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4
6월10일[연중 제1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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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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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skeI0FDvUo
[서울대교구 황광욱 베드로(사목국 가톨릭청년성서모임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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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나이를 조금 먹게 되니 슬슬 지난 세월을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감지덕지하게도 주님께서는 제게 수도자요 사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같이 부족하고 비천한 사람에게 너무나 과분한 은총입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언제나 말단이요 바닥이었는데, 수도자요 사제란 신분만으로 급격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능력도 경험도 짧은데, 관리자요 책임자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지속적인 겸손의 덕을 유지했으면 좋았을 텐데, 젊은 혈기에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보잘 것도 없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은연중에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며 부끄럽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위로부터 신호가 오더군요. 주님께서는 강력한 철퇴 같은 충격 요법으로 저를 바닥으로 내려치셨습니다. 그 바닥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도록 혹독한 고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요즘은 조금 나이도 들었겠다, 쓰라린 체험도 했겠다, 철저하게 저 자신을 낮추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다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형제를 바라봅니다.
신기하게도 자세를 낮추니 세상만사가 은총 거리입니다. 밑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감사 거리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들, 행복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 그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하루’라는 은총의 선물을 지속해서 주고 계신다는 것, 죄인임에도, 나약함에도,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홀로 고독에 밥 말아 먹으며 외롭게 살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따지고 보니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얼굴을 활짝 펴야 하겠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렇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행복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라는 얼굴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끝도 없이 올라가기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올라가서는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번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또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습니까?
반면에 폭풍 속 같은 고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밑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니 추락할 위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서 있으니 심신이 편안해서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살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니 그렇게 행복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희망이기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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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DpZOlXRz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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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이 법칙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리차드’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입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노숙자로 거리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지만,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정비소를 차려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몹시 슬퍼 보이는 한 여성이 리차드의 정비소 앞을 지나갔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는 그녀가 길거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리차드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누네’라는 이 여성은 감정에 북받쳐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리차드와 가까운 곳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차가 없었기에 걸어서 출퇴근했고, 매일 리차드의 정비소를 지나친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군인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가 얼마 전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의 끔찍한 고통 끝에 1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하지만 누네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린 두 자녀를 위해 일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저도 곧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어요….”
리차드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누네를 매일 초대하여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한 대 선물하고 사비로 등록까지 해 주었습니다. “나는 감옥에도 갇히고, 노숙자로도 지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난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내 딸도 언젠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한 사장이 매일 울면서 가게 앞을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인생을 바꿔 놓는데’, 포크포크, 유튜브]
리차드는 세상의 작은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빛이 되려면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일이고 타인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일이며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또한 의로움 때문에 평화를 이루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라차드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잃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때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은 때입니다. 여기에는 딸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말씀 안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게 가장 핵심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늘 나라를 차지해서 행복해지고, 자비로워지면 자비를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것은 반드시 되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에 우주적인 법칙으로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면 됩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법칙을 믿음이 행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해지면 반드시 채워주실 것임을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가 그 상징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당신을 만나려면 받았으면 내어놓아야 하는, 아니 내어놓기 때문에 또 물을 받게 되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아담과 하와는 이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도 바치지 않아 행복을 잃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서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가뭄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부족하지 않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1열왕 17,3-4)
믿고 안 믿고는 우리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이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들이 아닌 행복을 약속하는 영원한 약속을 믿고 우리도 가난해지고 자비로워지기로 모험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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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배달하며 어렵게 살던 학생이 성공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간단한 말인데,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학생들도 강의를 들으면서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간단하면서도, 쉬운 성공의 방정식 같았습니다. 학생이 예습과 복습을 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오락실과 컴퓨터 게임을 가까이하고, 놀기에 여념이 없으면 학생의 앞날에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수도자가 기도하고, 정결을 지키며,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수도자의 앞날에는 악의 유혹이 기다릴 것입니다.
