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회원들이 위협하고 풀어주다
행 4:13-22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행 4:13-22 / 의회원들은 본래 교육도 받지 못해 일자무식인줄 알았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와같이 자신 있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고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예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4) 또 의회는 베드로에게 고침을 받은 당사자가 그 자리에 서 있는 한 병 고친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15) 그래서 그들은 두 사도를 의사당 밖으로 내보낸 뒤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었다. 16)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들이 큰 기적을 행한 사실만은 우리도 부정할 수가 없지 않소? 게다가 예루살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일을 알고 있으니 말이오. 17) 어쨌든 저 사람들이 더 이상 떠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오. 앞으로 또다시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면 극형에 처하겠다고 경고해둡시다.' 18) 이렇게 결정을 내리자 그들은 두 사도를 다시 불러들여 앞으로는 예수에 대한 말을 일절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마치 하나님께 복종하기보다는 당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듯이 말하는군요! 20)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과 말씀을 보고 들은 대로 말할 것이오.' 21-22) 의회원들은 더욱 심하게 두 사도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처벌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하는 수 없이 풀어 주었다. 40년동안이나 앉은뱅이로 있던 사람을 고친 놀라운 일을 보고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준엄한 재판정에 섰지만, 결코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회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로마까지 증거될 복음은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할 것이 암시됩니다.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3-14) 랍비 학교에서 공식교육을 받지 못한 사도들에 대해 편견과 우월감을 갖고 있던 공회원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놀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확신에 차 담대하게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담대한 태도는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4:8; 참고/ 4:29, 31; 9:27-28; 13:46; 14:3; 18:26; 19:8; 26:26; 28:31). 거기다가 그들 옆에는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 실체인 병이 나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회원들은 복음의 실체 앞에서 할 말을 잃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그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15-18) 혐의를 씌워 군중들을 홀리는 유대교 이단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꺾으려던 공회원들의 계획에 제동이 걸립니다. 사도들을 법정 밖으로 내보낸 공회원들은 회의를 시작합니다. 명백한 표적을 부인할 수 없었던 공회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능력을 증언하는 전도 행위를 금지하는 조건을 달아 사도들을 석방하기로 합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19-20) 지금 사도들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합니다.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머리로 배운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이 직접 경험한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믿음, 그 믿음에서 나온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실과 실체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21-22) 병이 나은 사람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누가의 특징입니다(눅 8:42; 13:11; 행 9:33). 날 때부터 40살이 될 때까지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 놀라운 표적과 사도들의 논리적이면서도 담대한 증언 때문에 공회원들은 더는 사도들을 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공회원들이 한 일은 고작 경고의 강도를 높여 사도들을 더욱 위협한 뒤에 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적용: 당신에게는 핍박 속에서도 든든하게 세워주는 복음의 체험이 있습니까? 당신의 신앙이 서 있는 자리는 관념입니까, 신앙의 실제입니까?
