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탄생과 잘못된 정치교회, 카톨릭의 탄생 출처-http://blog.koreadaily.com/lakbbc/235305
J.M 캐롤 박사가 강의한 피 흘린 발자취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을 요약 정리하였습니다.
(주: 아주 귀한 자료로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어떤 내용들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내용들이나 아니면 전혀 다르게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 알게 되면 블로그 독자들은 놀라실 것입니다. 교회사를 바로 알아야 자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바로 잡을 수가 있습니다. 역사는 족보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주님으로부터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하신 보호하심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28:20
--------------------------------------------- 캐롤 박사는 알칸소스 주에서 1858년에 태어났고 1931년에 텍사스에서 작고하셨습니다. 그는 70세에 책을 썼으며 어린 시절에 많은 교파가 있는 것을 보고는 과연 어느 교회가 주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인가를 궁금해 하던 중 젊어서부터 교회사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연구 자료는 그가 작고할 때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 있는 Southwestern Baptist Seminary에 기증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들을 여행하여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교회사는 "피흘린 발자취" 라는 깜짝 놀랄 사실이었습니다. 그 발견한 바를 강의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존속해 오는 각 시대의 교회사란 곧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입니다.
1. 주후 30년-500년 시대
신약 교회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3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 약 500년 동안은 그야말로 피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전 세계로 통하는 로마 길을 타고 전 세계 여러 민족과 국가로 전파되었습니다. 세상정부와 유대교와 이방 종교들이 방해를 하였지만 피를 흘리는 순교를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주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최초의 순교가 침례요한(주: 구약의 마지막 인물)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는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뒤를 따라 수 많은 순교자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스테반(주: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집사, 신약시대의 최초 순교자) 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주: 그 후 예수그리스도의 12 제자들은 요한과 가룟 유다만을 빼고는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살해 되었으며, 마가는 죽기까지 거리에 끌려 다녔습니다. 누가는 목을 매달려 죽임을 당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안드레는 십자가에 묶여 죽임을 당했으며, 빌립은 십자가에서 돌로 맞아 죽었습니다.
동생 야고보는 회당에서 내 던져 죽기까지 매를 맞았으며, 유다(주: 가룟 유다가 아닙니다.)는 화살에, 맛디아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목베임의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순교의 일들이 일어나는 데는 세상 정부인 로마 정부와 유대교와 세상종교인 이방 종교의 가혹한 핍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핍박이 2세기 이상 계속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비롯하여 거침없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등으로 힘차게 교세가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고 제자들의 숫자도 크게 왕성하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때 쯤 어떤 교회들은 이미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여 과오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신약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첫 번째 잘못은 정책적인 면과 교리적인 면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넓은 길로 가는 교회들 신약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처음 잘못들은 정책적인 면과 교리적인 면이었습니다.
첫 번째 잘못은 정책적인 면에서 일어났습니다. 정책적인 면이란 교권정치의 시작을 말합니다. 초대교회들의 민주적 교회행정에서 부터 교권정치를 시작하여 교회에 전반적인 변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200년간 동안에 개 교회들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대 교회들인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에베소교회, 고린도 교회와 같은 교회들은 매우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수천 또는 수만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41; 4:4; 5:14)
신약성경은 사도 바울이 있었던 그 시대에도 이미 일부 교회들에게 바로 잡아야 할 많은 잘못된 교리들이 침투하여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주: 하나님께서 곡식씨앗을 뿌릴 때 마귀사탄도 동시에 가라지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교회들이 커지면서 많은 설교자들과 장로들(=목사들)이 함께 동역하게 됨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감독이나 목사들은 신약에서 주어지지 않은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주: 이런 일들은 교회 연맹이나 교회 협의회 또는 교단이나 노회, 친교회란 이름 하에서 독립교회의 지위가 무너지게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큰 교회는 자연히 다른 작은 교회들에 군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3서 9) 여기서부터 거대한 잘못이 출발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잘못된 여러 제도들이 이 잘못으로부터 파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한 이런 불법은 2세기 말 이전에도 조금씩 나타났습니다.