1997년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구조조정을 겪었습니다. 국가의 신용도는 떨어졌고, 외환위기를 겪었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해야 할 일을 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국민소득이 30,000불이 넘었다고 축배를 들었습니다. 무리하게 해외에 투자하였고, 해외 여행하면서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였습니다. OECD에 가입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빨간불이 들어왔는데도 외면했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헐값에 외국 기업에 넘겨야 했습니다. 20%가 넘는 이자를 감수하면서 대출받아야 했습니다.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아껴 쓰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대출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지낼 수 있도록 전세를 마련했습니다. 27년 전의 일입니다.
교회에 위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역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자도 줄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가오는 도전과 위기를 외면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따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낡은 것이 있다면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과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면 안 되듯이 교회가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가치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예배, 나눔과 희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가정에서는 기도와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참된 행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참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재물에 대한 ‘탐욕’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교회가 부와 권력에 취했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나눔과 비움을 실천할 때는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받는 박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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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를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더 높은 곳, 하느님께로,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면 누구든지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참 행복”에 대한 이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의 헌장”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복된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 준다. 창세 1,26-27의 거룩한 계획은 창세 2,7의 거룩한 숨으로 확인되었고,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참 행복의 말씀은 인간적 논리로는 역설적이고,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참 행복론은 단지 재수 없는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약자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익과 성공 위주의 딱딱한 사회는 이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모든 벽을 허물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 아무도 이들이 공적으로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그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참 행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렇다.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 대부분이 두 가지 의미로 다루어진다. 은총을 받아들여서 이미 “행복한 사람”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참 행복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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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함께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울림이 좋은 목재를 찾으러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높은 산에 빽빽하게 자라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으려고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하여 가지를 뻗칩니다. 그러다 빛을 받지 못한 가지들은 시들고 말라 죽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부담이 되는 죽은 가지를 떨구어 냅니다. 안타까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은 가지가 떨어져 나간 바로 그 자리는 나이테가 얇고 섬유질이 길고 단단해져 질 좋은 울림 목재가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죽은 부분,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악습과 악덕입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서 몸과 마음에 붙어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죽은 가지를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지를 떨구는 순간에는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고집이 얇아지고, 성품이 더 단단해져 아름다운 삶의 울림을 낳는 목재가 됩니다. 모든 것을 취하지 않고, 해로운 것을 버리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마틴 슐레스케, 『울림』, 31-32면 참조)
악습과 악덕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달콤하여 버리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또는 이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잘라내지 않기도 합니다. 달콤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삶이며, 그 삶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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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3-12)
1) 이 말씀에서 ‘행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하고 참된 복’을 뜻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라는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가난함’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가난함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난’은 행복의 원인이나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악’이고 불행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물질적으로 가난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만 충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고, 그곳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위로’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가 바로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실제 상황이라면, 라자로는 정말로 슬프고 서럽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라자로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이었다면, 그 슬픔과 서러움은 원한이 되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라자로는 하느님을 충실하게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서러워해도 증오와 원한을 품지 않고, 부자가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부자가 저승에서 어떤 처지가 되었는가?”보다는 라자로가 하늘나라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도 그 위로는 생전의 서러움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크고 참되고 영원한 위로일 것입니다.>
3) ‘온유한 사람들’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더 크고 더 잔인한 폭력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비폭력이 폭력을 이깁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7,21)
‘자비로운 사람들’은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이 말씀들에서 ‘어린이’는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6월 8일에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냈는데, 전례력에서 그 기념일의 정식 명칭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은 ‘마음의 깨끗함’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신앙인은, 주님의 평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평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고, 이 세상을 주님의 평화만 있는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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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는 그 어떠한 시대보다도 여러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찾아 잘 먹고 잘 입으며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지요.
