에서 열정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깊은 슬픔만 그 자리에 남게 됩니다. 재산이, 물질적인 재화가 과연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할까요? 사랑이 사라지고, 체념 속에서 슬픔을 간직하면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 중에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모님의 행복이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인 것에서 온 것일까요?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만으로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혈연관계만으로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행복도 예수님을 낳고 키운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세속적으로 성공한 부모를 두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세속적인 성공을 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때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다가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기준을 따르면 분명한 기쁨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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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모욕하는 자들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제압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너무도 감동을 받아 탄성을 올립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루카 11,27) 그러자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여기서, 여인의 행복선언과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루가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경청한 바를 믿는 일’, 그리고 ‘믿는 바를 지키고 실행하는 일’ 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귀담아 듣는 것,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주님!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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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한 사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 처지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충북 음성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것이 행복이고 보상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멀리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채워져서 만족하는 행복이 있겠지만,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6).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며 되새기고 순종하며 지켰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이룬 영광이 어머니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머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성모님도 올바로 공경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일생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 봉헌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 중에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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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교우들과 함께 ‘야구장’엘 다녀왔습니다. 돔구장이기에 더운 날씨임에도 안에는 시원하고 쾌적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주일하교 학생들과 갔었고, 이번에는 어른들과 함께 갔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지난번에는 3 : 2 로 이겼고, 이번에는 2 : 0 으로 이겼습니다. 홈팀이 이기는 경기는 경기장을 찾은 관중에게는 기분 좋은 일입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저는 사제복을 입고 갔습니다. 교우 한 분이 제게 ‘신부님은 야구장 갈 때도 사제복 입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옷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제복이 편해서 입고 다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사제복도 기능성 사제복이 있어서 땀 흡수도 잘 되고, 금세 마르기도 해서 좋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눈이 먼 소경이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소경에게 ‘당신은 볼 수 없는데 왜 등불을 들고 다닙니까?’ 그러자 소경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캄캄한 밤에 등불을 보면 제가 있는 걸 알고, 피해 할 겁니다.’ 제게 사제복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위해서 봉헌된 사람이고, 사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입니다.’라는 걸 알려 드리는 의미도 있고, 저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것은 저처럼 사제복을 입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손에 묵주 반지를 끼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차에 묵주를 걸거나, 십자가를 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집에 십자가 고상을 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유대인의 율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는 사람입니다. 겉옷을 빌려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빌려주는 사람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어 주는 사람입니다. 본인의 십자가는 물론 이웃의 십자가도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기차는 연결된 객차가 많아도 늘 같은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피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뭔가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마치 ‘바벨탑’과 같습니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단순한 가족의 틀을 벗어버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성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지만, 우리를 모두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이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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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한 여인이 소리칩니다. 무엇이 그 여인에게 소리치게 했을까요? 이유는 모르지만, 주님의 말씀이 그 여인의 마음에 작은 바람을 일으켰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바람은 감동이고 기쁨이고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주님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는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렇게 멋진 사람으로 성장하여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고 하느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소리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소리치신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을 향해 소리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물론 주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낳아 기르신 어머니께서도 행복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주님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때문이고 그 말씀을 믿으셨기에 행복하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행복하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은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 찾아오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고 하신 말씀과 이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그때의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니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가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늘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그 중심에 두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처럼 이렇게 살아가기를 희망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중심은 그 어떤것도 아닌 말씀을 실천하는 것임을 꼭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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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퇴양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날 깊이 잠든 새벽에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종아리에 쥐가 났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않았습니다. 가끔 있는 일이니까요.
여느 때처럼 발을 앞으로 당겨 종아리에 난 쥐를 풀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발을 앞으로 당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발을 당겼더니 종아리 반대편, 그러니까 발 앞쪽에 쥐가 난 것입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어찌할 바를 몰라 하염없이 서있었던 밤이었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야 해결되는 일들 말입니다.
