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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년(1419)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主가 항복해오면서 통상을 요청하자 세종은 재위 8
년(1426) 부산포‧제포(진해)‧염포(울산 방어진) 등 삼포를 개항했다. 조정에서는 삼포에 왜관을 설치
하여 왜인들이 이곳에서 숙박과 무역업을 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조선은 대마도主와 계해약조를 체결
하여 항구에 머물 수 있는 무역선은 50척, 체류인원은 60인, 체류기간은 20일로 한정하도록 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왜인들의 체재비를 조선이 부담하는 것으로 약조했는데, 이 멍청한 약조 때문에 비용
부담이 너무 커서 결국 말썽을 일으키게 된다.
성종 때는 삼포에 체류하는 왜인들에게 토지 경작권까지 부여했다. 재산이 늘어나자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왜인들은 왜관을 벗어나 장사도 하고 조선인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하는 등 차츰 왜
구 시절의 근성을 드러냈다. 연산군 대를 거치는 동안 왜인들은 계해약조의 각종 규정을 무시하면서
제한을 어기게 되었다. 이를 단속하려 하자 왜인들은 조선의 관아를 공격했다.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중종은 삼포 백성들의 민원을 받아들여 왜인들을 규정대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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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主가 당장 불만을 드러냈다. 삼포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부를 누리다가 각중에 그 수입이 줄
어드니, 60년 동안 용인하던 일을 왜 새삼스레 단속하느냐 하는 적반하장이었다. 수차에 걸친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왜놈들은 중종 5년(1510) 4월 4일 4~5천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삼포의 각 관아와
성곽을 일제히 공격, 점령하는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급보를 받은 중종은 황형을 경상좌도 방어사에,
유담년을 경상우도 방어사에 제수하여 각각 종사관 2명과 군관 30명을 대동하고 내려가 난을 진압하
라 명했다. 한양에 머물고 있는 왜인들과 대마도主가 보낸 사신도 하옥했다.
그때 삼포왜란의 주모자인 왜인 종성친이 동래현령 윤인복에게 보낸 서찰이 조정으로 올라왔다. 부
산포첨사 이우증의 가혹한 단속을 견디다 못해 전란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서신은
왜군이 부산포를 점령하여 첨사 이우증의 목을 베어 대마도로 보냈으며, 동래현령에게는 유감이 없
으니 이 뜻을 조정에 전하여 전처럼 자유로운 상거래를 보장해주면 병선을 물리되 그렇지 않으면 동
래현도 공격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왜군이 죽인 자는 비슷하게 생긴 이우증의 동생이었으며, 겁
에 질린 부산포첨사 이우증은 한발 앞서 성을 빠져나가 머리를 깎고 절간으로 숨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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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경상도관찰사 김석철의 장계가 올라왔다. 왜선 수백 척이 몰려와 포구마다 불을 질러 수많은 병
선과 어선을 불태웠으며, 자신은 부하들과 함께 용감하게 대적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상
은 이와 달랐다. 왜군이 고성현을 포위하자 현령 윤효빙은 다급히 달아났다. 무장 한윤이 외로이 성
을 지키다가 김해부사 성수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김해부사는 장졸을 이끌고 성밖까지 왔지만 안
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지는 않았다. 사태가 더욱 위급해지자 한윤은 관찰사 김석철에게 달려가 구원
을 요청했다. 김석철은 고성현을 구원하러 달려가는 대신 함부로 성을 이탈한 죄를 물어 한윤의 목을
베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았다.
그 밖에도 여러 장계가 올라왔지만 하나같이 왜적의 수를 과장하고 자신만이 용감하게 대적하여 싸
우고 있다는 허위였다. 중종이 어전회의를 소집했지만 서로 책임을 떠미는 등 난장판이었다. 정승을
도원수로 삼아 진압군을 내려보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이름을 거명하기도 부끄러운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은 다투어 자신은 재목이 아니라며 도원수 자리를 고사했다. 비록 반란의 무리
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기는 했지만 중종은 치를 떨며 중신들의 짓거리를 지켜보다가, 미꾸라지
처럼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던 좌의정 유순정을 도원수에 제수하여 왜란을 진압하라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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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유순정이 출정하기도 전인 4월 22일, 부원수 안윤덕이 승전보를 전해왔다. 좌‧우도 방어사와
병마절도사 등이 왜군을 협공하여 크게 무찔렀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내이포에서 올라온 군관 강
윤회가 입궐하여 자세한 소식을 전했다. 조정에서 내려보낸 경상좌‧우도 방어사 황형과 유담년이 왜
적을 크게 무찔렀다는 낭보였다. 수많은 왜적을 죽이고 적장 5명을 사로잡았지만 아군은 전혀 상하
지 않았다는 보고도 있었다.
삼포왜란은 중종 5년(1510) 4월 4일부터 보름 동안 진행되었다. 조선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소실되었으며, 수백 척의 병선과 어선이 불에 탔다. 왜군은 병선 5척이 침몰하고 295명이 참
수되었다. 전란의 와중에 삼포의 각 왜관에 머물고 있던 왜인들은 뿔뿔이 달아나 대마도로 도망쳤다.
중종은 즉각 삼포의 왜관을 폐쇄했지만, 대마도主의 끈질긴 요청을 받아들여 불과 2년 뒤에 삼포를
다시 개항했다. 훗날 사관은 「중종실록」에서 ‘경솔하게 화친을 받아들여 화근의 씨앗을 만들어놓
았다’며 중종의 재개항 결정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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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재위 7년(1512) 대마도主와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삼포왜란 이후 2년 동안 금했던 통교를 재개
했다. 다만 삼포 중 제포(진해)만 개항하고 왜인의 거주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포를 개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왜놈들은 사량진왜변을 일으켰다. 급보를 받은 만호 유택이 군관들을 이끌고 왜구
를 격퇴했다. 명종 10년(1555)에는 왜구가 달랑포와 이진포에 상륙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노략질을 벌
였다. 을묘왜변이었다. 급보를 받은 명종은 형조판서 이준경을 전라도 도순찰사에 제수하여 속히 전
란을 진압하라 명했다. 나주를 에워싸고 있던 왜구는 조선의 군사들이 보강되자 스스로 물러갔다. 이
후에도 왜구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끊임없이 조선을 공략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대마도는 조선말기 도주(島主)가 종(宗)씨인데 도주와 덕혜옹주를 강제 결혼시켰던 일본놈들의 소행을 읽었어요. 그런데 宗씨 선조가 조선에서 대마도로 살로간 한국의 송(宋)씨가 한자에 선(線)을 하나끄어 일본놈 행세를 했다고 했으며, 부산의 송씨 집안의 조상 제사에도 참석한 기록이 있다고해요. 특히 宋·宗의 일본식 발음은 "소"상으로 똑같기때문에 개명하였다고 봅니다.
일본 "징용" 의 표현을 "노동" 으로 바꾸었다는 보도를 보고 영원히 화해와 갈등해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여겨 집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과거사의 행태를 간직한체 경제교류는 원활히 이루어 졌으면 합니다. AI 의 활발한 앞섬이 그렇고 20여년의 불황을 딛고 일어선 일본 경제 전반의 활력이 그러합니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양면성 처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