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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아래 있는 인간의 마음 (롬3:9-18절)
지구의 남쪽인 남극은 밤이 6개월 동안 계속됩니다. 사계절과 낮과 밤이 분명한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면 아마 한 달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계속되기 때문에 얼마나 빛이 그립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존재하고 있다고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긴 아담으로 인해 인간은 캄캄한 죄악 속에 갇힌 노예 상태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한 줄기 빛을 갈망하고 그 흑암 속에서 해방을 갈구할지라도 스스로는 도저히 어둠을 헤쳐 나올 수 없는 죄악된 실존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었고 결국 인생은 파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간 삶의 의로움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뜻 가운데서 인간은 비로소 의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로움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그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은 더 이상 의롭지 않으며 의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못합니다. 한순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악한 본성은 독버섯처럼 번져서 인간성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천 년을 살아도 그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다 함께 치우쳐 무익한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드는 역사와 문화는 끝없는 미궁을 헤매는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저항과 반항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려 죄악된 행동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죄가 죄인줄 모르고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기가 행하고 있는 죄가 엄청난 죄악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죄악에 빠지게 되고 죄를 깨닫는 순간이 오더라도 더 이상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를 정당화하고 그 죄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인간,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인 것입니다.
*전9: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성경은 미친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미친 마음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진찰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나왔는데 사도 바울이 그 내용을 로마서에 기록하였습니다.
*롬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독사의 독은 독주머니에서 나오지만 입술에, 혀에, 가득한 독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하였으니 모든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 마음을 바꾸라 그리하면 너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1. 고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이 세상에는 고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질병도, 습관도, 환경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고칠 수 없다고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렘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인간의 피부의 색깔을 바꿀 수 없습니다. 동물의 털의 반점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그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참나무가 무엇 속에 있습니까. 조그만 도토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사람의 마음속에 온갖 더러운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땅에 살인이나 전쟁이 없을 때가 있습니까. 몇 년 전의 신문에는 북한이 핵시설을 전면 가동한다는 내용이 머리글자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전쟁은 하나의 증세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증세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악인에 대해 몇 가지 정의를 내립니다.
첫째,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시5: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여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팔레스틴의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그 입구가 크고 넓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열렸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쉽게 들어갔을 만큼 무덤이 굴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덤은 어떤 사망도 쉽게 삼킬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악인의 목구멍을 무덤에 비유한 것입니다. 인간은 입을 통하여 온갖 더러운 것을 토해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혀를 지옥불에 비유한 것입니다.
둘째,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시10:7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시109:17-18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속으로 들어갔나이다.
셋째,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했습니다.
*사59: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피는 생명의 원천, 생명의 좌소를 의미하는데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을 의미합니다. 일 년 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그 죄를 상대방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닭이 실수를 해서 오리의 발을 밟았습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는데 오리가 화를 내면서 다투게 됩니다. 싸우다 보니까 그만 실수를 해서 곁에 있는 거위의 뺨을 때렸습니다. 거위가 화를 내며 오리가 건방지게 나의 뺨을 때리다니 하고는 싸움에 끼어드는데 한바탕 소란을 피우다가 잠자는 고양이를 덮쳐 버렸습니다. 고양이가 염소를 할키고 염소는 말을 들이받았습니다. 순식간에 온 집이 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온통 싸움판입니다. 여러분, 이 전쟁의 문제가 경제문제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쟁의 문제가 정치의 문제 같지만 아닙니다. 전쟁의 문제는 심리학적인 문제입니다. 기분의 문제입니다.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싸우는 사람 하나같이 기분 때문에 싸우고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욕심, 미움, 자존심,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자존심은 더욱 강한 것입니다.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들 괌이나 사이판을 아십니까. 사람들은 그 섬들을 파라다이스라 부릅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천국과 낙원입니다. 천국이라는 영어 ‘heaven’은 신과 천사들이 살고 있는 저 하늘 높은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다면, 낙원이라는 말 ‘paradise’는 불행이나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사람들이 이 섬들을 낙원이라 부르는 이유는 기후뿐만이 아니라 축제도 많기 때문입니다. 왜 그곳에는 축제가 많았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종족하고 저 종족하고 싸우고 이 섬과 저 섬이 싸워 이겼을 때 축제를 하였습니다. 모든 축제가 전쟁에 이겼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파라다이스라 부르면 곤란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백인이 들어가서 노예를 삼고, 일본인이 들어가서 황폐하게 만들고, 미국인이 들어가서 2차 세계대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곳을 최고의 휴양지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지만 실상은 그곳은 무덤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소리 지르고 있는 곳입니다.
