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마태 23,1-12)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입니다.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행동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많은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어떤이는“4박5일 내내 평상복 흰 수단, 20여 년째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와 검정 구두 차림에 낡은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며 소탈한 모습,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큰 의자를 한사코 사양하며 일반인들과 마주 서 있는 겸손한 모습, ‘파파 프란치스코’를 부르는 소리에 언제 어디서든 멈춰서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의 행보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해“일어나 비추어”(이사60,1)나가는 새로운 힘을 싣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크고 안전한 방탄 리무진을 타지 않으시고 작은 승용차를 타시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당신을 내어주는 여정을 이어가셨습니다. “교회는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하시며 노란 리본을 달으셨던 교황님,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닮은 모습을 기억합니다. 우리 역사관에 교황님 의자가 있습니다. 준비된 근엄한 의자와 실제로 앉으셨던 의자가 아주 대비됩니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약점은 자신들이 스스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한 것입니다. 남들이 그렇게 대우하기도 했지만, 본인들이 그렇게 자처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참된 어른, 우주만물을 내신 주 하느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남들이 자기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했는데……교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스스로 선생이 되려는 것이 병입니다. 윗자리, 높은 자리, 인사받기, 스승이라 불리기 등은 명예욕에 불과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꼭 수도자에게만 해당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약속한 서원이 있습니다. 그에충실해야 합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이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감당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 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그래서 성찰합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오랜만에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들 집에 얼마간 머물다 보니 당신이 찬밥 신세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생고생하며 아들 교육하고 장가들여 놓았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런 서운함을 지니지 말고 빨리 돌아가자 마음먹곤 메모 한 장을 남겨 놓았답니다.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집안에서 누가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가 보니까 첫 번째가 손주 녀석, 두 번째가 며느리였고 세 번째가 아들, 그리고 네 번째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였고요. 다섯 번째가 집 안에 있는, 고양이였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섯 번째인 겁니다. 그래서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모를 비롯하여 어르신을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데리고 살아야 할 아이들은 모시고 살고, 모시고 살아야 할 어른은 데리고 살아갑니다. 자식을 하늘같이 떠받치고 사니까 기본이 서지 않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자녀들이 모심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고생시키려면 왜 낳았냐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시대가 변하긴 변한 모양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몇 번일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출처: 신을 벗어라 원문보기▶ 글쓴이 : rapha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