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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한글의 탄생」 – 노마 히데키
저자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교수(국제교양대학교·도쿄외국어대학교)는 친한파라는 이야기는 없지만, 한국어를 전공하고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2005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글의 탄생」이라는 이 책으로 2010년 ‘마이니치 신문사(每日新聞)’가 주최한 제22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이에 대해 권재일 서울대 교수이자 국립국어원장은 “지은이는 민족주의적 맥락이 아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한글의 구조를 통찰하여 ‘소리가 글자가 되는’놀라운 시스템을 찾아내고, 하나의 글자 체계를 뛰어넘은 ‘말과 소리와 글자’가 함께하는 보편적인 모습으로 한글을 그려 냈습니다.”라고 추천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니다. 책 머리에 ‘한국어판 출판을 맞이하여’에 “일본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이다. 언어학적 시각에서 쓰긴했으나 언어학의 전문서가 아니라 인문서로서 광범위한 독자 그것도 한국어나 한글을 전혀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쓴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는데, 일본 독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한글이라는 문자를 안다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태어난 한 가지 독특한 문자체계를 아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음音, 즉 소리로 성립된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문자〉로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 때문이다.
돌아보면 15세기 세종과 학자들에 의해 창제된 한글은 ‘훈민정음(訓民正音)’또는 정음(正音)이라 불렀고, 언문(諺文)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으나, 諺은 ‘상말’이라고 해 오늘날은 피하고 있다. 근대에 들어 주시경(周時經, 1876∼1914)선생이 ‘한글’이라고 해 훈민정음이 한글이 된 것으로, 韓은 대한제국의 그 한 ‘넓고 위대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訓民正音과 正音은 백성을 위한 ‘바른 소리’라는 뜻이지만, ‘한글’에는 글이 있을 뿐 소리는 없다. 왜일까? ‘한국어’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지구상에는 5천 가지 혹은 8천 가지 언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어린이가 말을 먼저 배우고 글자를 나중에 배우듯이 ‘말해진 언어’가 먼저 실현되고 문자언어, 즉 ‘쓰여진 언어’가 생긴다. 쓰진 언어로 대접을 받는 언어는 많은 언어 중에서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언어들이 말해진 언어로만 존재하다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언어가 항상 쓰여진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쓰여 지는 언어로 남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개에 지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짜아짜아’족은 언어는 있어도 문자가 없었다. 그런데 2009년 8월 짜아짜아어 표기 수단으로 한글이 공식 채택되었다는 뉴스가 있었고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짜아짜아어를 쓰는 화자는 6만 명 정도로, 그들의 교과서에 한글로 쓰진 설화를 기자가 의미도 모르는 채 낭독하자 현지 노인들이 줄거리를 이해하고는 웃기도 하는 영상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그런 소통을 이룬 이유는 한글과 히라카나 등은 음을 나타내는 표음문자(表音文字)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라면, 윤돈(倫敦-런던), 파리(巴里) 등이라면 어떻게 넘어갈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화성돈(華盛頓), 파격달(巴格達)을 워싱턴, 바그다드로 알기는 힘들 것이었다.
현재는 도시명이기도 한 베트남의 ‘호찌민’을 한자로 쓰면 胡志明이 되고, 베트남 사람들은 호찌민이라고 읽지만,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고시메이’또는 ‘고시민’이 되고,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한자 그대로 호지명이 된다. 이런 한자어가 일본어, 한국어, 베트남어로 변한 것을 ‘한자문화권’이라고 하는데, 각 나라에 따라 음이 변한 이유는 한자에 화어를 대응시켜 훈독(訓讀-훈읽기)를 했느냐, 음독(音讀)으로 그냥 읽느냐에 따라 선율을 부여한 때문이다. 일본에서 ‘山’이라는 한자에 화어 ‘야마’를 대응시켜 읽는 것 등이 그 예이다. 한국어는 훈독을 배제하고 음독으로만 읽으므로 대부분 한자를 글자대로 읽는다. 다만 ‘金’은 고유명사인 성일 때 김으로 읽고, gold를 뜻할 때와 지명으로 읽을 때는 금으로 읽는데,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일본어에는 이렇게 음독이 섞인 한자 읽기가 NTT전화번호부에도 6,000개가 넘는다고 하니 일본어를 배우기가 만만치 않겠다 싶다.