그 시간이 헛된 시간이 아님을, 그 시간 안에도 교훈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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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
“아이는 세상에 나와 말을 익히고,
노인은 세상을 겪으며 침묵을 배운다.”<다산>
세월 흘러 나이들어 가면서 침묵의 경청이, 침묵의 겸손이, 침묵의 관상이 참으로 절실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을 세 번째 방문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35분동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서로 주고 받은 선물중 교황이 젤레스키 대통령에게 건넨 청동 주물에 꽃과 더불어 쓰여져 있는 글자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Peace is a fragile flower”
(평화는 연약한 꽃이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연약한 꽃과 같아 다치기 쉽습니다. 참으로 정성을 쏟아 고이 다루어야 할 꽃처럼 평화도 그러합니다. 평화만이 아니라 행복도 그러합니다. 값싼 평화가 없듯이 값싼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도 행복도 선택이자 정성을 다한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하는 수차례 인용했던 평생 좌우명 같은 짧은 시도 생각났습니다. 제가 평생 쓴 시들을 요약한 소원이 담긴 글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꽃을 평화로, 행복으로 바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하루, 평화롭게 살자, 행복한 하루 행복하게 살자”며 각오를 새로이 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행복의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청중은 매사 비판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청중으로 양분되어 있는 듯 합니다. 어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후 능란하게 대처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시종일관 목격한 어떤 여자가 군중속에서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적 소원을 드러낸 고백입니다. 예수님같은 아들을 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입니다. 또 하나 여자들의 간절한 바램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란 말도 들은 적이 생각납니다. 한 어머니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참행복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오히려’는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나를 낳아서 행복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마리아 성모님이 행복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믿는 모든이들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삶이었음을 봅니다.
수태고지에서 순종과 더불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까지 늘 아드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예yes”로 일관했던, ‘비움의 여정’에 항구했던 마리아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이 성모님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순종의 믿음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부전자전이기 보다는 모전자전같습니다.
새삼 누구나에게 열린 참행복이요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삶이 바로 참행복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선택과 노력에 따라 참행복의 꽃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며, 믿는 누구나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행복을 살 권리와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 그대로 참행복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시편 1장도 참행복은 말씀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행복하여라,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시편 119장은 176절까지 시편집에서 가장 긴 장으로 참행복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로 시작하여 176절 까지 계속됩니다. 새삼 말씀은 인간의 본질이요, ‘기도하는 사람’처럼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다음 시편의 고백도 이를 입증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참기쁨, 참행복은 말씀을 듣고 지킴에 있는 인간의 복된 운명을 보여줍니다. 세상맛, 돈맛, 밥맛의 행복이 아니라, 말씀맛, 하느님 맛이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과 함께 가는 믿음이니 믿음의 기초는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을 통한 공동체의 일치임을 오늘 갈라티아서가 입증합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갈라티아 교회 신도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된 우리들이요, 이 믿음의 일치를 견고히 해주는 부단한 말씀의 경청과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말씀과 믿음의 공동체 성장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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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한 만남>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뭇사람들이
그 사람의 어머니를
안쓰러워했다네
하나밖에 없는
다 큰 아들이
제 앞가림도 못하고
천덕꾸러기 사람들과
어울리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잘난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니
저러다 일 나겠네
저러다 일 나겠어
그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는
무슨 죄가 있나
뭇사람들이
그 사람의 어머니를
불행하다했다네
비난과 동정을 오가는
뭇사람들의 목소리를 뚫고
한 여자가 외쳤다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선생님이 계시니
선생님의 어머니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바로 제가
선생님의 어머니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많은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길에
휘둘리지 않고
그 여자만은
그 사람을
제대로 보았다네
이 여자를 만난
그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
나의 어머니를
행복하다하신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나를
나로 보는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이 사람을 만난
그 여자는
얼마나 기뻤을까
그날 그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행복한 만남이 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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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믿어서 복된 마리아
마리아께서 복되신 까닭은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리스도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기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한 여자에게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육신으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가 결국 무슨 득이 되겠습니까? 마리아께서 몸보다 마음으로 더욱 기쁘게 그리스도를 품지 않으셨다면, 육신의 어머니라는 사실도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엑카르트는 같은 구절인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본 셜교에서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그분은 이름이 없고, 이름 붙여지기를 거부하고 한 번도 이름 붙여진 적이 없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존재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존재를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가 있기 전에, 하느님이 행동하셨습니다. 그분은 아직 아무 존재도 없을 때 존재를 완성하셨습니다. 어설픈 스숭들은 하느님이 순수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존재보다 더 뛰어나십니다. 이는 치품천사가 각다귀보다 더 뛰어난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햇빛이나 어둠을 부를 때처럼 내가 하느님을 일컬어 어떤 존재라고 부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온당치 못한 짓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25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천부경>의 해석은 학자마다 다르고 뜻이 오묘하여 위에 인용한 번역문이 유일한 번역문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한민족의 하느님 사상이 ‘하나’에서 시작하여 다시 ‘하나’로 끝맺지만, 천지인(天地入) 삼재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서로 상응하는 유기적 관계 구조를지닌 삼 태극 구조이며 , 일(一)과 다(多)의 관계가 서양 존재론에서처럼 상호 대립 구조라기보다 상호 포괄 구조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서구 철학 사상사 및 종교 사상사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일신론, 다신론, 유신론, 범신론 등의 개념을 가지고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을 단정 히기가 매우 어렵다.
