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정토종 (홍원염불회) 원문보기 글쓴이: 淨傳
7. 범부론
용수보살은 이미 본원칭명이 이행도라고 설명하였고, 천친보살은 본원칭명이 진실한 공덕이며, 여실한 수행과 상응한다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정토법문의 쉽고도 수승하고, 수승하면서도 쉬운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쉬움”이기 때문에 범부를 섭취(攝取)할 수 있고, “수승함”이기 때문에 성불하게 할 수 있다. 이로써 “범부가 성불”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용수보살이든 천친보살이든 누구도 명확하게 “범부가 성불한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한 적은 없다. 반대로, 《이행품》에서는 일반적인 자력 수행의 관념에 수순하기 위해 범부의 “비겁하고 하열함” “큰마음이 없음”을 꾸짖고 있다. 《왕생론》에서는 “오문행”이 아미타불의 명호가 진실한 공덕상이며, 제대보살조차 그 밖을 벗어날 수 없다고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보살들은 사마타와 비파사나의 광약수행(廣略修行)을 통해 유연심을 성취한다”, “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 법문에 수순하여,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고 자재하게 성취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오념문의 행을 닦아 자리이타하여, 빠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고 말하여, 그 수행의 기준을 매우 높게 설정하고 있다. 게다가 용수보살과 천친보살 두 분 모두 성인 지위의 대보살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궁극적으로 경론의 요지를 설파하여 범부 왕생의 지름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면, 정토법문이 본래 믿기 어려운 법인 데다가 범부는 본래부터 스스로 비열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반드시 의심을 품고 스스로 퇴굴심을 내고 말 것이다. “비록 이행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상당한 수행력을 갖춘 보살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범부의 몫은 없을 것이다. 설령 범부의 몫이 있다 해도 상품의 복덕과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나 해당하지, 하품의 죄를 지은 사람의 몫은 없을 것이다. 설령 죄인의 몫이 있다 해도 평소에 참회한 근기에게만 해당하지, 임종하는 자의 몫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관경》의 하품하생을 “별시의(別時意)”로 해석한 것이 바로 정토경론에 대한 의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담란대사께서는 우리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왕생론》을 주석할 때, 다양한 논리를 통해 “범부의 왕생”과 “범부의 성불”이라는 취지를 자세히 증명하고 있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논주의 회향은 범부와 함께 하기 위함
《왕생론》에서는 말하길:
제가 논문을 짓고 게송을 설하여
아미타불을 뵙길 바라오니,
널리 모든 중생과 함께
안락국테 왕생할지어다.
《왕생론주》에서 말하길:
이 네 구절은 논주의 회향문이다.
“회향”이란, 자신의 공덕을 돌려 널리 중생들에게 베풀어, 다 함께 아미타여래를 뵙고 안락국에 왕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어서 담란대사께서 스스로 문답을 설정하였다:
묻기를: 천친보살이 “회향장(迴向章)”에서 말하기를 “널리 모든 중생과 함께 안락국에 왕생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중생과 함께라는 것인가?
답하기를: 왕사성에서 설한 《무량수경》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방세계의 항하사와 같이 많은 제불여래께서 모두 함께 무량수불의 불가사의한 위신공덕을 찬탄하시느니라. 모든 중생이 그 명호를 듣고 신심 내어 기뻐하며, 내지 한 번만이라도 염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하여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면, 즉시 왕생하여 불퇴전에 머물게 되리라. 다만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이는 제외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 경문에 따르면, 일체 외범부인(外凡夫人)이 모두 왕생할 수 있다.