자식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갈대상자에 넣어 강가 갈대사이에 두는 요게벳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대적을 물리치는 길은 오직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 주인이신 주님께 인생을 맡기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좋은 소문을 내는 사람들
행 4:13-21 / 이기복 목사
21세기를 정보화 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얼마나 빨리 정보를 아느냐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매스컴들은 다른 매체보다 한시라도 빨리 정보를 알리기 위해 치열하게 취재경쟁을 합니다. 우리는 매일 홍수같이 밀려드는 각종 뉴스의 범람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경제, 정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에 대한 소식, 종교적인 소식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식까지 시시각각 뉴스를 통하여 듣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쁘고 좋은 소식을 듣기를 원하지만 매일 들려오는 소식은 불쾌하고 안 좋은 소식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기독교는 인류에게 최대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유앙겔리온의 “유”라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앙겔리온”은 “앙겔로스” 즉 “천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앙겔리온이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영어로는 “Good news"라고 번역을 하여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 “복음(福音)”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을 일명 좋은 소문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소문을 퍼지는 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교회가 부흥을 하려면 소문이 잘 나야만 합니다. 소문이 잘 나는 것이 곧 전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한다면 소문을 잘 내야 합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3장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초대교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수많은 군중들이 성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키니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것을 시기하고 위기감을 느낀 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의 기적을 얘기하면서 기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전한 유명한 말씀이 행 4:12절입니다. 즉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외친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복음과 병이 나은 사람의 소문을 퍼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좋은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1. 예수의 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였습니다. 가버나움, 갈릴리, 사마리아, 벳세다등 어디든지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소문이 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각종 병든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모여 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죄와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서 구원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에 모여드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구원을 받은 은혜를 소문내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고 병 고침을 받았고 축복을 받은 것을 소문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2. 교회의 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자 비겁하게 도망을 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은 다음 다시 모여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지고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새 바람이 불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사람들도 회심을 하고 초대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소문은 마치 요원의 불처럼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갔습니다. 즉 교회의 좋은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 가고 3000명 5000명 나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입니다.
오늘도 부흥하는 교회는 소문이 잘 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은혜가 충만한 교회이고 사랑이 넘치고 친절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각종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사회에 유익을 주고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교회라는 소문이 날 때 그 교회는 부흥하고 오늘의 본문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들 자신이 변화된 삶으로 좋은 소문을 내야 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그 교회를 담임한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의 소문이 잘 났습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심지어 재산을 정리하여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네 것 내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무상통하는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변화된 삶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변화된 인생들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곧 전도지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으로, 실패와 좌절의 인생이 성공과 희망의 인생으로, 자살을 하려던 인생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 서는 인생의 변화,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 변하여 남을 위하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소문, 파괴 직전에 있던 가정이 치유를 받고 천국과 같은 가정으로 변화된 소문, 문제아의 자녀들이 교회에 나와 아주 좋은 선행하는 자녀로 변화된 소문은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최고의 전도입니다.
4. 좋은 소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 21절에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좋은 소문을 내는 사람은 결국 교회를 부흥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였으나 이제는 세계의 경제대국이 되어 선진국에 진입하는 나라, 가장 부지런하고 열심히 배우는 나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소문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고 세계선교에 앞장서는 나라입니다. 이제는 대한민국하면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애국자가 누굽니까?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좋은 소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좋은 소문만을 내는 성도와 교회가 됩시다. 예수를 알립시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소문을 냅시다. 우리들 자신이 변화된 모습으로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스스로 좋은 소문을 냅시다. 좋은 소문을 많이 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가 날마다 부흥하고 믿는 사람들이 더해 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항상 그대로가 아닙니다.
행 4:13-22 / 최종원 목사
본문에 사람들이 베드로를 생각하기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천하기 그지없는 무식한 죄인으로 알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 엄청나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즉 항상 그대로가 아니었습니다. 고기잡이 베드로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난 자는 항상 이대로가 아닙니다.
본문 성경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 이 사람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고침 받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의회 회의장 밖으로 내보내고 서로 의논하였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 이들이 주목할 만한 기적을 행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정할 수가 없소"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는 군중들의 반응은 항상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항상 천한 어부가 아닙니다.
13상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성령의 지혜로 확신 있게 분명하게 주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은 말 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기탄 없이 성령이 충만해서 영적인 지혜를 가지고 짧은 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13중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으니 더욱 놀랐던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말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라 말하고 예수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살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엄청난 도전의 메시지를 외쳤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문적인 지식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있으나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학문이 어떤 진리를 제시할 수는 있으나 학문이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말씀이고 성령이며 예수님이십니다.
종교 전문가인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네가 할 수 있다니 하는 충격입니다. 이들은 학문의 능력은 알았으나 성령의 능력은 몰랐습니다.