신약교회 시대에서 최초의 심각한 잘못은 이와 같이 다른 교회에 대한 간섭과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교권정치의 행사에서 부터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잘못은 교리적인 면에서 일어났습니다. 교리적인 면의 잘못이란 구원의 교리입니다. 이 잘못은 역사적인 자료들로 보아 2세기 말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적인 이방인들처럼 유대인들도 여러 세대를 거쳐 오면서 종교적 예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형이나 그림자를 실체 보다 더 강조하게 되며 예식의 중요성과 행함에 얶매이게 되었습니다.
구원과 침례의 관계에 있어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럴 듯한 교리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침례의 예식을 통한 구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2세기 말 이전에 일부 교회들 사이에서 "침례를 통한 거듭남" 또는 "침례를 통한 구원받음"의 사상이 주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에 의하면 침례를 통한 거듭남의 교리는 필연적으로 "침례의 대상자"를 변경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부 잘못된 교회들이 침례가 구원에 이르는 행위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선포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침례를 빨리 받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이로서 "유아침례"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유아침례가 대두되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는 적절한 대상자로 여겼었습니다.
그리고 침례의 방식에 있어서는, 처음 몇 세기동안 유아들이나 성인들 모두 물에 잠기는 침례(baptism, immersion)만이 예식으로 행하여 졌었습니다.
침례를 대치하는 물을 "뿌리는 법"(Springkle)이나 물을 "붓는 법"(pouring)의 세례라는 단어는 2세기 말까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었습니다. 그것들은 오랜 후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스 정교회(Greek Catholic)는 침례의 방식에 있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세례로 변경하지 않고 침례(baptism, immersion)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유아 침례를 실시하지만, 아이들을 물에 잠그는 방법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침례의 예식의 변화는 서서히 몇 백 년이 지나면서 변경된 것이며, 전체 교회들에게 동시에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교회는 교세확장을 위해 재빠르게 유행을 따르며 동참하였고, 다른 일부 교회들은 변경을 강력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주후 251년에 침례의 문제로 공식적인 교회들의 분리가 일어났었고, 그 후로 교권 권력을 가진 다수의 잘못된 교회들은 무력으로 진리를 고수하는 소수의 교회들을 핍박하여, 그 결과로 수많은 순교자들을 속출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의 초기 보다 후기 몇 세기를 거쳐 오면서 아주 잘못 된 "침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침례"의 교리를 거부한 이유로 소위 암흑시대로 불리 우는 중세기, 1200 동안에 약 5,000만 명이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는 그 시대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전 유럽과 일부 아시아와 일부 아프리카를 통하여 1년에 평균 40,00명 또는 하루에 110명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현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 졌던 것입니다.
(주: 이와 같은 일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치 않는 국교가 있는 나라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나치주의가 종교인 독일 정부의 히틀러가 단 기간 사이에 유대인 600만을 죽인 일과 공산주의가 종교인 소련과 중국과 캄보디아와 북한등의 공산 국가에서 짧은 기간에 1,000만명 이상을 살륙한 것을 잘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잘못된 믿음의 종교를 국교로 삼은 세상 정부, 로마가 저지른 일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잘못된 믿음의 종교의 국교인 카톨릭과 세상정부인 로마가 하나가 되어 벌인 살육의 잔치의 이면에는, 단지 종교적인 교리의 문제가 큰 이슈가 아니라, "침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침례"의 교리를 거부함이 그들의 종교와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기에 잔악하게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구원받기 전에 유대교를 믿고 있었을 때의 그리스도인을 죽이려는 잔인함과 열심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잔악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스스로 하나님께 아주 충성하고 있고 믿음이 충만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믿는 유대교인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위하는 최고의 길로 여기고, 자신의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금지하신 살인하는 것조차, 스스로 아주 거리낌 없이 저질르며, 하나님 앞과 사람들에게 정정당당하다고 생각하였었습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종교의 동기는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그 이면에는 마귀사탄의 속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로마정부와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됨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종교와 권력에 대한 도전과 하나님에 대한 불경의 죄목이라 뒤집어 쒸워졌기 때문에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며, 그 배후에는 마귀 사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 침례교도들의 역사에 대한 책들은 거의 압수되어 불태워졌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집권하던 1200년 동안에 침례교도들이 직접 기록한 자료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그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를 다른 방법으로 증명하셨고 보존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박해를 한 자들의 재판기록들과 이단이라고 정죄한 공식문서들에 언급된 그들의 죄과 내용을 적은 기록들입니다.