한민족이 고대 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는 신 관념의 형상화 작업을 시도하지 않고, 하느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우상’을 민들지 않았다는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마치 고대 이스라엘 이브라함 족장 시대신앙이나 이슬람교에서 신들이나 신령한 존재자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유일신 하나님을 신앙했듯이, 무교나 민속 신앙에서 각종 신앙 대상물을 섬기며 그 앞에 복을 빌면서도 여전히 지고신 하느님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앙 대상의 ‘구체성'에 대한 요청은 다신 숭배 형태로 나타니지만, ‘보편성' 요청은 하느님 신앙으로 지속된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하느님 신앙은 일신론적이면서도 다신론적이고, 저 하늘 높이 계신 초월신이면서도 만물의 화육 육성에 관여하는 범신론적 하느님으로 나타난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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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루카 11,27)
조금은 낯설고 쑥스러운 고백입니다. 제 엄마 돌아가신 마지막 순간에, 제 여동생이 왜 저에게 ‘오빠, 마지막으로 엄마 젖 만져’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전 제 엄마 젖가슴을 만졌습니다. 자식에게 엄마의 젖가슴은 단지 생리적인 젖가슴이 아닙니다. 제 엄마는 모태로 저를 배고 낳았다면, 사랑과 생명의 젖가슴으로 저를 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죽어가는 그 순간 엄마의 젖가슴을 만진 것은 바로 그 생명과 사랑을 잊지 않겠다는 저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이젠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오히려 참 잘했고, 그래서 불현듯이 엄마가 그리울 땐 엄마 얼굴이 아련히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한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11,27)라고 목소리를 높여 칭송합니다. 이런 감동적이고 감탄스러운 표현은 오직 본인 스스로가 자식을 낳아 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과 그 어머니로부터 삶과 사람에 대한 감사와 고귀함을 듣고 배웠기에 가능하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자식의 위대함은 어머니의 위대함이기도 하며,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입니다. 어머니란 존재는 세상의 가장 지혜롭고 따뜻하며 인자한 스승입니다. 세상에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스승은 없다고 저는 고백합니다. 이 여자의 고백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대한 엘리사벳의 예언(1,39-45)의 성취이며 반향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1,42) 엘리사벳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한 행복 찬양을 교회는 성모송을 통해 유지 보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칭찬을 인정하셨지만, 혹여라도 무슨 오해나 착오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11,28) 즉 여자가 말한 행복은 육체적인 기쁨에서 오는 행복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은 영적인 차원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으며 그 완전한 전형이요 모델이 다름 아닌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은 정녕 복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시고 기르신 어머니이시기에 복되신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참된 제자이며 신앙인이기에 복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 위에 살았고 살아가는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이시며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아드님 생전에 어머니의 삶은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이 늘 교차되는 삶을 사셨지만, 오늘 복음의 이 여자의 표현대로 이제는 성모 마리아의 육신적인 母性을 찬양한다, 고 해도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니며 오히려 더욱더 강조해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다시 母性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마리아의 모성을 드러내 놓고 알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이 모성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그만큼 사람 냄새를 잃어버리게 되고, 사람 냄새를 잃어버리면 그만큼 세상은 살맛을 잃고 그 모성의 인자함과 자비로움과 따뜻함과 포근함을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이 되어 가리라 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되신 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한 믿음과 사랑을 가졌기에 어머니는 아들이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함께 따라가며 고통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지만, 내 가족과 친구와 가까운 이웃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진리인 말씀을 거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나 혼자만의 행복을 누리며 살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신들의 모성을 제대로 살아갈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하고 포근해질 것이지만, 자기 자식만을 아낀 채 다른 아이들을 