세상적인 학문과 지식도 갖게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땅의 지식보다 하늘의 지식, 육신의 지식보다 영적인 지식, 세상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더 잘 알 수 있고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 무식한 고기잡이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야말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짐승도 부모를 알고 주인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사람이 부모를 모르고 주인을 모른대서야 무식 중에 무식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알고 있는 유식한 자들입니다.
베르로와 요한을 갈릴리바다의 고기 잡던 어부로만 보면 안됩니다. 이제 이들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능력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인 능력과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입니다. 이런 확신 앞에 종교지도자들도 어쩔 수없이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에 집착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사느냐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여기에 집착하게 되면 약해지고 비굴하게 됩니다. 잘 살기 위한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남들에게 굽신거리게도 되고 권력에 아부하게도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르게 살고 옳게 살고 참되게 사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사는 사람은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에 강해질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의 진리로 인해서 인간의 생활은 점점 향상되고 편리해졌고 사상적인 진리로 인해서 인류 역사의 모든 제도는 개선되어 왔습니다. 즉 모든 제도와 사회 환경이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자연과학, 기술, 또한 사상적인 진리 이러한 진리들은 인간의 삶을 보다 잘 살게 만드는 데는 많은 기여를 해왔지만 이러한 진리들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투쟁에 의해서 형성되어지는 진리들이기에 그러한 진리를 이루어 나간 인간 자체가 죄악의 위치에 놓이게 될 경우 그 진리들은 악용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발견되거나 발명되거나 쟁취되어지는 진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주신 절대적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바로 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자 우리에게 주신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진리이신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진리를 터득하고 이 진리를 영접하고 이 진리와 더불어 살게 되면 일반 자연적인 진리와 사상적인 진리는 인간을 잘 살게 만드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진리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삶을 바르게 만듭니다. 인간 삶을 참되게 살도록 만듭니다. 인간 삶을 거듭나게 만듭니다.
오늘 인간 삶을 바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의 인격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의 생애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강해질 수 있고 담대할 수 있고 힘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서 보배를 지닌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 그 자체는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못 생긴 흙으로 만든 그릇일지라도 그 그릇 속에 금은 보화가 담겨져 있다고 하면 그 그릇은 소중하게 보관되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나라고 하는 인간은 연약한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연약하여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괴로움과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안에 있는 보배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하게 보배롭게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7 이하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 했습니다.
살아가노라면 낙심과 실망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 버림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 쓰러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바르게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역사하시기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바로 이 보배로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베드로와 요한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위풍당당한 유대의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만큼 강할 수 있었습니다.
2. 항상 병자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병자가 아니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을 만나자 항상 병자가 아니라 병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나면서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도 예수님 앞에 해방되어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했습니다. 우리중에 병으로 고생한다고 염려하지 맙시다. 항상 병자가 아닙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변화되었습니다.
14절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했습니다.
앉은뱅이로 있다가 나은 사람이 이 자리에 같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변명도 부인도 할 수 없습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며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예수가 머리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지식으로 머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슴까지 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명한 간증이 있다는 것은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삶에까지 간증이 될 수 있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구원이라는 사실이 삶의 일부분이요 체험이요 변할 수 없는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22절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행 3:2에 보면 이 사람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자입니다. 완전한 앉은뱅이입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있었던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불가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이 사람의 치유는 심리적인 치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모든 사람을 다 치유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치유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건이 이땅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은 지금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하기에 감사가 아니라 병든 채 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감사가 아니라 실패해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영광 받으실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왔던 무수한 사람들이 놀랍게도 다 변화가 되었습니다.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을 때에는 더 이상 병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3. 변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천한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 마귀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들도 주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대로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꿈이 있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동물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강렬하지만 사라지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이 희미해 보일지라도 무덤까지 갖고 가는 꿈을 꿉니다. 어떤 사람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꿈을 꾸지만, 어떤 사람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꿈을 꿉니다.