그러한 제 3의 기록들을 통하여 당시의 침례교도들이 어떠한 믿음을 가졌었으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기 위하여 당하였던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적나라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순교를 당할 때 그러한 여러 사건들을 주변에서 보고 들은 여러 증인들의 기록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기록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인 그들의 믿음과 생활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하고 있습니다.)
좁은 길을 가는 교회들
트렌트 종교회의 의장 카르디날 호시우스의 기록(1524년) "만약에 지난 1200년 동안에 침례교도가 가혹한 고통과 칼로 베임을 당하는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모든 개신교들보다도 더 많은 숫자로 늘어났을 것이다." (Hosius, Letters, Apud Opera, P, 112,113)
(주: 이 1200년 간은 종교개혁에 이르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인데 로마 카톨릭은 이 기간 동안에 침례교도들에게 말로 할 수 없는 무서운 핍박을 네로가 초기 크리스챤들에게 하였던 핍박보다도 더 심하게 하였습니다.)
아이작 뉴톤경의 기록 "침례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에 동화하지 아니한 유일한 기독교도였다."
루터 교회의 모세임의 증언 "루터와 칼빈이 나오기 전에도 유럽의 전역에 현재 네덜란드 침례교회의 교리를 완강히 지키는 사람들이 은밀히 숨어 있었다."
Fuller Church History "주 후 1539년 사우스 와크 건너편에서 두 사람의 재침례 교도가 화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조금 전에는 홀란드(Holland=네덜란드)의 재 침례교도 5명이 스트필드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Vida Supra p. 61 공문서 기록 "쮜리히(스위스)에서는 쯔잉글리와 재 침례교도와의 사이에 많은 변론이 있은 후 의회는 한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곧 전에(유아 때에) 침례를 받은 사람이 다시 침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이들을 물속에 집어넣어서 죽여야 한다는 법이이었다. 비엔나 강에서는 많은 재 침례교들이 쇠사슬에 묶여 서로 연결되어 물에 던 지움을 당하여 한 사람이 물에 빠지면 그 다음 사람도 끌려 들어가 수장을 당하고 말았다."
장노교회의 에딘버그 백과 사전의 기록 "... 침례교회들이 전에 재 침례교도라고 불리우던 기독교들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 교리는 털투리안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해지고 있다."
(주: 털투리안은 사도요한이 죽은 후 50년 후에 출생한 사람으로 요한의 직통 제자 라인입니다.)
Moore(Earlier and Later Nonconformity on Oxford 12)의 기록 " 주 후 1160년 침례교도일행이 옥스포드에 들어갔다. 헨리 2세는 영을 내려 그들의 이마를 불 쇠로 인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군중들 앞에서 매질을 하고 옷을 찢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으며 그들을 시골로 쫓아냈다. 그 마음 사람들은 그들에게 거처할 곳을 주지 않았고 음식을 제공하여 주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마침내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역사 기록자 스토우의 1533년 증언 "5 월 25일, 런던 성 바오르 교회당에서 19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가 조사를 받았다. 그 중 14명이 유죄를 선고 받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스미스필드에서 화형을 받았으며 나머지 12명은 화형을 받기 위해 시내로 보내졌다."
영국의 역사가 프로우드의 기록 "그 상세한 기록은 사라지고 그들의 이름도 전하는 바 없다. 다만 그 사실만이 전하기에 족하다.
그들로 인해 유럽이 뒤 흔들린 것도 아니요. 어느 법정이 그들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려주지도 않았다. 그들을 위하여 교황의 마음이 의분으로 진노할 일도 없었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에 만족했고 냉담했으며 심지어는 날뛰며 구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 25명의 가련한 남녀 가운데 14명은 끝까지 그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어떤 두려움이나 고난이나 고문이라도 참고 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믿음을 지켰던 것이다. 역사는 그들에 대하여 아무 찬사도 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의 피 흘림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명도 우리와 같이 무가치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영국의 자유를 획득하는데 이바지 한 것이다."
(주: 참 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고자 하였던 침례교도들의 역사는 피 흘림의 발자취였습니다.)
카톨릭의 시작(주 후 30년-600년) 복음에 대한 박해는 점점 더 심하여 져 갔습니다. 이 때까지의 이교도들의 박해는 어떤 공식적인 법령에 의한 박해는 아니었었습니다.