경쟁과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무관심과 냉대로 대응하고 반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오직 내 자식만이 보이고, 오직 내 자식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어머니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다시 아름다운 세상, 사람 냄새가 나는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봅니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말할 때면 언제나 그 특징적 장점으로서 합일의 정열을 들기도 하지만 아울러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모성의 분리의 정열 또한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남녀의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모성애는 하나였던 것이, 두 사람으로 나뉘는 사랑입니다. 어떤 면에서 모성애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한 서글픈 사랑입니다. 자식이 때가 되면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날아가도록 해 주는 것이 모성애임을 제 어머니는 수도원에 입회하려는 제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로서의 최종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을 멀리 놓아주는 능력, 이기심이나 독점욕이나 지배욕을 버리고 그 대신에 이타심을, 주는 능력을 사랑하는 자의 행복만을 바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칭송한 어떤 여자의 감탄스러운 찬사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합니다.”(11,28)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언급은 바로 다름 아닌 모성애의 합일의 정열과 분리의 열정을 지니신 어머니 마리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느끼고 봅니다. 성모 마리아는 모든 어머니의 참 위로자이시며, 모든 어머니의 참 표본이고 표양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성모님의 참 행복을 자녀들로부터 받게 되기를 바라고 또 기도합니다. “주님, 저나 우리 각자에게 어머니를 통해서 당신이 사랑이심을 느끼고 경험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저희 각자의 살아 계신 어머니들께는 건강을, 돌아가신 어머니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베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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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 말씀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 /
박윤식 [big-llight] 2024-10-11 ㅣNo.176709
한 자매가 갑자기 푸념을 하면서 한숨을 길게 한다. “남의 자식은 일류 대학에 잘도 가고 좋은 직업 얻어 시집 장가 잘도 가는데 우리 자식은 왜 이 모양인지. 저런 자식 하나두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니 늘 약이 오릅니다.” 이런 마음은 부모라라면 다 갖는 공통된 것일 게다. 자식 속 썩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 좋은 직장에 혼인 잘하면 남부럽지 않아 더 바랄 게 없다.
사실 이런 능력을 떨치는 자식을 둔 보고는, 여타 모든 부모는 그 가정사를 보고는 겉으로는 그래도 내심은 모르긴 몰라도 쾌나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게 될게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어떤 여자가,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하다.”’
어쩌면 자기 것보다 남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남의 자식이 겉으로는 성공의 길을 달리는 것 같아도, 그들 부모가 안은 남모르는 고통이 오히려 더 클 때가. 그러니 세상눈으로 자녀를 보며 일희일비를 말자. 한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닐 게다. 그러니 자식 돈 잘 벌고 잘살기만을 꼭 바라기보다, 올바른 가치관과 신앙심으로 살도록 기도를 드리자.
우리는 세계화란 이름으로 하나의 인류를 꿈꾸지만, 여전히 특권 의식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우리를 사로잡는 힘은 예수님 말씀과 삶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 사랑이다. 이것이 어느 특정 계층에게만 하느님 구원의 주어졌다는 편견을 갖지 말자. 우리는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당신 백성으로 초대하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 나라의 이런 보편성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선포를 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불효란다. 그래서 그 죽음을 알리지 않고 가슴이 미어져도 소문 없이 묻는다나.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치고 절망에 젖지 않는 이는 없을게다. 더구나 그 자식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는, 앞이 더욱 캄캄할 수밖에.
성모님도 예수님의 슬픈 죽음을 목격하셨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누구보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셨다. 한없는 슬픔과 분노를 안으시면서 성모님은 아드님의 죽음을 존중하고 조용히 받아들이셨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는 한 여인의 탄복은 성모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이미 만인의 어머니로 칭송받으셨음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낳고 기른 인간적 인연보다 더 높은 행복의 길을 제시하셨다. 당신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이 진정 행복하다고 가르치면서.