아무튼 ‘한자문화권’에는 한자를 떠나서 문자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자의 가장 원초적인 메카니즘인 ‘상형(象形)’에서 形이 音을 불러일으키고, 그 음은 ‘주체 안에서 상기되는 객체’인 意를 불러일으킨다. 형도 ‘상기되는 객체인 의’를 떠올리게 하고, 그 의는 그 뜻을 일컫는 음을 불러일으킨다. 한자의 이러한 ‘형음의’의 형태야말로 ‘트라이앵글’을 닮은 구조로, 말인 언어음이 문자가 되는 ‘말해진 언어’가 다시 ‘쓰여진 언어’로 태어나는 결정적 메카니즘이 된다. 이런 한자 조자법(造字法)을 15세기 조선왕조 지식인들도 알고 있었으며, 문자를 만드는데 제일 먼저 검토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훈민정음》창제자들은 천여 년에 걸쳐 소중히 간직해 왔던 ‘상형’의 핵심인 ‘형음의(육서의 원리)’시스템에 결별을 고했는데, 그래서 한글은 의의 문자가 아닌 음의 문자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음을 형태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한글 창제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한글을 만들었을까? 한 마리 개를 두고 한국어는 ‘개’, 일본어는 ‘이누’, 영어는 ‘도그’, 독일어는‘헌트’라 한다. 언어마다 동일한 대상을 가르키면서도 다른 소리로 표현하는 이것을 ‘자의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 짖는 소리는 ‘왕왕, 멍멍, 바우와우, 바우바우’등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여기에는 음과 의미 사이에 어느 정도 필연적 관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훈민정음에는 음의 형태가 깃들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형상화한다는 것, 실제로 이만큼의 규모로 널리 쓰이고 있는 문자는 세계 역사상 정음을 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글 창제의 기본원리는 성리학과 음양오행 사상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 있는지 《훈민정음》해례본 제자해(制字解) 첫 구절에 나타나 있다. ‘천지지도는 일음양오행이이(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니라’가 그것이다. “천지의 이치는 오직 음양과 오행뿐이다”라는 것으로 이것이 자음이 만들어진 기준이라면, 모음은 무엇이 기준일까? 다시 제자해를 보면 ‘중성中聲은 범십일자凡十一字이니라’고 하여, 천지인(·ㅡㅣ) 세 개의 기본 자모가 만들어진 과정과 이를 응용한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것도 여러 변화를 겪어 단모음 중 ㅐㅔ의 구별이 사라지고 e보다 약간 넓은 의미의 e가 되어 현대 서울말에는 단모음 7개만 남았다. 현대어에서 모음조화는 대부분 깨졌지만, 의성의태어 속에는 남아있는 것이 있는데, 모음의 형태가 양모음은 양모음끼리, 음모음은 음모음끼리 짝을 이룬다. 즉 ‘반짝반짝’은 귀엽고 가벼운 느낌이, ‘번쩍번쩍’은 크고 무거운 느낌이 드는 것으로 쓰이지만, ‘반쩍반쩍’과 같은 음양이 혼재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어에는 성조(聲調)라 하여 음의 높낮이가 있고, 일본어에도 음절을 높게 또는 낮게 소리 내는 것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악센트가 있다. 중국어 ‘ma’는 음의 높낮이에 따라 마(媽, 어머니), 마(麻, 삼), 마(馬, 말), 마(罵, 욕)라는 각기 다른 뜻이 있고, 일본어에도 ‘하노 하시데 다베테’(저 하시데 먹어라)에서 ‘하시데’의 고저에 따라서 ‘젓가락으로, 다리에서, 끝에서’등으로 그 뜻이 바뀐다. 《훈민정음》도 초성·중성·종성 그리고 악센트라는 네 가지 요소로 해석하고 각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사분법이란 게 있었다. 15세기에 이런 인식은 중국 음운학의 이분법을 훨씬 능가한 것은 물론이고, 거의 20세기 언어학 지평에도 이른 것이다. 세종을 비롯한 한글 창제자들은 언어음이 그 의미와 관여되어 있는 한 그것을 극한까지 〈형태〉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저와 악센트는 결국 소멸되었다. 음의 고저로 단어의 의미를 구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일본어에 비(雨)를 뜻하는 ‘あぬ’ame와 엿을 뜻하는 저고형 ‘あぬ’의 구별이 전면적으로 사라진 것과 같다. 그러나 함경도, 경상도 지방에서 쓰는 방언에는 현대어에도 고저와 악센트가 남아있고, 《훈민정음》에도 단어에 점을 찍어 고저를 표시했다가 이후 장모음화 된 것이 남아있다. :감(柿), :별(星), :섬(島) 등에서 고저가 소멸된 대신에 오늘날 [ka:m], [pja:l], [sa:m]으로 장모음화 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장모음조차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언어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훈민정음》에 고저를 나타내기 위해 엄격하게 찍었던 방점이 16세기 말까지 혼란을 보이다가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 방점 자체가 사라졌다. 《정음》의 사상은 처음에는 고저와 악센트 언어의 양상을 보여 주었지만, 그것의 붕괴 과정까지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한글 탄생」본론으로 들어가면, 저자는 이 장을‘정음의 혁명’이라고 했다.