그런데 힘들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하고 허전하며 평화롭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의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대보다도 훨씬 전인 지금으로부터 이천 오백 년 전 그리스 로마시대는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연구하고 활발하게 토론했던 시기입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복론에 관하여 깊게 연구했고 책 또한 많이 썼지요. 그 당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행복론에 대한 대표적인 학파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또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두 학파 모두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파고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흔히 쾌락주의의 선봉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 행복의 출발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해 보고 그것이 나쁘면 다시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에 따라 움직였지요.
그래서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으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등 행복의 출발을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오감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그에 비해서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좋은 것을 먹고 입는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자제하여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금욕주의가 발달했지요. 이렇게 각자 다른 관점으로 출발한 두 학파 중에 오래지 않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없어지고, 스토아학파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바탕이 되어 천주교 신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많은 수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의 신학을 형성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사람은 입고 먹는 등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에서는 행복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면서 가끔 저는 마치 25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 같은 사람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원하며 더 좋은 것, 또 더 좋은 것을 끝없이 찾아 헤매면서 행복해지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요.
그렇게 먹고 입고 소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낮없이 노력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늘어난 것은 걱정거리요, 두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먹고 마신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혈압과 비만, 당뇨병 등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제는 먹는 것을 자제하느라고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비만과 싸우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지요.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끝없는 피곤과 불안감뿐입니다.
그 결과 "이래서 되겠는가? 정말 삶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는 심각한 성찰이 터져 나왔지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요즈음 우리 시대의 웰빙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꾼들의 잇속이 개입되어 이 웰빙 문화가 좀 천박해졌지요.
실은 정신과 영혼의 안락함을 위해서 추구한 것이 웰빙 문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며 요가와 기 수련을 통해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본능적으로 매달리고 있지요. 그러나 그 결과 또한 기대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헌신해서 자녀 교육에 바쳤는데 얻은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노후에 노력한 만큼의 뒷바라지를 받기는커녕 늙어서도 계속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소외되어 길거리에 나가 앉는 경우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불행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재산이나 건강, 자녀 교육에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기본인데 그것을 떠나서 어디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행복이 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왜 불행만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이 없이 단지 현세적인 안락함만을 위하여 재물을 추구하고 건강을, 자녀 교육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인격과 도덕이 밑받침되지 않은 재물은 이웃에게 아픔을 주고 본인에게는 갈증만을 줄 뿐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효가 바탕이 되지 않은 재물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해칠 수가 있지요. 건강도 마찬가지고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없이 이기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아이로 키우는 것이 어떠한 결과가 가져오는지를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된 재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두를 잘 살게 하지요.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자녀 교육은 인류를 평화롭게 하고 번성시키는데 기여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시대에 참된 행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핵심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만 미래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재산과 건강, 자녀 교육과 출세는 참된 평화와 영원한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인간의 삶이 힘겨운 이유는 그 방향과 기본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기에 열심히 노력할수록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재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출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누누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소비해 가는 행복 추구로는 결국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오염되고 파괴된 지구가 가리키고 있는 생명시계가 절망의 끝인 12시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고 하지요.
스토아학파의 자기 절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질서를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재물과 건강, 모든 출세와 자녀 교육도 그 때 더 풍요로울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행복을 찾아 누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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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모습을 제시해 주시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정의를 뒤집는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상징적 선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새로운 정의와 행복을 가져다주십니다. 시편 저자들과 예언자들이 노래했던 행복은,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의로운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이들, 박해받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기에 행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가난과 고통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유와 위로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하는 존재들이기에 행복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고통받는 이들, 예수님으로부터 해방을 찾는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메시아가 주실 정치적 해방과 육신의 치유를 갈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들, 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것들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아니고, 세상의 질곡으로부터 참다운 가치, 참다운 하느님의 나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참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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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 슬픔,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받음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는 곳은 시편 1편입니다. 이 시편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하며, 그런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까지 뿌리를 뻗은 만큼 수분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악인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습니다. 곧 돈, 명예, 권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가 없으니 그들이 성취한 행복은 그만큼 가볍습니다.