이는 언뜻 자신이 갖지 못한 부러움을 토로하는 우리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은 나보다 나은 이를 칭송하기보다 시기하는 모순된 이 세상에 묻힌 또 다른 나의 얼굴이 아닐까 되돌아본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의 보편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성모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로 정의되는 신앙인들의 모범이시다. 우리 역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이다. 성모님을 따라 주님 말씀 의지하고 복음을 실천함으로써 행복의 그 길을 찾아야만 하겠다. 또한 예수님을 낳은 모성과 젖을 먹인 세월에, 예수님만을 새기신 성모님의 참 모습이 스며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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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이 “감시자” 노릇을 하였다고 말합니다(갈라 3,24 참조).
『200주년 신약 성서』에서는 같은 단어를 “후견인”으로 옮깁니다.
‘파이다고고스’라는 이 그리스 말 낱말은 어원적으로는 ‘파이스’ 곧 아이에게, ‘아고고스’ 곧 길을 안내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상류층의 사람들이 믿을 만한 종에게 아이의 생활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맡겼고, 그 일을 하던 사람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들은 교사 또는 스승과는 달랐으며, 어느 정도 나이가 될 때까지 바른 생활을 가르치며 훈육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린 아들은 종보다 신분이 높지만 감시자인 종에게 교육을 받습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자유인으로서 올바로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종인 감시자에게 매여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있었던 것도, 우리에게 율법이 절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3,24) 준비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온 낱말들로 표현하여 본다면, 율법은 한편으로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여 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속”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서 해방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약속도 주었던 것입니다.
어린아이였던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참으로 성숙해졌다면 우리에게는 감시자가 필요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멋대로가 아니라, 감시자가 없어도 자유를 사용하여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5,13 참조).
거기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아직도 감시가 필요한 미성년자라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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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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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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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오늘 제시된 복음은 무척 짧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복음말씀입니다.
3년간의 공생활 가운데 절정기를 보내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군중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목활동을 통해 하느님 무한하신 권능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감쪽같이 일으켜 세우시는가 하면, 지독하게도 떨어지지 않던 악령들도 예수님의 한 말씀에 하나같이 다들 나가 떨어졌습니다.
기적과 치유의 능력만 갖추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변도 얼마나 탁월한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입을 여셨다 하면, 주옥같은 말씀, 감칠 맛 나는 말씀이 샘물처럼 솟아나왔습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매너 좋지, 인물 좋지, 거기다가 겸손하지...
사람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 ‘뿅’ 갔습니다.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당신 자신으로 인해 모친 마리아까지 덩달아 칭송을 받으시니 예수님 입장에서 아주 기분이 뿌듯한 일입니다.
저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응답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무슨 뜻밖의 말씀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이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재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은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나자렛, 이스라엘에 안주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작은 시냇물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육적인 관계에 매달려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뜻을 성취하기 위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작은 물줄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참 신앙공동체는 폐쇄된 작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벽을 무너트립니다.
국경도 넘어섭니다.
민족도 초월합니다.
남녀, 빈부격차, 인종, 이념, 사상...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언젠가 큰 바다에서 이 세상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인류 전체가 크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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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하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으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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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에겐 주님의 뜻이 행복인가, 괴로움인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자로 수감돼 있는 형을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들어가 탈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교도소는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누구도 탈출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까지 죄인으로 자신을 찾으러 감옥에 들어왔으니 형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이 온 몸에 새긴 문신이 바로 그 교도소의 지도이고 완벽하게 짜인 탈출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형도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평생을 무기징역자로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형에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쫓아 감옥을 탈출하여 결국 누명을 벗게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우리 불행 안으로
들어오신 분의 뜻이 우리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복의 기준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머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은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는 분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옥이 행복이라고 믿으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을 탈출시켜 주려고 하는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합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결국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겐 장난감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닙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장난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고통스러움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뜻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참 행복의 이유인 것입니다.
일반 대학교 다니며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쳤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1년간 버텼습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저를 수많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압니다.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바꾸어 놓아야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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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과 회개에서 무임승차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1)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라는 말은, “선생님의 어머니는 복되신 분입니다.” 라고 찬양하는 말이고, 이 말은 사실상 예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겉으로는 엘리사벳의 인사말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이 말은 ‘성령으로 가득 차’, 즉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느님의 인간 구원 사업을 증언하고 찬양하고, 동시에 ‘예수님은 구세주’ 라는 것을 증언한 말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모님 태중의 아기는 복되신 분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응답해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성모님도 복되신 분입니다.
