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6월의 따뜻한 날이었다.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사 녹음 스튜디오에 나타난 그는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있었다. 장갑을 낀 손에 들려 있는 악보가방, 생수 2병, 타월 한 무더기, 알약병 5개가 그의 소지품이었다. 그리고 그를 구성하는 이미지에서 절대 빠져선 안 되는 키작은 접이의자. 그는 마치 낚시의자와도 같은 14인치 높이의 의자를 꺼내놓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모습이었을 터. 스튜디오 직원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그날 녹음실에서 연주된 곡은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이 레코딩에는 ‘전설의 탄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를 둘러싼 이런 식의 일화는 한두 개가 아니다. 2년 뒤 뉴욕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닉과 협연하던 날. 그는 따뜻한 물에 거의 한 시간가량 손을 담그고 있다가 연주회 시작 2분 전에야 대기실에 나타났다. 이날의 옷차림도 황당했다. 두터운 외투와 올이 굵은 헐렁한 스웨터. 당황한 번스타인이 “청중 앞에서 이 스웨터를 벗을 건 아니지”라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없이 스웨터를 벗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졌지만 그는 손으로 그것을 쓸어올리지도 않은 채 무대로 나갔다. 그날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는 애지중지하는 ‘난쟁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고, 청중에게서 비스듬히 등을 돌린 자세였다. 그는 느린 악장에 이르자 입을 헤 벌린 채 무대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마지막 악장에선 거의 뒤로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피아노를 쳤다.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1932~82).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일화는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이창실 옮김·동문선)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굴드는 콘서트홀의 ‘청중’을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로서 한창 때였던 64년, 당연히 출연료도 고공행진했을 그 시기에 굴드는 청중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다. 그때부터 그의 음악 활동은 오로지 방송국과 음반사의 스튜디오에서만 이뤄진다.
굴드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였던 피터 F 오스왈드는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한경심 옮김·을유문화사)이라는 평전을 썼다. 거기엔 굴드가 ‘청중’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언급이 등장한다. 굴드는 말했다. “현악기들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때를 기다리며, 지휘자가 까다로운 박자에서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끔찍합니다. 음악회를 쫓아다니는 철면피한 인간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며 신뢰하지도 않고, 친구로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에 대한 오스왈드의 해석은 이렇다. “글렌은 연주회장에 오는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러 오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듣는 장소로서 연주회장은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운명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원했던 피아니스트.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우울증을 앓았으며, 상식을 뛰어넘는 멋대로의 행태를 보여줬던 사람. 그러나 굴드를 다만 그렇게 기행을 일삼은 피아니스트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청중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을 법하다. 그렇다면 굴드는 과연 누굴까.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가 유작으로 남긴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장호연 옮김·마티)는 굴드에 대해 한 단계 높은 조망을 제시한다. 사이드는 굴드를 “좋은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서 작품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청중에 맞서 싸움을 거는 돌발적인 천재”로 얘기한다. “기교면에서 미켈란젤리, 호로비츠, 바렌보임, 폴리니, 아르헤리치와 같은 반열에 놓이”지만, 뛰어난 기교적 연주를 연주회장에서 과시하는 것을 뛰어넘어 “담론의 영역으로 나아간 지식인”이라는 것이 사이드의 평가다. 그리하여 그는 굴드를 “지식인 비르투오소(기교가 뛰어난 연주자)”로 칭한다. 사이드는 그렇게 말년의 저작에서, 그동안 굴드를 향해 던져졌던 수많은 수수께끼와 의문부호에 대해 명징한 답변을 내놓고 떠나갔다.
글: 문학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