이처럼 시편 1편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당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곳에 뿌리를 둔 이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 시편에 비추어 행복 선언을 다시금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내용은 행복을 위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뿌리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오는 가난, 슬픔, 박해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냇가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뿌리를 뻗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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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3)
시편 1장은 ‘행복하여라!’라는 행복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이렇듯 시편의 행복 찬양처럼 마태오 복음 5장 ‘참행복’ 선언 역시 첫마디를 ‘행복하여라’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를 예전에는 ‘진복 팔단’이라 하였습니다. ‘참 행복’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하는 진복眞福, 지복至福입니다. 참행복은 이 땅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로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를 통해 실현해야 합니다. 이를 알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입니다. 그런데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참행복을 어떻게,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행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행복에 대한 명언도 많고,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꿈꾸는 행복! 그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이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복된 좋은 운수이다.’라고 규정했습니다. 행복의 정의는 시대별로, 지역별로, 종교별로, 개인별로 다릅니다만, 행복의 본질은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먼저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저와 우리의 생각을 모아 나름대로 대충 요약해 보자면, 첫째, 행복은 남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몸이 건강한 상태입니다. 둘째,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이며, 내 안에 있습니다. 셋째, 행복은 거창하지 않아도, 아주 소소한 것에 있습니다. (*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고,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입니다.) 넷째, 순간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고, 또 만족하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행복론’에서 행복이란 “만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타인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행복이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과정은 소홀히 하고 결과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십니까?
요즘 들어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고마워 혹 고맙소>를 자주 표현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가까이 있기에, 늘 곁에 있기에 나와 더불어, 나의 곁에 ‘너’가 있음에 무심해지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너가 거기-있음’이 바로 우리 행복한 삶의 시작이며 계기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너’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감정을 품을뿐더러, <고맙소 혹 고마워> 라고 표현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미국 조지 매이슨 대학 심리학과 ‘토드 키쉬단’ 교수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유려하고 유창한 언변이나 화려하고 거창한 ‘이벤트 혹 서프라이즈’에 있지 않습니다. 진심 어린 한 마디,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영국의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연설을 마치자 그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병마가 당신을 삼십 년간이나 휠체어에 묶어놓았는데 운명이란 녀석에게 너무 많이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호킹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가락을 이용해 타자를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대형 모니터에 그의 말이 전해졌습니다. “제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고, 제 두뇌는 여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평생 추구하고 싶은 꿈이 있고, 저를 사랑해 주고, 제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참행복 선언은 단지 선언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라는 하느님의 호출이고 초대이며, 약속이고 명령입니다. 행복하여라!, 는 예수님의 선포는 우리가 행복하게 이 땅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것만이 아니라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속일지라도 행복해야 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고 바람이라는 확언입니다. 참행복 선언과 선포는 예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인간 구원의 본성과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지복의 깊이를 체험하고 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며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5,3.9,8,12)
참 행복은 세상적인 행복, 행운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훨씬 더 넘어서야 하지만, 진복을 향해 나아가는 데 행운은 위로이고 위안이라고 느껴집니다. 뜨거운 햇빛 쏟아지는 거리를 오래도록 걷다가 잠시 나무 그늘에 쉴 때 느끼는 행운을 우리는 필요하고, 슬프고 힘들고 불안할 때 더욱이 그렇습니다. 다만 이런 행운에 집착하거나 연연해서 안주하거나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참 행복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8가지 존재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되잡고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무엇에 앞서 참행복을 선언한 배경과 제시한 의도를 꿰뚫어 이해하고 수용하고 실현할 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음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행복을 선언하시고 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은 마음으로 가난했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했으며, 모든 이에게 온유하고 자비로웠으며, 늘 사람을 대할 때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고 평화를 누리도록 하셨으며, 의롭고 옳은 일을 하면서도 그로 인해 겪은 모든 힘듦과 어려움을 기꺼이 하느님과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이 당신의 선언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시고 독려하셨습니다. 그때 갈리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 참행복의 외침을 들었고 보았으며, 느끼고 만지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이 예수님 당대 제자들과 군중 그리고 지금의 저희에게는 참행복으로 이끄는 안내서이며, 참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보증서입니다.