주 후 303년 2월 24일에 갈레리우스 황제는 공식적인 법령에 의해 더욱 더 가혹한 박해의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복음의 성장을 말살하려고 시도한 황제의 칙령은 결국 성공하지를 못하고, 그는 8년 만에, 즉 주 후 311년에 자신의 칙령을 번복하고 오히려 기독교를 믿어도 된다는 관용의 칙령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도 시대부터 그 때까지 있어서 복음에 대한 최초의 우호적인 법령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주 후 313년에 콘스탄틴 새 황제는 무지막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하는 기독교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감지하고는 기독교를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늘에서 화염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 위에 불길로 "이로써 네가 정복하라"는 글이 쓰인 환상을 보게 되고,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믿어 왔던 로마의 이교 종교들을 버리고 영적인 능력이 큰 기독교를 국가 권력에 결부시키면 쉽게 세상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매우 현실적이었으며 통찰력이 뛰어 났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기독교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의 세상의 대표적 종교가 됩니다. 그 황제 아래서 기독교는 결국 로마 제국과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 후 313년에 교회의 대표자들을 초청하는 전 종교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물론 모두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많은 교회들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권제도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서 추방되었고,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들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교권 제도는 우주적인(Catholic) 교회를 주장하는 오늘날의 카톨릭으로 발전하게 될 모습으로 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황제가 그 종교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그 소집에 응하지 않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세상정부와 혼인하는 것을 비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였고,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주: 바로 그들의 믿음이 오늘날의 침례교도들의 믿음과 같으며 그 당시뿐만 아니라 역사상 언제든지 침례교회는 교권제도를 반대하며 그들과 연합하는 것을 원치 않았었고, 않합니다.)
교권제도를 창설한 콘스탄틴 황제는 정작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래에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교권제도에 동참한 당시의 잘못된 교회들의 가르침인 “침례에 의한 구원”에 대한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내가 침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면, 침례를 받은 후에 범하게 될 나의 죄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자신의 제국에는 받아 드렸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죽기 바로 전에 침례를 받아야 자기의 모든 죄가 한 번에 다 씻어 질 것이라 생각하고는, 죽기 직전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주: 이와같은 잘못된 가르침은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줍니다. 침례는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종의 의미입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제국의 이방종교들을 추방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 때문에 로마 원로원과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겨국엔 그들의 반대로 로마 황제의 거처를 로마에서 비잔틴(터어키의 콘스탄틴 노플)으로 옮기게 되었고, 로마제국에 두개의 수도가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동.서간 서로 간 대항하다가 수 세기 후에 분열된 카톨릭은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가 되어 로마와 비잔틴이 각각의 중심지가 됩니다.
교권제도가 형성되어 교회와 국가가 결혼하기 전에는 박해가 주로 유대교와 이교도들에 의해 이루어졌었으나, 콘스탄틴 후부터는 소위 교회라는 이름으로 가짜교회가 진리를 쫓는 그리스도인들이나 진짜 교회들을 오히려 이단이라 하며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 이것이 정치입니다. 정치는 힘있는자의 역사며 역사는 그들의 기록입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국가 종교(국교)라는 새로운 이념에 협조하여 하나가 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국가종교는 신약성경의 교리를 위반한 가르침이라 그것을 따르지 않은 신앙적 양심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강제로 복종시키기 위하여 강요와 회유와 핍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침에 충실하였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혹하고 참담한 핍박과 박해의 시작이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이 조직한 교권제도는 오늘날의 카톨릭(천주교)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세상정부와 결탁된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약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법이나 가르침을 수정, 보완 또는 삭제하여 새로운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이 되려고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교회가 입법기관이 되어 최초로 신약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법을 만든것이 유아침례입니다. 이 새로운 법의 발효에 따라 신약성경의 두 가지 법(교리)이 폐지되게 됩니다.
즉 믿는 자의 침례 와 자유의사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며 자발적인 믿음으로 받는 침례의 교리입니다. 이 새로운 법(교리)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교권제도의 교회들에 많은 가짜 신자들이 넘쳐 나게 하였습니다.