또한, 《관무량수경》에서는 구품왕생을 언급하며, 그중 하품하생에 대해 설명하기를……이 경문을 증거로, 하품의 범부라 할지라도 정법만 비방하지 않으면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모두 왕생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대경》과 《관경》을 인용하여 모든 범부는 정법만 비방하지 않으면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모두 왕생할 수 있으므로, 모두 천친보살이 함께 회향하는 대상이 된다. 정법을 비방한 자가 과연 왕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하권의 “여래의 삼업 공덕을 관찰함”에서 여전히 설명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토문에서의 회향의 의미를 특히 주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생론주》에서는 회향에 대해 먼저 일반적인 의미로 “자신의 공덕을 돌려 널리 중생에게 베풀어, 함께 안락국에 왕생하고자 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어서 인용된 《대경》의 제17원과 제18원 성취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는 아미타불이 그 명호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중생들이 왕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천친보살이 오문행을 닦아서 얻은 공덕도 결국 아미타불의 명호에서 나온 것이고, 이른바 “자신의 공덕을 돌려 널리 중생에게 베푼다”는 것도 단지 자신이 얻은 이 명호의 공덕을 여러 사람을 거쳐 중생들에게 소개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그 공덕을 얻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교방편회향(巧方便迴向)”이라 불리며, “이행도”라는 이름을 얻었고, 정토문에서 “원생심의 보리심”이 되는 것이며, 하열한 범부가 높은 지위의 보살들과 함께 “회향”을 닦을 수 있고, 함께 “보리심”을 발할 수 있으며, 함께 안락국에 태어날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 아미타불의 “교방편회향” 덕분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범부는 회향행을 닦을 수 없고, 보리심을 발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의 회향도 근본 없는 물이 되어버리고, 제불의 칭찬도 무익한 헛된 말이 될 것이며, “무량수불의 위신공덕” 또한 헛되이 시설된 것이 되어버리고, 범부가 칭명하여 왕생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해진다.
이 정토문 회향의 의미에 대해 후대의 선도대사가 말하기를:
1. 스스로 믿고 남도 믿도록 가르치며, 대비심으로 전하고 널리 교화한다.
2. 원컨대 이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베푸나니,
함께 보리심을 발하여 안락국에 왕생할지어다.
(2) 정의삼경은 범부를 섭취하기 위함
《왕생론》에서 말하길:
저는 수다라의 진실한 공덕상에 의거한다.
《왕생론주》에서는 의거하는 “수다라”가 바로 정토종의 정의삼경(正依三經)임을 밝히면서, 자세하개 말하길:
“진실한 공덕상”에는 두 가지 공덕이 있다.
첫째, 유루의 마음(有漏心)에서 생겨나 법성(法性)에 수순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범부 인천이 지은 모든 선과 인천의 과보는 원인이든 과보든 모두 전도(顚倒)되고 모두 허위(虛僞)이므로 “진실하지 않은 공덕(不實功德)”이라고 부른다.
둘째, 보살의 지혜청정업(菩薩智慧淸淨業)으로 성취된 불사의 장엄(莊嚴佛事 )은 법성에 의거하여 청정상(淸淨相)에 들어가며, 이 법이 전도되지 않고 허위가 아니므로 “진실한 공덕”이라고 부른다. 왜 전도되지 않은가? 법성에 의거하고 이제(二諦)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왜 허위가 아닌가? 중생을 섭취하여 필경정(畢竟淨)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삼경에서 해석하는 “진실한 공덕”은 바로 “유루, 전도, 허위, 부실”로, 진실한 공덕이 없는 범부들을 섭취하여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정의삼경은 어떻게 범부를 섭취하는가? 아미타불의 명호 때문이다. 《왕생론주》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삼경은) 부처님의 명호를 경전의 본체로 한다.
진실한 공덕을 아미타불의 명호로 압축하여 중생에게 베풀어주기 때문에 범부들을 섭취하여 정토에 왕생하게 할 수 있다.
이 “허위와 진실 두 가지 공덕”의 해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선도대사의 “근기와 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을 떠올리게 한다.
(3) 정토를 장엄한 것은 범부를 안치하기 위함
《왕생론》에서 말하길:
저 세계의 모습을 관찰하니, 삼계의 도를 뛰어넘었네.
《왕생론주》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를:
부처님께서 인지(因地)에서 이 청정공덕의 장엄을 발원하신 이유는, 삼계가 허위상(虛僞相), 윤전상(輪轉相), 무궁상(無窮相)이어서, 마치 자벌레(蚇蠖)가 끝없이 몸을 굽혔다가 펴는 것과 같고, 누에가 고치를 틀어 자기를 얽어매는 것과 같음을 보시고, 중생들이 삼계에 얽매여 전도되고 청정치 못함을 가엾이 여겨 중생들을 허위가 아닌 곳, 윤전하지 않는 곳, 무궁하지 않은 곳, 궁극적인 안락을 얻을 수 있는 크게 청정한 곳에 두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이 청정한 장엄 공덕을 성취한 것이다.