꿈은 에너지와 같습니다. 꿈이 있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초자연적인 일도 합니다. 불가능한 일도 해 내는 것이 꿈입니다. 꿈을 가진 자의 특징은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꿈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환상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꿈은 반드시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꿈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쉽게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리교회를 생각하려면 웨슬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웨슬리하면 그의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웨슬리의 신비한 체험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위대한 신앙운동은 반드시 한 성도나 한 단체가 신비한 체험을 하고 생활이 변화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전도 운동은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였던 교도들이 성령강림의 체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렇게 나약하던 제자들 제자중의 제자인 베드로마저도 낙심해 있던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기독교 부흥운동의 기틀이 마련 된 것이 오순절의 성령강림이었습니다.
바울의 새로운 생명의 종교운동은 다메섹가는 길에서 신령한 체험을 통하여 시작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웨슬리의 영국 교회의 부흥운동도 그의 신비한 경험 곧 성령의 불이 붙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가 미국으로 선교하러가서 미국 본토인을 교화하여 보려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포부를 가지고 매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웨슬리는 실패의 아픈 가슴을 안고 다시 미주에 이주하여 간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다가 그것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올 때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없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돌아올 때 풍랑이 심하여 배가 흔들리고 물이 들어와서 배가 파손할 위험에 빠졌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모두 배가 빠져 죽을까 두려움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같이 배를 탄 모라비안 교도들은 아주 태연스럽게 아무걱정 없이 지냈습니다.
이때 웨슬리는 저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중에는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여기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웨슬리는 이 말을 듣고 자기의 지금가지의 모든 생활을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본국에 돌아와서 하루는 저들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에 전도하는 이가 루터의 저술인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던 중 이상하게 심령의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1738년 5월24일 이라고 자기 일기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에는 더욱 변화가 생기고 새로운 각오가 있어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만 의지하겠다 는 결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심령이 뜨거워졌다 함은 성령의 감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입니다. 나약하던 웨슬리가 성령의 충만으로 변화되어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것처럼 변화를 가져오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믿음을 붙들고 삶의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십시오. 다시 용기를 가지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섭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껏 뜨겁게 찬양합시다.
언제까지 나약한 모습의 우리가 되지 말고 변화된 삶의 모습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항상 그대로 있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되며, 사상이 변화되게 하시며, 삶이 변화되게 하옵소서! 나 중심으로 살던 지금까지의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시며, 주변 환경에 쉽게 동요되던 저희가 말씀중심으로 굳게 서게 하옵소서! 나약한 인격이 더 이상 좌절의 늪에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령충만한 자의 담력
곽선히 목사
어느 교회에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질 아니해서 아내로서 그 남편을 위해서 늘 기도하며 꾸준히 권면을 하고 늘 교회에 함께 나가기를 독려했습니다만은 그렇게 쉽게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주일날 아침에 남편이 느닷없이 하시는 말씀이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려는데"라고 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보다 하고 서둘러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됩니다. 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늘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나? 모처럼 가는데 좋은 목사님이 설교하셔야겠고 무슨 제목으로 하실까? 어떤 본문을 보실까? 이 첫 번 교회에 나가서 바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교회에 나갔는데 주보를 딱 받아보니까 본문이 뭐냐하면 창세기 5장이더라구요. 찾아보려고는 하지 마세요. 창세기 5장에는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이 계보라고 하는 족보가 쭉 나오는데 사람의 이름만 나와요. 아, 이거 큰일났거든요. '어떡하나 이거' 거기에 보면 대체로 요약하면 그래요.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다. 셋은 912세, 에노스는 905세, 게난은 910세, 마할랄렐은 895세, 야렛은 960세, 그리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다, 뭐 그런 얘기예요. 이 집사님은 깜짝 놀랐어요. 이거 어떡하나? 모처럼 제 남편이 교회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좀 낙심이 되지만은 여호수아 6장 1절을 생각했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마치고 나올 때에 남편이 "여보 등록합시다" 그러더랍니다. 그리고 가서 등록용지를 찾아서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겠다고 등록을 했어요. 참 이거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잘 차려서 남편에게 대접을 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 특별한 말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말씀을 들었기에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남편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이거 대체로 많이 살기는 했드만." 그러나 죽었더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너도 죽어' 그러더랍니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질 않다. 내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믿기로 했노라 그러더랍니다.