(주: 그 교권제도의 교회는 회개하지 않은, 중생하지 않은, 거듭나지 않은, 구원받지 않은, 무늬만 신자들, 생화가 아닌 조화의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의 힘에 의하여 세상적으로 정치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신령한 하나님의 집인 “교회”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세속적인 마귀 사탄의 권세의 손아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충실하고 영적 통찰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법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유아침례 받는 것을 거절하였고, 비 성경적인 교권제도의 교회에 참가하는 것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들의 세상과 짝한 교회에 대한 거절과 거부는 자신들의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회원으로 들어오기를 원할 때는 어릴 때 받았던 유아침례는 유효하지 않음으로, 반드시 구원에 대한 자신의 개인의 믿음의 체험 간증과 재 침례를 그들이 교회에서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 종교주의자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고 그들의 국가와 교권제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는 교권제도의 교회에 빼앗기게 되었고, 대신에 "이단"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챤"이라는 이름 대신에 다른 이름들로 불리곤 하였는데, 대부분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서 조롱하는 의미로 "몬타누스파" "털투리안 파" "노비티안파" "피터린파" 또는 "재침례파"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인쇄술과 종이가 발달 되지 않아 성경이 대량으로 인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쉽게 성경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짐승들의 가죽 두루마리나 파피루스(갈대 같은 식물 껍질)에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분량이 방대하여 쉽게 운반을 할 수 ㅇ없었습니다. 당시에 온 세상에 성경 전권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은 30부 이상이 되지 못하였으며, 대체로 복음서나 서신서들의 쪽 복음서나 몇 권씩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었던 성경만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 초기에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모두 충실하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보아온 신약성경의 믿음에 충실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모국어로 영어 사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 에베소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최초로 "크리스챤"이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딴 이름이었습니다. (사도행전11:26) 아마도 지금과는 달리 이 말도 당시에는 별로 좋은 뜻으로 불렸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이단 종교집단 추종자라는 조롱 섞인 의미로 붙였던 것 같습니다.
“크리스챤”이라는 조롱으로 불리던 이름이 점점 세상 사람들보다 품행과 언어에 있어 다르고 아주 좋은 모범을 보이니, “크리스챤”이라는 지칭이 사람들에게 좋은 뜻을 지닌 이름으로 각인이 되어 “신뢰할 만 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작은 예수" "예수의 제자"라는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마귀 사탄은 빼앗아 갑니다. 오늘날 세상은 대부분이 기독교나 그리스도교 하면 카톨릭의 대명사로 알고 있습니다. 뉴스나 매스컴도 그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정작 크리스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개신교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암흑시대 시작 주후 426년 곧 유아침례가 로마 법령으로 제정된지 10년 만에 소위 암흑시대라는 무시무시한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10세기 이상 동안 충실한 크리스챤들의 발자취는 그들 자신이 흘린 피의 발자취가 되어 갔습니다.
교황제도가 시작된 것은 암흑시대 초기인 주 후 440년에서 461년에 재위한 레오 2세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이전보다 훨씬 전입니다. 주 후 296년에서 304년 까지 로마에 있었던 감독에게 처음으로 적용 되었고, 384년에서 398년에 이르기 까지 로마의 감독으로 있었던 리시우스가 공식적으로 이를 채택하였고, 레오 2세가 정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707년 부터는 보편적인 것이 되었고, 그리고 수세기 후에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교황권 독점이 선언되었습니다.
세계역사상 암흑시대라 알려진 무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피비린내나는 말할 수 없는 기나긴 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도화된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한 박해는 가혹하고 잔악하였으며 지속적인 것으로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고의적이고 조직적으로 충실한 크리스챤들을 잔멸하려고, 이단을 박멸한다고 끝까지 쫓아가 다른 나라나 산악과 동굴로 피난을 떠난 그들을 참혹하게 파문하여 살해하곤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피 흘린 발자취 뿐이었습니다. 특히 영국, 웰일즈, 아프리카 북부, 알메니아및 불가리아에서 더욱 심하였습니다.
교회들이 하나가 되자는 에큐메니칼(기독교 연합회) 운동을 주장하는 종교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모든 종교회의는 표면상으로 사도행전 15장 1절에 소개된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던 종교회의를 모방하고 표방합니다. 같은 이름과 같은 목적으로 그 이름을 모방하지만 결코 사도행전15:1에 소개된 종교회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모임이었습니다.
