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인생 후반에 베푸시는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 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게 하십니다.
저희에게 맡겨주신 모든 일이 생명의 사역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진리를 보고 기뻐 춤추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본문 주해)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묻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첫 번째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였고, 두 번째 비유는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였다.
오늘 본문은 그 세 번째 비유로 혼인잔치 비유이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는데, 임금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그 아들은 예수님 자신이다. 또 종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이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청함을 받은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인다. 임금을 무시한 이들은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처럼 진멸의 대상이 된다.
임금이 초청한 잔치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잔치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가기가 싫다고 거절한 자들이 율법의 의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백성의 장로 들이었다. 이들은 선지자들의 초청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의 초청도 거절했다.
그러므로 임금은 이러한 자들은 진멸하고, 이제 길거리에 가서 아무나 초청하여 오라고 한다.
종들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려온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14:21)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임금의 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감히 임금의 잔치에 올 만한 자들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처음 청함을 받은 자들이 거절함으로 장애인과 세리와 창녀와 이방인들까지 이 잔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때, 임금이 손님을 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발견한다. 예복 입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자, 임금은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던지라고 한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슬피 울고 이를 간다’는 표현은 종말론적 심판을 뜻한다.
그런데 그는 왜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
집에 가서 적당한 옷을 갈아입을 겨를 없이 길을 가다가 초청을 받았으니 예복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10절에 보면 초청된 자는 ‘악한 자나 선한 자’(하나님 앞에서는 다 악한 자)가 뒤섞여 있었다. 그들이 잔치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은 오직 임금이 이미 준비해 놓은 예복만 입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한 자는 그 예복이 싫은 것이다.
자신의 율법적인 의를 주장하면서 혹은 양심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너희들-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과 격이 다르다’고 여기는 자는 잔치에 오기는 했지만 영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그는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 자신의 우월함이 드러나지 않기에 그 일방적인 은혜를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내려 주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새번역)
(나의 묵상)
임금의 초청은 받아들였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일에 매여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과는 달리 일단 초청에는 임했다.
교회에는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임금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복을 입었는데, 그는 왜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
임금의 집에 초청되어 와서 보니 사람들이 득실득실한데 보니 다 초라하고 별볼일없는 자들 같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14:21)
그 없어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예복을 입고 좋아라 하며 잔치를 기다리는 그 모습이 이 사람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것이다.
‘저런 자들과 함께 하는 잔치자리라니! 내게는 저런 사람들이 입는 예복 따위는 필요없어. 지금 입고 있는 내 옷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가!’
그러나 그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임금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이 입고 온 옷-외모나 자격 또는 행실로 쌓아놓은 자기의-이 아니라, 바로 임금이 준비해 놓은 예복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분명 천국비유임을 밝히셨다.
그러니 천국은 임금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 예복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다.
원시복음에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가죽옷(창3:21)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예표한다.
그것은 창세전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주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이다.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그리고 세리나 창녀 들은 바로 이 옷이 감지덕지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로 충만한 자는 이 옷이 싫은 것이다.
교회의 모든 일에 열심을 내고, 대체로 목회자와 한마음이 되어 움직이는 내가, 열심없는 사람들, 교회일에 부정적인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받는다는 것은 기분이 별로이다. 그러니 나는 그들과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의가 넘치는 자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 입은 그 옷이 입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 옷을 입지 않음으로 나 자신만을 드러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몰랐다. 복음을 몰랐으니 알 리가 없다.
나는 복음을 거부하면서도 천국을 꿈꾼 셈이니 ‘무지 충만’이다.
복음을 알고 난 후 임금의 잔치에는 그 어떤 자기의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나는 임금의 잔치에 참석할 자격도 없는 죄인일 뿐인데 그저 불러주심에 감사하며, 그 입혀주신 옷을 감격으로 받아 입고 잔치 자리에 나아갈 뿐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14절)는 말씀이 오늘의 결론이다.
새번역으로 보면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 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 사람’(11절)으로 나오지만, 이 시대에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많다는 뜻이다.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옷이다.
내가 이 예복을 입게 되다니!
이 예복은 나의 행실로 만들 수 있는 옷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심으로 입혀주신 옷이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
복음을 알고 받아들인 자는 자기의와 자기 사랑이라는 허상에서 깨어나, 오히려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안다. 그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기에 주님 주시는 그 의의 옷으로만 만족한 자들인 것이다.
주님께서 입혀 주신 이 옷을 입은 후로 언제나 십자가로 살기를 기도하고 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십자가 보혈만이 이 옷을 정결하게 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십자가에 나의 죄악 된 본성-자존심, 자기의, 자기 사랑-을 못 박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 입혀주신 세마포를 어린 양의 피에 부지런히 빠는 자가 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4)
(묵상 기도)
주님,
제 옷장에는 옷이 가득합니다.
겉모습을 꾸며 주는 이것들은 잠시 만족을 주지만 이내 시들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입혀주신 빛나는 의의 옷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의 본성 때문에 더럽혀진 옷을 날마다 주님의 보혈에 빨게 되니
언제나 새롭고 빛나는 옷이 됩니다.
이 옷을 입고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