삼계는 오염상(汚染相)과 파괴상(破壞相)이다.
이 삼계는 생사범부가 유전하는 어두운 집이다. 비록 고통과 즐거움이 다를 수 있고, 그들의 수명이 길거나 짧을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삼계는 모두 유루(有漏)이다. 즉, 고통과 즐거움, 복과 재앙이 서로 바뀌며 끝없이 순환하고, 지은 선업과 악업의 원인이 잡다하게 얽혀 있어 그 과보로 접촉(觸)과 감수(受)도 잡다하다. 또한, 네 가지 전도된 견해에 사로잡혀 원인이든 과보든 허위를 답습하고 있다.
이 삼계는 모두 유루의 삿된 도(有漏邪道)에서 생겨났으며, (중생들은) 오랫동안 잠에 들어 꿈을 꾸며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번뇌로 이루어진 범부 역시 저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어, 삼계의 업력이 필경 잡아당겨 계박하지 못한다. 이것이 곧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의 자격을 얻음이니, 이것을 어떻게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정토를 건립하신 것은, 바로 “허위(虛僞), 윤전(輪轉), 무궁(無窮), 전도(顚倒), 부정(不淨), 오염(汚染), 파괴(破壞), 유루(有漏), 사도(邪道), 번뇌(煩惱), 계업(繫業)”의 생사 범부들을 안치하기 위함이고, “번뇌로 이루어진 범부도 저 정토에 왕생할 수 있게 하고” “삼계의 업력이 필경 잡아당겨 계박하지 못하게 하며”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의 자격을 얻게 한 것”이니, “범부의 왕생”과 “범부의 성불”의 뜻을 남김없이 분명하게 드러냈다.
정토를 장엄하여 어떻게 범부를 안치할 수 있는가? 아미타불의 명호 때문이다.
“치(置)”란, 죄를 사면하고 석방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범부의 생사 중죄를 소멸시킬 수 있고, 삼계 업력의 계박을 풀어줄 수 있으므로, 중생을 부처님의 정토에 안치할 수 있다.
《왕생론주》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를:
마치 청정한 마니주를 흐린 물에 넣으면 물이 곧 청정해지듯이, 어떤 사람에게 비록 한량없는 생사의 탁한 죄업(罪濁)이 있더라도, 저 아미타여래의 지극한 무생청정보주명호를 듣고 이 명호를 탁한 마음에 던지면, 염념마다 죄업이 소멸되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즉시 왕생하게 된다.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 중생들이 아미타여래의 지덕(至德)한 명호와 설법의 음성을 들으면, 위와 같은 각종 구업의 계박에서 모두 해탈하여 여래의 집에 들어가 마침내 평등한 구업을 얻게 된다.
저 부처님의 세계가 어떻게 “삼계의 도를 뛰어넘는가”? 이는 아미타불의 명호 때문이다.
“승(勝)”이란, 상대를 능가한다는 뜻으로, 마치 씨름이나 줄다리기하는 것처럼 두 힘이 맞붙어 상대를 이기는 것을 말한다. 《왕생론주》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락세계는 법장보살의 자비로운 정관(正觀)에 의해 생겨났으며, 아미타여래의 신력 본원(神力本願)에 의해 세워졌다.
법장보살의 출세간 선근인 대원업력에 의해 성취되고, 정각을 이룬 아미타불 법왕의 선한 주지력에 의해 섭수된다.