참 용기의 근본이 어디에 있습니까? 심리학자들이 심층분석해서 연구해 보면 사람은 두 가지 걱정밖에는 없답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죽음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이 내게 다가오고 있어요. 그게 첫째고, 두 번째는 죄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가책이올시다. 사업이 안돼서 고민하는 게 아니에요. 죄가 생각나서 그래요.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할 때도 자녀를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내 죄 때문에 얘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 고민이에요. 감기만 걸려도 벌벌 떠는 것이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에요. 비가 안 오는 것도 뭐 여러 가지로 얘기하지만은 이것도 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늘이 문을 닫지 않았나, 그래 고민이에요. 죄 문제, 죽음과 죄 문제, 이것이 근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가치관을 배우고 세계관을 배우고 많은 귀한 교훈을 예수로부터 배우겠다 하고 예수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복도 받고, 출세도 되고, 성공도 얻고, 무엇인가 예수로부터 권력도 얻고, 예수로 인해서 무언가 내 소원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십 년을 교회에 나왔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게 되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설교말씀을 들을 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중생하여 순간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한 단 더 나아가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이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올시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 존재의 참 비결은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이 나와 함께 있을 때,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올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의 속성을 아주 단면적으로 확실하게 말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대표적인 그리스도 인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 나라의 종교정치를 통합한 그런 귀한 국회와 같은 공회입니다. 여기서 생사를 결정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여기서 재판을 해버립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고 빌라도의 손을 의지해서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집행을 한 것뿐입니다. 사형판결은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가 저 뒷전에서 벌벌 떨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습니다. 오늘 그들의 특징은 담대합니다.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돈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지식은 있으나 용기가 없어요. 여건도 그만하면 괜찮은데 용기가 없어요. 왜 이렇게 쫄아들고 있느냐? 왜 이렇게 비겁해졌느냐?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의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눈 앞에는 지금 공회의 회원들 71명이 즐비하게 앉아서 아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아주 저 사람들을 아예 다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 그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또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본 거예요.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진 거예요.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건, 어떤 말, 어떤 일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의식이 더 충만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 옛날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 라고 하는 의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역시 생사권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현장에 서서 스튜트가르트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요만한 표식이 있는데,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이건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있습니다.' 딱 한마디입니다.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섰습니다. 바로 이 의식, 그 정체 의식,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이 순교할 때만 해도 헬라파 유대인들, 왕년의 동료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를 갈며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거기에 보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내가 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에 저 사람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항상 초점을 하늘에 두고 삽니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 의식이 그 충만함이올시다.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이라고 하는 분이 '생명의 샘'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인의 모든 삶은 카리스마적 체험이 된다.' 성령에 사는 사람의 경험, 지식, 모든 사건이 전부 카리스마적 의미를 가지게 되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문제가 되요. 카리스마적 체험으로 의미가 바꾸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요. 모든 일에 하나님과 나와의 은사적 관계, 카리스마적 관계가 되더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역사적인 예수,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고 멀리 가버린 분이 아니에요. 이제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셔요. Exalted Christ라고 그럽니다.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Living Christ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했어요. 그런고로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 성전 문에 앉아있는 사람, 하루 이틀 본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 성전에 올라가면서 딱 만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넌 왜 보고 지나가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 40세 된 이 사람을 향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했더니 벌떡 일어났어요. 모든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우러러보며 하고 있지만은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증거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거예요. 그것 뿐이요.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이 자리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충만함입니다. 내 손으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다 주님이 직접 나를 통해 역사하는 것뿐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 역사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그렇게 순종하게 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제 나를 지명했다는 데 대한 감격으로 삽니다. 하필이면 왜 나 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나 같은 사람입니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고용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고 나와 함께 역사하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필이면 허물 많은 나 같은 사람, 나약한 나 같은 사람, 어지러운 과거를 가지고 사는 왜 나 같은 사람입니까? 사도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했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다. 죄인의 괴수다. 그러나 내가 직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나를 사로잡고 나를 포로해서 나를 통해 역사한다는 거죠. 너무 감격스러운 거예요. 어찌해서 주는 나를 사용하시는 겁니까? 