‘복되신 분’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 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어떤 여자’의 말도 엘리사벳의 말과 같은 성격의 증언과 찬양인지, 아니면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여자가 그런 말을 한 일에도
성령의 힘이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그렇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입니다.
<여기서 ‘오히려’는 ‘그렇기도 하지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행복하다.’ 라는 말은 ‘복되다.’,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도 복되신 분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복되신 분이다.
그리고 성모님을 본받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은 곧
‘복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신앙인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그 ‘복’을 받았고,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복이 ‘완성’될 것입니다.
3)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다.”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말씀’을 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4)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어떤 특혜도 없고, 예외적인 특권도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족들도,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신앙인 가족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못 얻습니다.
하늘나라 입장과 구원에는 ‘무임승차’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창세기 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할 때,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라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롯은 악한 사람인데도 아브라함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롯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5) 우리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과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하고, 회개도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모니카 성녀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경우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회개와 개종은 모니카 성녀의 기도 덕분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회개는 아우구스티노 성인 자신이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의 공이 컸음은 틀림없지만...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서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이 냉정한 분이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또 회개를 기피한 사람들 자신들 탓입니다.
‘그날’이 되면, 그들은 다른 누구를 탓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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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한 여인이 경탄과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를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뉘집 아들인지 참 잘 났다’, ‘나도 저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식을 두는 것은 어머니라면 누구나 꿈꾸는 행복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행복을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녀가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을 ‘소유’에서 ‘존재’로 바꾸도록 인도하신 겁니다. 사람은 귀하고 좋은 것을 가져야 참으로 행복해지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그분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만 참으로 행복해진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저 ‘소유’를 기준으로 한다면 성모님은 결코 행복한 분이 아닙니다. 남편 요셉은 가난한 목수였고 그마저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성모님은 남은 평생을 가난한 과부로 사셨습니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아들 예수는 서른 살이 넘도록 장가도 안간 채로, ‘복음’을 선포하겠다며 집을 나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이었지요. 그럼에도 성모님이 행복하실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자신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는 그분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굳게 믿으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지켰기에 ‘주님의 어머니’로, 참으로 행복한 존재로 변화되실 수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행복은 특정 조건과 함께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참된 희망을 품고 착실히 살다보면 자연스레 내 삶 속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행복을 자기 안에 ‘가능성’의 상태로 이미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 안에서 발현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만이 당신 말씀을 곧 현실로 이루실 수 있는데, 그런 하느님께서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들이는 정성과 수고가 곧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희생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음 그 자체에 행복할 줄 아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양보와 배려, 나눔과 희생을 실천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살이가 참으로 힘겨워도, 고통과 시련의 파도가 우리를 덮쳐와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이들은 절대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릴 참된 행복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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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
우리들에게 익숙한 세계의 위인들 에디슨, 아안슈타인, 안데르센, 베토벤,
그리고 빌게이츠, 우리나라의 이순신, 김구, 안창호, ……
이 사람들의 전기를 읽다 보면 공통적인 것은 어머니의 교육과 격려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들은 위대한 교육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무 바빠 당신 사랑을 날라 줄 어머니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인은 연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성모님에 대한 찬양의 말한 사실을 루카는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11,27)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얼핏 보면 성모님은 행복한 분도 복된 분도 아니라는 어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겸손이 배어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채게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특히 성모님과 여인들에 대해서 마태오나 마르코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자세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외친 여자는 이름도 없고 그녀에 관한 어떤 설명도 없지만
예수님의 모친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크시다는 설명도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복음 선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적인 것에 매이실 분이 아니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며 복음정신대로 사는 사람이 사실 큰 사람이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친 여인의 말처럼 성모님은 행복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기 때문에
그 어머니도 훌륭한 것은 사람들에게 칭송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신 분시기에 당신 어머니를 추겨 세운다고 해서 맞장구를
치실 분은 더더군다나 아니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상대에게 식구들을 낮추는 것이 예의라고 여긴 우리의 풍토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장가 간 아들과 시집 온 며느리를 머슴에게 붙이는 ‘아범’ 또는 ‘어멈’으로
불렀습니다. 나라의 임금까지도 자기 자신을 신하들 앞에서 ‘과인’이라고 하며
낮추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참된 행복은 복음을 실천하며 기쁨에 차 있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족은 이 세상의 것, 성장하고 보호하는 데에서 있지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가족이라는 틀에, 특히 자식들의 몫까지 세상 마칠 때까지
끌고 가며 허덕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재물을 끌어 모으느라, 명예를 더 얻으랴,
그리고 자기 얼굴 내미느라 많은 시간과 정성을 쓸어 붓습니다.
