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남한 역사에서 배제되고, 북한에서도 지워져
역사적 미아가 된 인물입니다.
친일파 경찰 노덕술과의 일화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죠
320억원의 현상금에도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의 공포의 대상이던 그였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광복 후 특히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남로당 파업 연류와 관련해 체포된 김원봉은 화장실에서 바지도 못올리고 끌려가면서 따귀를 맞고 며칠동안 고문을 받게됩니다.
일제시대도 아닌 해방 조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던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친일파 출신 경찰 노덕술에게 맞으면서 고문을 받는 장면이 연출된겁니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김원봉은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같은 해 7월 19일에는 김원봉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움직이던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평소 여운형을 따르던 김원봉에게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좌우합작운동에 헌신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김원봉은 친일파와 우익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리게 되고, 계속해서 거처를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신변의 위협이 계속되자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월북하기에 이릅니다.
월북 후 김원봉은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 등의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합니다.
그러나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를 통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하는데.
그러던 1958년 11월, 김일성이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했던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제거할 때 김원봉 역시 이들과 함께 숙청 당하고 맙니다.
김원봉이 말년에 북한으로 간것으로 인해 말이 많은데
이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의견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한은 이미 친일파들 소굴이었고, 김원봉에 대한 백색테러 위협에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이 단독 선거를 통해 남한에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의도가 너무나 명확해졌고
, 이것은 거스를 수없는 대세가 되었죠.
김원봉은 더 이상 남한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입지가 없어진것입니다.
김원봉은 결코 마르크스 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고
김일성의 한국전쟁의 계획을 반대하곤 했습니다.
백범 김구가 그의 주례를 서줬고 많은 민족주의 독립가들도 그를 따랐습니다.
약산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이념은 상관 없고 힘을 모두 모으자는 주의였지 절대 공산 주의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김원봉은 북한에 갔단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론 이번 기회에 다시 재조명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첫댓글 시발... 진짜... 이승만 쓰레기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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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진짜 우리나라 역사상 몇손가락 안에 드는 간지남인듯 ㅋㅋ 좆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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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시발.. 김원봉 개불상하네
이승만 빠는 새끼들 제발 자살좀
암살 좃꿀잼 마지막에 속이 다 시원함...
한국 체고 테러리스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거보면 정의는 죽었다 걍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게 답
역시 경상도인가...
김원봉 지금 독립운동가 아님
인정못받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