그런고로 이런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는데 누구를 용서 못합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는데 바울의 고백대로 보면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그는 나를 사랑하셨는데 이제 내가 누구를 미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올시다. 저는 좀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고 자기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아마 이 문제에 더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베드로의 용기가 가상해요. 왜냐하면, 보세요. 베드로의 과거를 다 알고 있잖아요. 이게 오래 전 된 얘기도 아니고 불과 몇 일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베드로가 도망갔던 사람 아닙니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사람 아닙니까? 다 알고있어요. 모두가 알고 있어요. "저 사람이 수제자라고 하면서 도망갔댔다며?" 다 아는 그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가 지금 담대하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그것이, 그것이 알고 싶어요. 보통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게. 그의 어두운 과거를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 불학 무식한 것까지 알고 있고 그가 갈릴리 물고기 잡던 어부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형편없는 인간이다 이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나의 모든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완전히 출애굽을 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는 거예요. 과거가 아무리 그의 발목을 잡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난날에 내가 누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오직 주의 사람으로 주님이나를 쓰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거만 가지고 역사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 입니까?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자기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다는 게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더구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찬송가 20장을 보면 "다 감사드리세" 하는 가사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마다 자주 부르는 찬송입니다. "다함께 감사드리세"하는 찬송인데 이 찬송가의 역사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작사자인 마르틴 린카르트라고 하는 분은 독일의 목사님입니다. 17세기에 독일과 그 모든 구라파에 흑사병이 유행했습니다. 참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좌우간 기록에 보는 대로 이 목사님에게도 하루에 수십 명씩 죽고요, 하루에 오십번 장례식을 했답니다. 자기 아들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기록대로 보면은 이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이 흑사병 걸린 사람들을 돕는다고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돕는다고 하다가 다 전염 되가지고 수도원에 거미줄을 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막 죽어갈 때입니다. 거기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잖아요. 영화도 많고. 이때에 자기 아들도 죽었는데요 목사님은 "다 감사드리세" 라고 하는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몸과 정성 다하여 다 감사드리세. 본 회퍼 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는 말합니다.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은 간단하게 구별이 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하는 것은 세상사람이요 오로지 감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세계를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저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부활, 머지 않아서 곧 나 자신이 부활이라고 믿고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해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은 만족한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두 가지 걱정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또 하나는 '벌 받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두 가지 걱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충만합니다. 충만한 체험. 그리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충만한 감성, 충만한 의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런고로 만족합니다. 여기에 충만함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여기에 새로운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학무식했다고 합니다. 아그람마타, 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용기는 지식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지탄 없이 말하더라. 용기는 환경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충만한 가운데, 오직 충만함이 사랑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로마를 가면 한 번씩 다 보게 되는 원형극장이라고 있지요. 원형경기장. 그 옛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기서 수십만 죽어갔습니다. 거기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기록 속에 이러한 유작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나는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으십시오. 나는 사랑의 숨결을 불어낼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리십시오. 나는 사랑의 재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워 주십시오.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로 가득한 마음을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웃으면서 그들은 죽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함입니다. 근심, 걱정, 모호함과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깨끗한 영혼, 밝은 미래, 오직 사랑으로. 그래서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담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실한 용기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한 이 위대한 용기와 담력이 오늘 우리가운데 또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승윤 목사
베드로와 요한이 서 있는 곳은 산헤드린 공의회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절대적인 종교권력을 갖고 있는 집단입니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140 여개의 눈이 살기를 뿜으면서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절대권력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베드로는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담한 선언입니까? 산헤드린 공의회가 죄를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인 예수,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조롱하고, 그 얼굴에 침을 ㅤㅂㅐㄷ었던 예수, 그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이요, 그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비굴함과 머뭇머뭇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위협에 짓눌려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담대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진리를 대담하게 선포하고 있는 베드로, 진리에 사로 잡힌 베드로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우리들에게 충격과 크나큰 도전을 줍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도 느낍니다. 반감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냐?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저렇게 떠들어대야만 하느냐?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무엇이길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그 사람들 앞에서조차 저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예수의 이름이 도대체 무슨 힘과 능력을 갖고 있길래 베드로를 저렇게 완전히 뒤바꿔 놓았단 말인가?