신앙인들마저 이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이 세상의
행복을 ‘복음실천’에 두셨습니다.
여기에는 두려움도 욕심도 없는 평화와 기쁨의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에서 구약을 지배해온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구원으로 보고 그런 경지는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자유인이며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런 가르침에 귀기우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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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행복의 정원
가을이 깊어갑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벌써 단풍이 예쁘게 들어가는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상록수가 아닌데도 바로 잎이 말라가거나 파란색 그대로인 나무들도 봅니다. 그것은 그곳에 햇빛이 잘 드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환경, 하느님과의 관계 형성과 그 질에 따라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오늘복음의 상황어는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성모님께서 예수님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이 복되다는 뜻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와 달리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분이기에 복되시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이셨기에 복되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으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다음 군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군중 가운데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성모님을 칭송합니다. 여기서 신체 일부로 인격 전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법에 따라 모태와 가슴은 ‘어머니’를 가리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복되신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어떤 현세적 이유가 아니라 구세주요 메시아이신 예수님, 곧 사랑을 잉태하고 낳으신 것만으로도 모두의 칭송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덧붙여“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품고 예수님과 내적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도 칭송받을만한 일이지만 더 나아가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신 말씀을 끊임없이 듣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더욱 축복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행복과 생명의 뿌리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의 영을 향하여 자신의 전 인격을 향하여 들어 그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말씀과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그분과 함께하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는 이 말씀의 들음이 곧 성사(聖事)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말씀을 들어 마음에 새긴 그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사랑이요 행복의 길인 말씀을 들어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마치 천국 가는 입장권을 받은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귀로만 듣고, 홀로 말씀에 대한 감성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참 행복이 아님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말씀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참 행복의 정원입니다. 이 정원은 로맨틱한 곳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주변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소외된 이들, 버려진 이들,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이들, 권력과 자본에 의해 생존의 위협과 핍박을 받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말씀을 실행하는 행복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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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한 여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아서 외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 영예를 돌림으로써 자녀인 예수님을 칭찬하는 겁니다. 실제로 자녀의 걸출함은 고생스러움이 없지 않았던 임신과 양육의 과정을 행복과 보람으로 승화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육적 관계성에 기인한 행복을 언급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관계 안에서 주고받는 행복도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행복입니다.
이는 초월적이고 영적인 행복입니다. 물리적 상황이 어떻든, 인간적 처지가 어떻든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는 영혼만이 누리는 행복이지요. 이 행복은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 그 무엇에도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속적으로 탁월한 위치에 있어도 태생 계급처럼 딸려 오지 않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열린 행복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지배를 벗어난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갈라 3,23)
율법은 세상에 구원자가 오시기 전까지, 말하자면 "감시자 노릇"(갈라 3,24)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주다 보니, 하느님 마음보다 인간의 해법이 더 강화되어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고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율법서의 문자는 우리의 육을 지배하기에 태도와 행위, 결과와 성취에 주안점을 둡니다. 이와 달리 성령과 하느님의 자녀됨은 영을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이는 마음과 정신, 지향과 의도, 동기에 불을 지피는 힘이지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3,27)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이든,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세례는 우리에게 하나의 옷을 입혀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이 옷은 우리가 더 이상 육의 원리에 얽매이거나 세속적 행복에 집착하지 않고, 영으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래서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지요. 세속이 씌워준 어떠한 불평등과 고통의 굴레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이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머물고 관상하고 실천합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를 이루며 누리는 행복은 육이 주는 다른 만족과 비교할 수 없이 충만하고 고귀합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말씀의 매력에 풍덩 빠진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말씀에 머물러 주님과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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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2.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진정한 영적 개혁을 이루는 삶
<2024.10.12>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23:1~20절)
❝진정한 영적 개혁을 이루는 삶❞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단하고 우상을 철저히 제거하고, 소망을 두어 영적 개혁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 어떻게 영적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까?
➲ 말씀을 통한 소망을 든든하게 소유해야 합니다(1~3절).
