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꺼풀 -1-
엄마와 나는 한 해 걸러 한 번씩 서울에 가서 6주 동안 엄마 가족과 여름을 보냈다. 아빠는 일해야 했으므로 오리건에 남았다. 나는 한국에 가는 걸 무척 좋아했다.대도시의 아파트 생활이 너무 좋았고, 도시의 습기와 냄새마저 좋았다. 비록 엄마는 더럽고 공기도 나쁜 도시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했지만, 나는 할머니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길 좋아했다. 머리 위로 날아다는 매미 수천 마리가 내는 소리를, 밤이면 그 파닥거리는 날개들이 자동차 소음과 어우러져 내는 소리를 사랑했다.
서울은 유진과 정반대였다. 유진에서는 시내에서 10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숲속에 갇혀 살았고, 오로지 엄마가 내킬 때만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할머니의 아파트는 강남에 있었는데, 그곳은 한강 남쪽에 있는 매우 번화한 동네였다. 공원을 지나면 바로 문구점, 장난감가게, 빵집, 슈퍼마켓 등이 들어선 작을 상가가 있었고 나는 그곳까지 혼자서 걸어갈 수 있었다.
꼬마 때부터 나는 슈퍼마켓이 너무 좋았다. 다양한 브랜드의 여러가지 물건을 구경하는 것도, 매혹적인 반짝이 포장지도 다 좋았다. 나는 음식 재료를 만지작거리면서 그 무궁한 가능성과 조합을 그려보는 걸 사랑했다. 부드러운 멜론맛 막대 아이스크림과 단팥 막대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냉동고를 들여다보거나, 내 사촌 성용 오빠와 같이 아침마다 마셨던, 플라스틱통에 든 바나나 우유를 찾으려 매대 사이를 헤매는 일은 몇시간이고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와 내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할머니 방 세 개짜리 아파트는 여섯 식구가 북적거렸다. 그곳에서는 1미터만 움직여도 누군가와 부딪히기 일쑤였다. 성용 오빠는 부엌 옆에 있는 손바닥만한 방에서 잤다. 초소형 텔레비전과 소니 플레이 스테이션 정도만 간신히 들여 놓은 오빠의 방은 출입문에 머리어 캐리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옷걸이가, 옷걸이 밑에는 1인용 접이식 매트가 놓여 있었다.
성용 오빠는 나미 이모의 아들이자 나의 유일한 이종사촌이다. 오빠의 부모님은 오빠가 태어나자마자 이혼을 했다. 그뒤로 나미 이모는 돈 벌러 나갔고, 오빠는 나보다 일곱살 위였고, 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다. 하지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이 많고 섬세했으며, 어쩐지 기가 꺾인 듯한 모습으로 노상 축 늘어져서 다녔다.
10대답게 남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했고, 학교 공부에 치이기도 하고 한국 남자라면 반드시 마쳐야 하는 2년간의 군복무 시기도 다가오고 있어 스트레스를 꽤나 받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여드름이 너무 많이 나서 갖가지 국소 클렌져와 크림을 동원해 사투를 벌이다가 급기야는 생수로 새수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는 성용 오빠를 정말 좋아했다. 여름 내내 오빠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그래도 오빠는 어찌나 다정하고 참을성이 많은지 내가 끈끈적한 여름날에 오빠의 다리에 매달리거나 업어달라고 떼를 쓰면 얼굴과 온몸에 땀이 철철 흘러 옷이 흠뻑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순히 내 말대로 해주었고, 23층에 있는 할머니 아파트까지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면서 술래잡기를 하자고 내가 애걸할 때도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