베드로의 모습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저 친구가 도대체 누구냐? 무식한 베드로가 아니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아 먹고 살았던 어부아닌가? 우리가 죽인 예수와 함께 있었던 갈릴리 촌사람이 아닌가? 예수가 잡혔을 때, 작은 계집 아이의 말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자가 아닌가? 예수가 잡혔을 때,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도망갔던 자가 아니냐? 배운 것도 없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담대하게, 막힘 없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베드로를 저렇게 바뀌어 놓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기독교는 이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관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학적인 담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상식과 도덕과 윤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기독교는 능력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뒤바꾸어 놓는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기독교는 진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입니다. 1 더하기 1이 3일 수 없듯이, 1 더하기 1이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아프리카에서나 저 멀리 떠 있는 별에서도 2듯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진리입니다. 미국에서나, 인도에서나, 아프리카에서나, 파푸아 뉴기니에서, 세상의 모든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만이 사람들의 죄악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분 만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으며, 그분 만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천상에서 우리들을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확신이 있습니까? 진리를 진리로 알고, 그 진리를 붙잡고 있는 자들이 갖고 있는 확신과 담대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기독교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보는 기독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풍성하고 놀라운 은총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갖고 세상을 억압하고 있는 기독교가 아닌가요?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듯이 몰아가는 기독교가 아닌가요? 마치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인 종교 지도자들처럼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세력과 권력을 갖고 세상을 향해서 호령하며,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말을 들으라고, 듣지 아니하면 요절내고 말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진리를 진리로 알고, 진리를 붙잡고 있는 자들로, 진리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진리대로 살지 못해서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아파하고, 회개하고,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는 자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해 주십시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베드로가 무엇이라 담대하게 외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사람의 말, 그 사람의 말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보고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보았으면서도 그냥 입 다물고, 귀 막고, 잠잠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요구하고 있는 사람의 말입니다. 그 말은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는 말입니다. 그들을 벙어리로 만드는 말입니다. 그들을 비겁하게 만들고, 거짓되게 만들고, 진실에 눈을 감고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말이 오늘날 세상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회유하고,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선물로 제공하면서 잠잠히 있어라. 모른척하고 살아라. 입 다물고 살아라.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니가 예수의 이름을 믿든, 말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겠다.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전하지 말고, 가르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세상을 향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이 무엇입니까? 해야만 하는 대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이 한 단어가 얼마나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단어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앞에 있을 때,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 앞에 섰을 때,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말씀에 의지해서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완전히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영광의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때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았을 때 사로 잡혔던 “두려움”을 저와 여러분들은 조금이라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죄송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으셨다는 사실이 찬송의 제목이기 이전에 우리들로 하여금 얼마나 치를 떨게 만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저와 여러분들은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내 자신의 죄악 때문에 저렇게 처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내가 지은 죄악의 실상을 여지없이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죽음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망가진 자신을 그 십자가의 피로 완전하게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어떻게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행위를 보고 어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양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란 이 한 단어를 그들의 입에서 달고 살았습니다. 자신들의 온 정신과 온 마음과 온 몸을 바쳐서 이 한 단어, “하나님 앞에서”란 이 말대로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다가 생명을 잃었고, 추방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유리걸식하면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산다는 생각을 한시라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소망 가운데 고난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살았지만 세상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 수많은 인간들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들이 주목하고 본 것은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우리가 사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 앞”이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벙어리 만들고, 귀머거리 만들고, 비겁하게 만들고, 한 마디도 못하게 만들어서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드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생명력 넘치게 만들고,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너희들이 판단해봐라.