15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한자는 바로 삶 자체였다. 한자로 말하고 한자로 시를 읊고, 한자로 국가를 논했다. 살았을 때는 물론 죽고 난 뒤 기려지는 것조차 한자로 이루어졌다. 수나라 문제 때인 598년부터 청나라 때까지 1,300년에 걸쳐 시행된 관리등용시험인 과거제도는 고대 광종9년 (958년) 도입되어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과거를 향하는 길과 과거를 끝낸 후 시간까지 모든 것이 ‘한자와 한문’의 세계였다. 그런데 세종은 고려시대 있었으나 유명무실했던 〈집현전〉을 부활시켜 학문연구 총사령부로 삼았다. 집현전은 최강의 두뇌집단이었다. 물론 총지휘자는 세종이었지만, 여기에는 수장으로 영전사(領殿事)라는 직명의 정1품 아래 정2품 대제학, 종2품 제학까지는 겸직의 명예직이었고, 실질적인 직무는 정3품 부제학, 종3품 직제학, 정4품 직전(直殿), 종4품 응교(應敎), 정5품 교리(校理), 종5품 부교리, 정6품 수찬(修撰), 종6품 부수찬, 정7품 박사(博士), 정8품 저작(著作), 정9품 정자(正字)가 담당했다.
《정음》이 창제된 1443년 당시 집현전 부제학은 정인지(鄭麟趾) 47세, 응교 최항(崔恒) 34세,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26세·신숙주(申叔舟) 26세, 수찬 성삼문(成三問) 25세, 주부 강희안(姜希顏) 24세, 부수찬 이개(李塏) 26세·이선로(李善老, 연령 미상) 등으로 모두 젊었고, 세종은 46세였다. 정인지는 15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18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수제였고 나중에 영의정이 되었다. 신숙주는 조선통신사 서장관(書狀官)으로 ‘무로마치’시대에 일본에 갔다 온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로 에도 시대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고, 세조 때의 중심인물로 영의정에 올랐다. 왕립 학문연구기관이자 학술원에 지나지 않았던 집현전의 혁명가들은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제각기 더 깊은 정치의 중추에서 생사를 걸고 사육신과 생육신 등이 되었다.
그런데 세종과 동년배로 보이는 최만리(崔萬理) 일파는 왜 그토록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것일까? 정3품 부제학을 지낸 그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정음》은 있을 수 없다고 간언했다. 1438년 부제학에서,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440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세종실록》에 실린 상소에서 “소신들 엎드려 추측 하옵건데 언문의 제작이 지극히 신묘神妙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으며, 그 새롭게 창조하여 知를 움직이게 하는 바는 실로 먼 千古의 역사에서 태어난 것이라 하옵겠나이다. 하오나 신들의 부족한 견식으로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한편으로는 심려되는 바가 있사옵니다. 송구스러운 일이오나 감히 충심으로 상소를 올려 엎드려 엄벌을 받고자 하옵나이다.”이렇게 상소문 첫 장에 《정음》을 신묘라고 한 것은 단순히 아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잘 만들어졌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음》창제 자체에 경악했다.
“옛부터 중국 아홉 개의 주州가 풍토가 다르다고는 하나, 그중 방언에 의거한 다른 문자를 가졌다는 것은 본 적도 없습니다.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같은 곳에서 각각의 문자가 있는 것은 모두 이적이나 하는 짓이며 논할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사대부의 나라, 문명의 나라 조선은 중국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적(夷狄)이 되려는 것이옵니까”하고 대든다. 최만리의 이런 사상은 근대에 사대주의라 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해방 후 주시경학파의 중핵 최현배는 「개정 정음학」에서 인용하기도 망설여지는 어조로 최만리를 매도했다. 그러나 최만리파의 사상을 단지 사대주의로만 총괄해 보는 것은 성급하다. 반대 이유를 정치적인 측면만 보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식인들에게 한자와 한문은 삶이자 죽음이던 시대, 그것은 존재적 근원에서 나온 소리였다. 마땅함이었고 상식이었고 자연이었으며 이성이기도 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통파였었고 세종과 혁명파는 이단(異端)이었다.
이에 대해 혁명파 이데올로그인 정인지는 《훈민정음》해례본 ‘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천지자연지성이면 즉필유천지자연지문이니라(有天地自然之聲이면 則必有天地自然之文이니라)’“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다”라는 말이다. 정인지는 〈쓰여진 언어〉와 〈말해진 언어〉를 명확히 구분하고, 쓰여진 언어는 중국어인 한문이고, 말해진 언어는 조선어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계해년(세종25, 1443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개략 그 예와 뜻을 들어 이를 보여 주시었다.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시다.”고 했다.