이 삼계는 중생의 잡다하고 오염된 업인(業因)으로 감득된 것이고, 전도된 업과(業果)에 계박된 것이며, 허위를 답습하고 끝없이 순환한다. 만약 정토와 삼계가 서로 접점이 없다면, 여래는 항상 정토에 머물고, 범부는 영원히 윤회 속에 갇혀 여래의 원력이 중생의 업력을 이기지 못하므로, 정토가 삼계를 뛰어넘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아미타여래께서 시방세계에 명호를 두루 베풀고 있는데, 중생들이 그 명호를 듣고 칭념하는 즉시, 삼계와 정토가 칭명하는 중생들에게서 힘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어, 명호라는 아미타불의 대원업력이 중생들의 무시 이래 삼계에서 허망한 업을 짓는 힘을 능가하여 중생을 정토에 왕생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삼계의 도를 뛰어넘는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한 “부처님의 본원력은 만나서 헛되이 지나치는 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관경》에서 “광명은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며, 염불하는 중생을 섭취하여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대경》에서는 “자연스레 이끌린다”라고 하였다. 염불하면 곧 부처님의 본원력을 만나게 되고, 본원력을 만나면 그 본원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모습이 바로 부처님의 광명이 섭취하여 버리지 않는 것이다. 원력에 이끌리고 섭취하여 버리지 않기 때문에 곧 왕생하게 되고, 저 나라에 왕생하기 때문에 삼계의 도를 뛰어넘는 것이다.
“도(道)”란 인과를 의미한다. 《왕생론주》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道)”는 “통함(通)”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인으로 이러한 과보를 얻으며, 이러한 과보는 이러한 원인에 대한 보답이다. 원인을 통하여 과보에 이르고, 과보를 통하여 원인에 보답하기 때문에 “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삼계도(三界道)”란 곧 “삼계의 인과”를 뜻한다.
“과(過)”란,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고가다리가 강을 가로질러 강에 방해받지 않는 것과 같다.
“삼계도를 뛰어넘는다”라는 말은, 여래의 원력이 중생의 업력을 능가하고, 무루의 정도(正道)가 유루의 사도(邪道)를 이기며, 삼계의 인과 도리를 초월해 삼계의 인과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을 “두 가지 모름(二不知)”이라 하고, 이 행을 믿지 않는 것을 “세 가지 불신(三不信)”이라고 한다.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아미타불께서 비록 대자대비와 대원대력으로 중생을 구제하려고 해도 힘을 가할 수 있는 지점이 없어서 왕생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칭명하며 왕생을 발원하고 일심으로 상속한다면, 아미타불의 원력은 그를 섭취하여 버리지 않아 누구라도 왕생할 수 있기 때문에 “만나서 헛되이 지나침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염불하면 곧 삼계의 업도를 뛰어넘고, 일반적인 인과의 도리를 초월한다. 범부들이 이 사실을 믿기 어렵기 때문에, 《왕생론주》 상권 말미에 이를 다루는 질문과 답변이 특별히 마련되었다.
묻기를: 《업도경》에서 말하기를 “업도는 저울과 같아서, 무거운 쪽을 먼저 끌어당긴다.”라고 하였고, 《관무량수경》에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오역과 십악 등 온갖 착하지 못한 업을 지어 마땅히 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이 지나도록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지만, 임명종 시에 선지식을 만나 그에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라고 가르쳐주었다. 이와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십념을 구족하면, 바로 안락정토에 왕생하여 즉시 대승의 정정취에 들어가 필경 퇴전하지 않고, 영원히 삼악도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먼저 끌어당김”의 뜻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또한, 광겁 이래 무수한 번뇌를 일으켜 온갖 악업을 지어 삼계 내에 계박되어 있으면서도 단지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는 삼계를 벗어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업에 계박됨(繫業)”의 뜻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답하기를: 그대는 오역과 십악의 죄업을 지어 삼계에 계박된 것은 무겁고, 하품하생의 사람이 열 번 부른 염불은 가벼워서, 마땅히 죄업에 끌려 먼저 지옥에 떨어지고 삼계에 계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지금 진실한 뜻으로 양자의 경중을 비교해 보겠다. 경중의 (진실한) 뜻은 마음에 있고(在心), 연에 있고(在緣), 결정에 있지(在決定), 시간의 길고 짧음이나 지은 죄업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마음에 있다고 하는가? 