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선포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이 말씀의 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서 외쳐야 할 말씀이요, 세상을 향해서 담대하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해야만 베드로와 같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향해서 진리를 아는 자로, 진리를 붙잡고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첫째, 저와 여러분들이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를 한시라도 잊지마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공부를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운동을 할 때도, TV를 보고 컴퓨터를 할 때도, 물건을 사고 팔 때도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임을 한시라도 잊지마십시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도 하고, 위로와 격려와 소망과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진리를 아는 자로, 진리를 붙잡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위로요, 소망이요, 힘이요, 구원이 되주실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부르짖는 자들에게 그 하나님은 응답의 하나님이요, 용서의 하나님이요,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히 바꾸어서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담대하게 진리를 외치며,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신들로 저와 여러분들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힘을 쓰십시오.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은총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어떻게 해야만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을 향해서 진리를 아는 자로, 진리를 붙잡고 있는 자들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 없이 기억해 내십시오. 여러분들이 보고 들은 것이 여러분들 안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악이 완전하게 씻겨지고, 우리들의 약함과 부족과 아픔과 고통이 완전하게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 예수를 저와 여러분들은 믿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약속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실제적인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완전한 증거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 복음의 진리됨을 믿는 자는 바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드러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능력,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살리고, 우리를 능력있게 만들며, 우리를 천국의 소망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하나님께 요구하겠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생명을 쏟아부어 주었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느냐? 너에게 내 자신을 주었다면 다른 것을 아까와 하겠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을 주저하겠느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나를 믿고 의지하여라. 진리를 아는 자로 살아라. 진리를 붙잡고 있는 자로 살아라.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것이 바로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요,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음성을 끊임 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을 끊임 없이 기억해 내십시오. 그것을 의식적으로 고백하고, 선포하고, 주장하십시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너는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여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러분 영혼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십시오. 여러분들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 만나서 교제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지혜를 사용해서 나누십시오. 겸손과 온유함으로, 사랑과 인내로, 부드러움과 관용을 갖고, 상대방을 헤아릴 줄 아는 배려와 넉넉함으로 여러분들이 보고 들은 것을 나누십시오. 주의 성령께서 구원과 생명의 은총을 여러분들을 통해서 나타내실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담대함과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진리를 아는 자로 붙잡여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성령 하나님을 매 순간 의지하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의심했고, 여전히 휘청거렸으며,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한심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다음,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을 오순절에 충만하게 받은 다음,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나갔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지만,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예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모두 도망갔던 겁장이들이었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리가 오늘 보는 것처럼 담대한 사람들로 세상 앞에, 산헤드린 앞에 세우셨습니다. 비록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자들이었고, 진리를 붙잡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위협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지식도 아니었고, 인간적인 용기도 아니었습니다.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익숙함이나 용기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오순절에 그들에게 임하셨던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그전에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그들 위에 능력을 부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능력있는 증인들, 담대한 증인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성령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우리의 무능력과 우리의 무지함은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재능 없음과 활달하지 못한 기질과 성격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붙잡고 있는 자로 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기를 주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맡기십시오. 성령 하나님, 저의 무기력함과 무지함과 용기 없음을 인정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아는 자로, 진리를 붙잡고 있는 자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로 살고 싶습니다. 나는 도와 주소서. 부르짖으십시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성령 하나님의 감동과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를 짓눌러서 아무 소리 못하며 살도록 만들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온갖 짓을 다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서 진리이신 예수를 아는 자들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듣고 본 자들로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을 가르치고, 예수의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