그리고 세종은 스스로 《훈민정음》해례본 ‘서序’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과 달라 한자한문과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자한문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끝내 그 마음을 말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나는 이것을 딱하게 여겨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 이는 오직 사람들이 배우기 쉽고 날마다 사용함에 도움이 되도록 바라는 마음에서이다.”‘나·랏·말·ㅆ.·미’로 시작된 바로 그것이다. 1443년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하고, 1447년에는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간행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는 글로 한자로 써지거나 한문의 번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쓰이던 한문이 주가 아니라, ‘조선어를 주로 하고 한문을 종으로 했다’는 것이다.
“해동의 여섯 용이 하늘을 날아다니시어 행해지는 일마다 하늘이 돕는 기쁨이 차 있었다. 옛 성인들이 바로 이러하시었다.”로 시작되고 2장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아름다우며 열매도 많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른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태 뒤인 1448년에는 전6권의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는 책을 반포했는데, 이것은 조선의 바른 운(韻)이라는 것으로 명나라 홍무제의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본딴 것으로, 동국정운 편찬자는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曺變安), 김증(金曾) 등으로 《훈민정음》을 편찬했던 혁명파들로 서문은 신숙주가 썼다. “소리를 살피어 음을 알고, 음을 살피어 음악을 알고, 음악을 살피어 정사를 알게 된다.”고 하였고, 〈동국정운〉의 서문은 금속활자이며, 본문은 목활자로 하나하나 끼워 맞추어 찍은 활판인쇄(活版印刷) 책이다. 이는 조선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
〈용비어천가〉, 〈동국정운〉에 이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석보(月印釋譜)〉등을 줄줄이 출간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한글로 쓰고, 작은 글씨로 한자를 밑에 썼다. 이는 한글과 한자가 한 어절(語節)로 같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 서적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세종과 세조의 흥불정책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린 이퇴계와 이율곡의 경우 한자한문의 원리주의자였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도 정음의 철학을 논하였다. 최만리 등과 달리 조선어에는 조선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게 《정음》을 가르치며 한자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한자를 배우는 입문기에 「천자문」이란 책을 이용했는데,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으로 시작해 ‘위어조차 언제호야(謂語助者 焉哉乎也)’로 끝나는 250개의 ‘4자구’총 1,000자로 구성된 운문서인 이것은 영어 알파벳을 한 자씩 사용하여 문장을 만드는 ‘팬그램(pangrum)’말놀이와 같다고 할까? 「천자문」는 한 글자도 겹치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 남송시대 양(梁)나라 주흥사(周興嗣)가 무제의 명을 받아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고 그로 인해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팬그램이다. 천자문은 조선과 일본에서도 널리 사용되었고, 근세에는 유럽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천자문의 天의 경우처럼 ‘하늘 텬’(현대어 하늘 천)과 같이 훈과 음을 함께 읊고 외우게 되는데, 문선(文選) 방식이 아닌 한 글자 단위로 읽게 되어 있다.
1481년에는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당나라 두보의 시를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약칭 두시언해(杜詩諺解)로 25권을 번역하였고, 17세기에는 중간본을 간행했는데, 한시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두보의 시를 조선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정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다. 시조(時調)도 마찬가지다. 성삼문과 황진이 시를 먼저 보자.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 낙낙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골(白骨)이 만건곤(滿乾坤) 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메라
성삼문의 충의가(忠義歌)를 보면 대부분 한자를 사용하지만 ‘백골이 만건곤할 제’처럼 조선어의 음운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사 이래로 문자는 돌이나 뼈, 갑각에 새겨져 역사 속에 나타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목판에 새겨지고 종이에 인쇄되고 제본되어 책으로 엮어졌다. 그 책에 무엇이 쓰여졌고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정음》을 보는 자여,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칠 수 있기를…”이라고 쓰여져 있다. 또 《훈민정음》언해본은 《정음》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정음》은 “문자 자신이 문자 자신을 말하는 책”으로 세계사 속에 등장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런 점에서 존재의 양상 자체가 희유(稀有-드물다)하고, 그 존재 방식이 세계 문자사상(文字史上) 비할 데 없는 광명과 광망(光芒-빛살)을 보여 주고 있다. ‘역자 해설’일부를 소개하면서 줄인다.
“마이니치 신문에 요로 다케시 씨의 서평이 실리고, 일본경제신문에는 가와무라 미나토 씨의 서평이 실린 것을 비롯하여 사회 저명인사들로부터 이 책에 관한 서평과 소개가 이어졌고,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홋카이도신문 등에도 극찬과 함께 소개의 글이 실렸다. 이렇게 많은 신문에 한 책의 서평이 실린 경우는 보기 드문 일이다. 대한민국 거류민단의 기관지인 「민단신문」에서는 8.15특집으로 이 책에 관한 기사를 썼고, 조선총련의 「조선신보」에서도 이 책을 크게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