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미사에 참여키 위해 성당 문을 열었다. 검은색 복장의 조문객이 슬픈 침묵을 삼키고,
수십 명의 사제司祭가미사 집전을 위해 제단에 서 있다. 가족들은 한 방울의 눈물이 숭엄한
침묵을 깨뜨릴까 염려스러운 듯 속울음으로 슬픔을 참고 있다.
빙그레 웃고 계신다. 자잘한 꽃무늬 블라우스, 비녀를 꽂은 고인의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성모님의 미소를 닮았다. 영정 사진을 남기기 위한 가식의 웃음이 아니라 평생을 간직하고
사시던 본연의 자애로운 미소다.
97세로 이승의 매듭을 짓고 천국에 드시는 고인의 장례미사가 치러지는 성당, 미사에 참여한
백여 명 신자들의 숨소리조차 멈춘 듯 고요하다. 모친母親의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주교主敎님과
신부님의 모습은 숙연해 보였다. 인생의 소풍을 끝내고 마지막 가는 죽음의 길에 아드님들이
드리는 미사가 흐뭇하신지 고인은 잔잔한 미소를 거두지 않으셨다.
고인故人의 삶은 오로지 기도였을 것이다. 고인은 물론 칠남매의 자손들이 모두 세례를 받을
만큼 신심이 두터운 신자信者였다. 아드님 두 분을 하느님께 바쳐 사제가 되셨으니 어머니의
기도가 얼마나 신실信實했는지 짐작이 간다. 사제司祭가 된 아드님들이 세상의 온갖 유혹이나
물욕을 끊고 인내하며 하느님의 대리자로 사목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눈물겹도록
절실한 기도를 하셨을 것이다.
수도자를 자녀로 둔 부모님의 일상은 늘 살얼음판이오, 자신의 행복과 영화는 버려야 한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신자들의 눈총의 대상이어서 사제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사셨을 것이다.
사제와 가족의 힘듦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클지도 모른다. 고인은 그토록 힘들게
사시면서도 늘 손에 묵주를 쥔 채 다정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고인의 삶을 지켜보신 본당 신부님은 “아녜스 자매님은 늘 주는 분, 배려하는 분,
겸손한 분, 청빈한 삶을 사신 분이지요. 아마도 자매님을 아는 분 중에 무엇 하나라도
자매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 을 거예요.” 라고 하시며 고인의 삶을 높이 평했다.
나와 고인과는 사돈 관계이다. 그분의 따님이 나의 아랫동서이다. 사돈이란 어렵고 불편한
관계나 고인은 내 어머니처럼 인자하시고 편한 분이셨다. 내가 큰아이를 낳았을 때다.
귀하게 구하셨다는 산모용 미역을 들고 집으로 찾아오셔서 손을 잡아주시며 잘 먹고
건강하라고 기도를 해주셨다. 기쁜 일, 슬픈 일, 궂은일을 당한 신자를 찾아다니며 도와주고
위로하는 일이 그분의 일상이었다.
슬픔을 감추고 담담하게 미사 집전을 하시는 주교님은 선한 성자聖者의 모습이었다.
세속과 가족의 인연을 멀리하고 오직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과 정의를 몸소 실행하시는 게
그분의 소명이었으니 모친의 선종鮮終은 남다르셨을 것이다.
사제들은 세속적인 부모와 형제간의 고리를 끊으시고, 오직 영적인 기도로 사랑을 전할 뿐,
보고 싶어도, 하고 싶은 말도 참아야 했으리라. 고인도 사제이신 아드님들이 하느님의 아들로,
신자들의 아버지로 존경받을 수 있도록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겨운 기도를 하셨을 것이다.
담담하게 미사를 집전하시지만, 세속의 자식으로서 다하지 못한 죄송함 때문에 주교님의
가슴 깊은 곳에는 눈물샘이 생겼을 것이다.
숱하게 장례식에 참여했지만 죽음이 이토록 성스러운 의식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주교와 사제이신 아드님의 미사 집전, 수십 명 사제의 배웅, 가족과 신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떠나시는 고인의 마지막이 슬프면서도 부러웠다. 행복한 죽음을 지켜보는 편안한 마음,
어떤 가장 좋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장례식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꾸 되뇌었다.
고인이야말로 요즘 노인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웰다잉well dying의 본보기였다.
생전에 하느님의 소명대로 사시다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당신의 간호를 맡았던 간병인들의
손을 꼭 잡고 감사 인사를 하실 정도로 삶을 잘 정리하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으셨다.
품위를 잃지 않고, 존엄하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행복한 죽음을 맞는 게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 미처 몰랐었다. 촛불 행렬을 끝으로 성가대의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침묵을 깼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에서 -
천상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고인을 위해 부르는 마지막 성가처럼, 고인은 아름다운
삶을 사셨으니 하느님 앞에서 ‘세상은 아름다웠노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 공경과 이웃사랑이었으니 신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죽음을
맞으신 고인이 편안히 천상에 오르시도록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누구나 죽음은 내 것이 아니라고,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니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좀 더 베풀 걸, 좀 더 참을 걸, 좀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걸...’ 죽음을 앞둔 이들이 가장
후회하는 말이란다. 늦었지만 후회를 줄이고 행복한 죽음을 맞기 위한 삶을 준비해야겠다.
다 버리고 떠나야 하는 죽음을 늘 기억하고 산다면 악한 일도 멈칫하고, 권세와 명예도
욕심내지 않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선택이 쉽지 않을까?
이제 성경 말씀을 좌우명으로 새기며 남은 날을 살도록 마음을 다진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되니라."
출처: 2021 한국수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