첫번째 종교회의가 주후 325년 "니케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소개 된 것처럼 교회지도자들에 의하여 소집된 것이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다것이 큰 차이입니다. 그 종교회의에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주: 니케야 신조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채택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카톨릭 교회를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아리우스 교리는 현대의 여호와의 증인 들이 믿는 교리와 비슷합니다. 성경을 보면 당연히 삼위일체의 교리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을 세상의 법으로 정하면서 믿지 않는 자들을 강제로 믿게 하며 이단으로 파문하여 화형을 시키는 권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카톨릭을 공고히 하려는 정책적인 계획이었습니다.
다움 지식에 소개된 세계사에서 니케야 종교회의에 대한 글입니다. "최초의 종교회의: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였다.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공의회에서는 2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고,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신경'을 기초로 '동질(同質)'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케사리아의 에우세비오신경이 채택되어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니케아신경'이 공포되었다.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이 밖에도 부활제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서품(敍品)의 장애,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네번째 종교회의가 주 후451년에 마린 황제가 소집하여 500-600여명의 감독들과 최초의 각 도시를 대표하는 메트로 폴리탄 감독장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마리아를 숭배하는 성모마리아 숭배의 교리가 공표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예배한다는 것으로 그 당시에 심각하게 많은 사람들이 반대 하였으나, 결국 주도권을 잡은 카톨릭을 따르는 지도자들의 뜻대로 영구적인 카톨릭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주: 마리아를 본받는 믿음과 예배를 드리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과 우상과의 차이입니다.)
사도시대 부터 초기 500년 동안에 신약교회에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의 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7가지 주요 변화가 있었습니다.
2.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의 방법을 가르침에서, 침례에 의한 형식적인 종교의식에 의한 구원의 방법을 가르침의 변화.
3. 믿는 자의 자발적인 신앙고백 하에서만 주어지던 침례에서, 의무적이고 법적으로 강요에 의해 받아야만 하는 침례예식으로의 변화.
4. 하나님께 속해 신령해야 할 교회가 콘스탄틴 황제의 주도 하에 세속 세상 정부인 로마에 종속이 되어, 세속화가 되어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그리스도 대신에 로마 정부 황제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 가는 변화.
(주: 후에는 카톨릭이 세속 정부를 접수하게 되어, 교황이 전권을 잡게 됩니다. 세상 정부와 카톨릭과의 권력의 투쟁은 엎치락 뒤치락 계속 되었습니다. 세상과 결혼한 세속적인 카톨릭 교회의 관계는 갱단 두목인 남편이 가정의 권력을 잡느냐 아니면 조폭인 아내가 가정의 권력을 잡느냐의 차이였을 뿐입니다.)
5. 유아침례의 법령이 공표되어 유아침례가 선택의 여지 없이 법적으로 의무화가 된 변화.
6. 충성된 신약교회의 가르침을 쫓았던 크리스챤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빼앗기고,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빼앗은 카톨릭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의해, 크리스챤은 "이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은 변화.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추방되거나 도피하여 시골이나 산악 지역이나 동굴 등에서 믿음을 고수하고 계승하기 위해 도피 생활을 해야 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변화.
7. 암흑시대 초기 단계로의 진입하는 변화.
(주: 암흑시대에 대한 평가도 보는 역사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곤 합니다.
1. 신정정치의 신본주의(카톨릭, 교회연합회): "암흑시대란 인본주의 학자들이 지칭하는 것이다. 역사상 이때처럼 하나님 위주의 신본주의가 된 적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 시대를 결코 암흑시대라 지칭하면 안 된다."
신본주의 사상은 극우 노선입니다. 신본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들이 됩니다. 중세기 역사가 증명하였습니다.
2. 무신론자의 인본주의(무신론 주의): "인간존중과 인문학이 말살되었고, 과학과 기술이 신본주의 문화 때문에 발달치 못하였다. 당연히 중세기는 암흑시대이다."
인본주의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극좌 노선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는 인본주의 사상은 긍정적면이 많이 있으나,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은 이미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으로 당시의 참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으나, 카톨릭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성경의 가르침을 변경하여, 신본주의를 표방하며 교권주의를 유지하면서, 신본주의에 반발하여 인본주의 사상을 태동 시킨 결과를 낳게 만든 것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은 사람을 존중하는 이념으로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고 호감을 가게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신론사상이고, 이 사상적 뿌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마귀사탄으로부터 온 사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첫댓글 침례교도만이 참 크리스쳔이다! 라는 주장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사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