중국은 어떻습니까. 거대한 영국의 총구 앞에 홍콩이 항복할 때에 함대를 거느리고 홍콩에 입항한 사람은 쟌 바우링 입니다. 아주 굉장한 백작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홍콩뿐 아니라 중국의 도시들과 섬들을 삼키고 그뿐 아니라 대륙에 아편을 팔도록 강요했습니다. 나아가 버마, 인도까지 아편을 팔았는데 아편이 모자라니까 양귀비를 재배하여 대량으로 아편을 생산했습니다. 인류를 파멸로 보낸 이 유명한 쟌 바우링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유니타리안 교도입니다. 이 이단 사상을 가진 양반이 찬송을 썼습니다. 개역 성경 찬송가 책에 있는데 148장입니다.
‘주가 지신 십자가를 나를 자랑하노라. 성경 중의 모든 말씀 거기 중심 되었네. 온갖 환난 덮쳐와도 십자가의 은혜로 버림 받지 아니하고 평안함을 얻었네.’
얼마나 찬송 내용이 좋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지옥의 파멸로 몰아넣으면서, 또 예수님의 신성은 믿지 않으면서, 이런 찬송을 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일을 하기 위해 그가 마카오를 방문했을 때 바닷가에 아주 오래된 수도원을 보았는데 그 수도원의 모습은 허물어지고 높은 십자가 탑만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 청동 십자가를 보면서 감동을 받아 주가 지신 십자가를 연상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자기 속에는 이기주의, 자기욕심, 자기 독선, 자기 의로 꽉 차있으면서 겉으로는 가장 기독교적인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쟌 바우링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에서 나온 길이 인간의 길입니다. 본문에서 ‘저희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평강을 말해도 평화롭지 못하고 평화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서로에게 평화를 주는 것보다 아픔을 주고 치료를 주는 것보다 상처를 주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평화주의자요, 무저항주의자입니다. 세계가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면 안 됩니다. 간디는 평화의 길을 몰랐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간디를 좋아하지만 간디가 죽자마자 그의 추종자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자리다툼을 하면서 서로를 죽였는데 수만 명? 아니요 수십만 명? 아니요 수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며--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간디는 평화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인간의 마음은 치료로는 불가능하기에 그곳에서 나온 길이, 삶이,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자연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파멸이요 끝없는 고통입니다. 이들에게는 찰나적인 쾌락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기쁨은 없습니다. 이들은 어떤 노력을 할지라도 그 끝은 허무와 괴로움뿐입니다. 끝없는 죄의 길을 가다가 죄에 짓눌려서 결국에는 형편없는 파멸에 이를 뿐입니다. 가장 영화롭게 지음 받은 인간이 가장 처절하게 멸망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라는 것을 통하여 해결책을 찾지만 철학에 빠질수록 허무주의자가 되고 염세주의자가 되어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염세주의 철학자 니이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입니다. 지기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다가 안 되니까. ‘신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자살한 것입니다.
2. 평화의 길은 없느냐?
*미4:1-4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독일의 히틀러가 많은 유대인들을 죽이고 유럽을 공격하여 전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때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주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그때 그 신학자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한마디 말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직후에 나환자들이 많았을 때 그들을 돌보는 일이 교회의 큰 사업이었습니다. 어떤 한 선교사가 그 환자들의 비참한 모습과 그 상처를 싸매고 있는 간호사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선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다가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나는 백만 불을 준다 해도 못해” 간호원이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에 나는 기쁨과 자랑으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인도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의 말입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불쌍한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있기에 도울 수 있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기에 사랑할 수 있고 섬겨야 할 사람이 있기에 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오늘 미가서 성경이 귀한 해답을 줍니다.
1) 첫째: 성전 중심의 신앙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자.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을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2) 둘째: 말씀 중심의 신앙입니다.---그 도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 말씀만이 변화의 능력이요, 구원의 능력이요, 창조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변화되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3) 셋째: 믿고 순종할 때 입니다.---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칼 매닝거 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내린 결론입니다. ‘현대인의 모든 정신적 질병의 치유책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 c.s. 루이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에로스에서 태어나고 스톨게에서 성장하고 필레오에서 성숙하고 아가페에서 완성된다.’그렇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갈 때 나도 살고 너도 삽니다. 그리스도의 피, 어린양의 피에 내가 적셔질 때 거짓된 내 마음이 치료됩니다. 평화는 오직 아가페 사랑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평화의 사도로 세상을 섬기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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