조경수는 「행복이란」 노래에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수 없잖아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참행복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사셨던 8가지 존재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바로 참 행복의 정도正道입니다. 주님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으며, 행복이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도 결국 주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을뿐더러, 당신 없는 행복은 원하지 않습니다. 살아도 주님과 함께, 죽어서도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사오니, 저희 또한 당신이 선언한 진복팔단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저희와 늘 함께해주십시오. 그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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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두 수도승이 길을 가다가 폭우로 개울의 물이 많아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울을 넘어갈 수 있도록 놓인 돌이 잠겨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개울 앞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 두 수도승 중의 한 명이 이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걸어 넘어갔습니다.
그 후 두 수도승은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계속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엽니다.
“왜 그 여인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는가? 우리 수도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자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넜던 수도자가 말합니다.
“나는 몇 시간 전에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녀를 업고 있는가?”
우리 역시 이 수도자처럼 상황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또 내려놓으려는 의지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마음속에 짊어지고 다니는 과거의 짐이 또 얼마나 무겁습니까?
과거는 현재를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쁜 기억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력은 하루가 지나면 64%를 잃어버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98%를 잃어버릴 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계속 되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되놰야 할까요?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금방 이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행복 선언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기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계속 되뇌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좇으며 세속에 대한 욕망으로 계속 되뇌고 있다면, 결국 하느님 나라는 보지 못하고 불행한 삶만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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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그리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공명’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어떠한 처지나 환경,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친절과 너그러움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사랑에서 나온 의로움이어야 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몽땅을 내어주는 베푸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 완전함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쳐야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안전함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함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은 목숨을 바치면서도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박해나 모욕도 달게 받으면서 그 자체가 하느님을 증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사도들은 최고 의회에 끌려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기뻐하였습니다.(사도 5,41)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의 고달픔과 시련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 노래하리라”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도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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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
마태오 5,1-12 (참행복)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행복>
서로 빼앗거나 움켜쥐지 않으며
함께 마음이 가난한
행복
서로 슬프게 하지 않으며
함께 슬퍼하는
행복
서로 거칠게 대하지 않으며
함께 온유한
행복
서로 내치거나 버리지 않으며
함께 자비로운
행복
서로 불의의 제물 삼지 않으며
함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행복
서로 더럽히지 않으며
함께 깨끗한
행복
서로 짓밟지 않으며
함께 평화로운
행복
서로 하느님을 핑계 삼지 않으며
함께 하느님을 따르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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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
또한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은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가치 기준을 가리키는데, 여기 '참 행복'에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의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결국 ‘참 행복’은 ‘복음적 인간’, ‘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들은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4,10) 하셨으니, 회개한 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부유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는 부유하게 된 이들입니다.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가슴이 찔린 까닭입니다. 이들은 ‘온유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입니다.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인 까닭입니다. 이들은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이들’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은 까닭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이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입니다. 당신 손이 이끄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들’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된 까닭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주님 앞에 있기에,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질 줄을 알고,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질 줄을 알고,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을 줄을 아는 이들입니다.
주님 면전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고,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참 제자들입니다. 자신이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참 행복'을 따라 사는 이들이 참으로 복된 이들입니다. 참 제자들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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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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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의 제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나라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시편121,1-2)
어제 친지로부터 받은 짧막한 카톡 글귀를 잊지 못합니다. 유명한 귀천 시를 지은 천상병 시인에게 그 어머니가 한 말이라 합니다.
“얘야, 뭘 그리 골돌히 생각하니?
그냥 살어, 그냥
별것 없다, 별것 없어”
제가 32년전 왜관 본원의 장엘마르 원장님을 찾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었을 때 빙그레 웃으며 하신 말씀에 순간 자유로워짐을 느낀 말마디가 있습니다.
