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과 김동인의 역사 의식
2014.12.06 (토)
대구 사람이라면 중화요리점 ‘영생덕’의 물만두나 탕수육에 관한 입소문을 한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영생덕’을 비롯해서, ‘복해반점’ ‘군방각’ 등 대구의 종로지역에는 화교, 즉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식당이 모여 있다. 화교 상가가 대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략 1905년 무렵이었다. 많은 부분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일본과 연관되어 진행될 때가 많았다. 중국은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대륙의 상당 부분을 잃고 마침내 중일전쟁에 들어갔는가 하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36년의 기간을 보냈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공통의 경험이 과연 조선과 중국을 깊은 유대감으로 묶어주었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31년 조선에서 100여 명이 넘는 중국인이 학살당한 ‘피의 학살극’이 그 단적인 예이다.
‘만보산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중국 장춘의 북방에 위치한 만보산에서 조선인 소작농과 중국인 농민의 분규가 일본, 중국 경찰의 발포로까지 이어진 사건을 의미한다. 별다른 인명 피해 없이 일단락된 이 사건은 언론의 오보(誤報)로 조선 내부에서 100명의 중국인이 학살당하는 대규모의 반중(反中)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분한 중국인들이 조선인의 주된 이주지역이었던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잔인한 조선인 보복 학살극을 자행한 것이었다. ‘청소’라고 표현된 이 학살극으로 인해 어떤 마을의 경우 100명에 이르는 거주 조선인 전원이 중국인들 손에 몰살당하기도 했다. (사진 김동인)
이 어이없는 학살극의 배후에는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이를 막으려는 중국의 필사적인 저지 노력이 있었다. 가난 때문에 중국으로 이주해간 조선인은 논농사에 뛰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는데다 근면해서 중국인 지주들의 선호를 받았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인이었으므로 그들의 대륙 진출은 일본인의 대륙 진출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과 중국, 그 치열한 신경전 사이에 무력하고, 가난한 조선인 이주민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김동인의 (책 ☜) ‘붉은산’(1933)은 중국 이주 조선인 농민들의 비극적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만주의 한 조선인 마을을 배경으로 가혹한 중국인 지주와 혹사당하는 조선인 소작농 간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만보산 사건’ 직후 발표된 만큼 중국인에 대한 깊은 적개심이 소설 전면을 채우고 있다. 문제는 중국인과 조선인 간 갈등의 핵심이자, 갈등의 원인이었던 일제의 존재를 김동인이 간과한 채 모든 책임을 중국인들에게 미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시기 일본의 작가도 파악하고 있던 그 사실을 왜 식민지 작가 김동인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작가적 역량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는 아니었다.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기생과의 풍류로 대변되는 전통적 조선 세계에 젖어 있던 김동인에게 역사와의 대응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적어도 역사와의 대응이란 미래로 향하려는 사람들의 몫이지,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
출처 / 매일신문[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