요시야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올라가 모든 사람들과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도록 하였습니다(1~2절).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백성들의 귀에 들리도록 선포했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요시야는 여호와 앞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을 이루게 하기로 언약을 세웠습니다(3절).
상황이 어떠하든, 환경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결코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은 진노중에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며 한량없는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나 죄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참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단하며 약속을 새롭게 세워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한 소망을 든든히 갖고서 진정한 영적 개혁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통한 우상을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4~14절).
요시야 왕은 제사장들, 곧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우상 숭배에 사용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제거하도록 하는 개혁을 실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특별히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데 사용하던 모든 물건과 도구를 불사르고 빻아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우상을 섬긴 제사장을 폐하고, 남창의 집을 헐었습니다(4~7절). ‘평민의 묘지에 뿌렸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다 죽은 자들로 그들을 향한 경멸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또한 요시아는 유다 각 성읍에 나가 있던 모든 제사장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북쪽 경계인 게바에서부터 남쪽 경계인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던 산당을 더럽히고 헐어 버렸습니다. ‘여호수아의 대문’(8절)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중의 하나를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으며, 성의 광장의 문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요시아 왕은 성전 안 우상을 제거한 다음 성전 밖에 있는 우상들도 철저히 제거해 나갔습니다. 몰렉 우상을 섬기기 위해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장소인 가증한 도벳을 더럽혀 놓았습니다(10절). 그리고 태양신에 봉헌한 장식용 말들을 제하여 버리고 태양 수레를 불살라 버렸습니다(11절).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설치한 제단들을 제거했고, 솔로몬이 세웠던 산당들을 모두 파괴했습니다(12~14절). 요시야 왕은 우상 숭배를 중단시켰을 뿐 아니라 솔로몬 이후 계속되어 온 산당까지도 제거하는 철저한 개혁을 이뤄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의 이스라엘로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 자신의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다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의 삶에 파고든 모든 우상과 그에 관련된 모든 요소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진정한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모세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태우고 갈아서 없애 버린 것처럼 요시야가 선조들이 세운 우상을 태우고 갈아서 묘지에 뿌린 것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가 섬겨 온 모든 영적인 우상들을 성령의 불로써 철저하게 태워 버리고, 없애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우상을 섬기던 모든 생활 습관을 제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영적 우상과 영적 산당을 철저히 제거하여 진정한 영적 개혁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말씀을 통한 거룩을 온전하게 회복해야 합니다(15~20절).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남 유다에만 국한되지 않고 북 이스라엘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여로보암에 의해 우상 숭배지가 된 벧엘의 제단을 헐어 버렸습니다. 먼저 왕들이 정치적인 야욕을 위해 이용한 산당들을 파괴했습니다. 그 산당을 불태우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었고 우상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보내어 무덤에서 뼈를 꺼내게 하고, 그 뼈를 제단위에서 태워 제단을 부정하게 만들어 완전히 파괴했습니다(15~16절). 요시야 왕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무덤의 뼈는 옮기지 말도록 지시했으며 사마리아에서 온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뼈도 옮기지 말도록 명령했습니다(17~18절). 요시야 왕은 종교 개혁의 불을 사마리아로 옮기며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의 각 성읍에 퍼져 있던 산당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런 다음 산당의 제사장들을 모두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 불살라 제단을 더럽혔습니다. 이는 더 이상 제단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남 유다의 산당에서는 레위인들이 제사장 역할을 한 데 반해, 북 이스라엘은 레위인이 아닌 불법적인 제사장들이 산당의 제사를 주관할 정도로 타락했기에 사마리아의 산당과 제사장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전에 선지자를 통해 벧엘을 향해 주신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안에 있는 영적 벧엘과 같은 영역을 철저히 개혁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상 숭배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영적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는 성도들을 통해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 회복을 가로막고 있는 죄악의 영역을 개혁해 나아감으로써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분의 통치가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활 방식과 모양만 그리스도인 척하는 악한 생각을 버리고 말씀을 통한 삶의 거룩을 온전하게 회복되어 진정한 영적 개혁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영적 우상과 영적 산당을 철저히 제거하여 여호와 유일신 신앙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진정한 영적 개혁을 가록막고 있는 죄악의 영역을 개혁함으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23:1~2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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