“그냥 살면 되!”
어제 형제의 퇴회 소식에 순간적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허의 체험이었습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정주생활한지 36년인데 텅빈 하늘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뭐 보이는 것도 없고 잡히는 것도 없고, “아, 이래서 수도원 나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후 노모와 방문한 자매에게 이런 체험을 나눴을 때 즉각적인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밖에서도 그래요. 어디나 그래요. 별것 없습니다.”
이래서 사막교부들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하느님 나라 꽃자리입니다. 그 어디든 뿌리 내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입니다. 제 행복기도시 일부도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6월의 초목이 저리도 푸르게 빛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인 뻗은 뿌리들 덕분입니다. 하느님께 뿌리 내린, 보이지 않는 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뿌리내리지 못하면 어디서나 표류하는 두렵고 불안한 삶의 연속일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절친인 구상 시인의 유명한 “꽃자리”라는 시도 기억할 것입니다. 두분 다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나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바로 참행복을 살아야 할 꽃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산상설교의 참행복 선언이 참행복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포함하면서 그를 훨씬 뛰어넘는 참행복입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늘 나라의 행복이요 끝없이 열려있는 탐구대상의 참행복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참영성, 참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영성가들이 열렬히 사랑했던 참행복입니다. 특히 인도의 성자라 일컫는 간디가 평생 참 좋아했고 살려고 노력했던 또 살았던 참행복입니다. 다음 내용을 묵상하며 내 영적상태를, 성덕수준을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주님의 기도가 예수님의 가난하고 단순한 삶의 요약이듯 산상설교의 참행복은 예수님의 초상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평생 추구했던 참행복이요 이 참행복의 거울에 비춰보면 우리의 영적수준은 언제나 초보자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이 생각됩니다. 이런 참행복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진짜 신자들입니다.
모세의 십계명과 예수님의 참행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십계명을 포함하나 이를 훨씬 능가하는 끝없이 열려 있는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십계명의 준수로 좋은 신자는 되겠지만 정말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참행복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길뿐입니다. 참행복의 성인들의 공통점은 하느님 배경에, 하느님께 깊이 신망애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뿌리 내리느냐에 참행복이 달려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 것들이 아닌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참행복한 성인들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듯 하나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참 부유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자들입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오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부활대축일 다음날 엠마오 산보를 떠나고 혼자 남아 있을 때 써놓고 오랫동안 위로를 받았던 “민들레꽃”이란 짧은 시편 하나도 생각납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외관상 가난해 보이지만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부자도, 더 큰 자유인도, 더 큰 행복한 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눈만 열리면 어디나 뿌리내릴 꽃자리 참행복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누가 찾아줄 수 없는 각자 하루하루 날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생 찾아야 할 참행복의 하늘 나라입니다. 결코 값싼 참행복의 하느님 나라는 없습니다. 말이야 “별것없다, 그냥 살어!” 평범한 말같지만 깊은 내공이 깔려있는 참행복의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깊이 뿌리 내린자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참행복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요 이에 앞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당신을 찾는 엘리야에 앞서 가시며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니 가난한 듯 하나 참 부자, 참 행복한 자가 엘리야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 피신중의 그 불안한 자리도 안정과 평화의 꽃자리가 됩니다. 바로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문득 논어의 <덕불고 필유인(德不孤 必有隣>,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좋은 이웃이 생긴다’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는 의인들 곁에는 까마귀들로 상징되는 주님의 천사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늘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계신 곳에 엘리야가 있으니 참행복의 예언자 엘리야는 우리 믿는 이들의 롤모델이기도 합니다.
정말 수십년을 살았어도 언뜻 보기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텅빈허무의 외롭고 쓸쓸한 느낌’도 들겠지만, 잘 깊이 들여다 보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린 삶에서 샘솟는 ‘텅빈충만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참행복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시간이자 주님께 깊이 신망애(信望愛)의 뿌리를 내리는 시간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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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 점검표>
무의식적으로는 누구나 행복하고 싶겠지만 행복 의지가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고, 행복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의식적으로는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어떻게든 행복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 의지가 있는지 그것도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지 점검하는 점검표를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행복 문제로 고민한 적이 적어도 한번은 있다. -나는 행복을 주제로 하는 강의를 들으려고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다.
-나는 요즘 유튜브를 볼 때 주로 행복에 도움 되는 것을 찾아 듣는다. -나는 행복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영적 동반자 또는 지도자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행복론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행복론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매일 나의 행복을 점검한다.
(아마 이 강론의 제목을 보고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행복 의지가 있고, 제목을 보고도 읽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사람은 의지는 물론 관심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진정 행복 점검이 필요합니다. 제가 옛날에 원불교 교무님과 대화하다가 아주 좋은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원불교에는 유무념(有無念) 점검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훈계하신 뒤 ‘이것을 꼭 유념해라’라고 당부하고, 그래서 어른들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유념하며 살았지요.
그것처럼 원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유무념 점검표를 만들고는 유념할 것들을 매일같이 점검하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 나는 그것에 유념했는지, 무념했는지. 뒷담화하지 않기로 했는데 오늘 나는 그것에 유념했는지, 무념했는지 식으로.
그래서 이렇게 유무념 점검표를 한 달 지나서 보고 한해의 끝에서 보면 내가 하루하루를, 한 달을, 한해를 잘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겠지요?
저로 말하면 저의 인생 문제로 한 10년 고민을 세게 했고, 그 결과 저는 저의 행복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저의 행복을 점검하는 행복 점검표는 없지만, 이 행복론이 중요한 때마다 불행해지지 않도록 저를 붙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문제로 불행해지려고 할 때 그때마다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일어서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행복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데 저의 행복론은 주님의 이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하고 가난하기에 행복한 것이 참행복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면 더 행복하고, 가난하건 부유하건 무조건 곧 조건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조건에 좌우되는 행복은 참행복이 아닙니다. 돈이라는 조건, 명예라는 조건, 외모라는 조건 학벌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결혼하면 그 결혼은 백이면 백 다 불행하잖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가난해도, 슬퍼도, 모욕과 박해를 당해도 행복하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제가 무조건 행복한 비결입니다.
여러분도 행복 비결 곧 여러분의 행복론을 가지시기를, 행복 점검표를 가지시기를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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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참행복!>
오늘 복음(마태5,1-12)은 '산 위에서 군중을 대상으로 설교하신 예수님의 산상설교(山上說敎/마태5-7장)의 시작'인 '참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참행복'은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선포되고 있는 '참행복 선언'은 '아홉 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박해와 온갖 사악한 말을 듣는 사람들!
이 아홉 가지 참행복 선언 중에서 첫 번째 선언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라는 말씀이 나머지 여덟 개의 선언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음의 가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의 결핍', 곧 '영으로나 내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부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의 채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더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큰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겪는 가장 큰 고통이 죽음의 고통인데, 그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잠시 뿐입니다. 이 세상 것은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집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마음의 가난을 추구합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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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9_C2iHTOQ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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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변하지
않아야 할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느님보다
우리가
너무
커져버렸기에
우리가 바라는
행복도
그만큼 멀리
있습니다.
행복에 다가서는
길은
우리가 집착하는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가장 중요한
마음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늘 나라를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가난을
실천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가난한 마음을
되찾아주십니다.
가난한 마음은
조화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난하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하느님이십니다.
삶의 모습을
우리의
안과 밖을
바꾸어 놓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가난하신 하느님과
우리는 한몸입니다.
하느님과
한몸이며
한마음이
행복한 오늘의
가난한
마음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반대편에 있는
참된 행복입니다.
가장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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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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