저 죄를 지은 사람의 죄업은 자기가 허망하고 전도된 견해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이고, 이 (임종 시의) 십념(열 번 염불)은 선지식으로부터 방편으로 위로를 받고 실상법(實相法)을 들어서 생겨난 것이므로, 하나는 진실하고 하나는 허망한데, 어찌 서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예컨대, 천 년 동안 어두웠던 방에 빛이 잠깐만 비쳐도 금세 밝아지듯이, 어둠이 천 년이나 있었다고 해서 물러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마음에 있음(在心)”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연에 있다고 하는가? 저 죄를 지은 사람의 죄업은 자기가 망상심에 의지하고, 번뇌로 감득한 허망한 과보 중생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이고, 이 (임종 시의) 십념은 위없는 신심에 의지하고, 아미타여래의 방편장엄진실청정무량공덕의 명호(方便莊嚴眞實淸淨無量功德名號)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아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졌으나, “멸제약고(滅除藥鼓)”의 소리를 듣는 즉시 화살이 뽑히고 독이 제거된다. 그런데 어찌 “저 독화살이 깊이 박히고 독이 강해서 북소리를 들어도 화살이 뽑히지 않고 독이 제거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연에 있음(在緣)”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결정에 있다고 하는가? 저 죄를 지은 사람의 죄업은 뒤가 있는 마음(有後心), 틈새가 있는 마음(有間心)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이고, 이 (임종 시의) 십념은 뒤가 없는 마음(無後心), 틈새가 없는 마음(無間心)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것을 “결정에 있음(在決定)”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 가지 뜻을 비교해 보면, (임종 시의) 십념이 (오역과 십악의 죄업보다) 더 무겁기 때문에, 무거운 쪽을 먼저 끌어당겨 삼유(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관경》과 《업도경》은 모순되지 않고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제기된 질문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지은 기간이 길고 많으며, 광겁 이래 무수한 번뇌를 일으켜 온갖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히 무겁다고 생각한다. 반면, 염불은 기간이 짧고 적어서, 심지어 임종 시에 겨우 열 번 염불한 것에 불과하므로 당연히 가볍다고 여긴다. 이에 대해 담란대사는 먼저 이를 부정하면서 “경중의 뜻은 마음에 있고, 연에 있고, 결정에 있지, 시간의 길고 짦음이나 지은 죄업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올바른 이치를 자세히 밝히며 유명한 “삼재석(三在釋)”을 제시하였다.
모든 법은 마음이 그 본체가 되므로, 먼저 “마음에 있음(在心)”을 밝힌 것이다. 범부의 마음이 허망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의지하여 일어난 죄업 역시 허망하다. 반면, 부처님의 마음은 진실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의지하여 성취된 명호 역시 진실하다. 진실은 허망을 이길 수 있으므로, 죄인이 염불하면 진실이 허망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장애가 될 수 없다. 《왕생론주》에서는 중생의 죄업이 어둠과 같고, 아미타불의 명호는 광명과 같으며, 염불은 광명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으므로, 한 줄기 광명은 천 년의 어둠을 깨뜨릴 수 있고, 오랜 겁 동안 쌓아온 죄업도 단박에 소멸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제 《왕생론주》의 뜻을 본떠 다시 세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다:
예를 들어, 만 길이나 되는 깊은 골짜기에 돌 하나를 던지면 곧바로 골짜기 바닥에 떨어진다. 골짜기가 어찌 “내가 만 길이나 깊은데, 어찌 작은 돌이 바닥에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골짜기는 죄업의 깊음을, 돌은 범부의 칭명을 의미한다.
또 예를 들어, 물에 비친 수천 개의 산이 하나의 작은 흙덩어리에 맞으면 그 그림자가 모두 깨진다. 그림자가 어찌 “내가 수천 개의 산을 품고 있는데, 어찌 작은 흙덩어리 하나에 모두 깨질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림자는 중생의 허망한 죄를, 흙덩어리는 칭명의 진실한 공덕을 의미한다.
또 예를 들어, 꿈속에서 많은 빚을 졌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면 모든 빚이 다 사라진다. 어찌 “수천만이 넘는 빚을 졌는데, 어찌 한 마디에 모두 갚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빚은 인과에 계박된 업이고, 소리는 아미타불의 명호이다.
만법이 연기(緣起)할 때 작용이 있으므로, 그다음으로 “연에 있음(在缘)”을 밝힌 것이다. 염불은 아미타불의 명호라는 진실한 인연에 의해 일어나 그 힘이 강대하다. 반면, 죄업은 중생의 번뇌와 허망한 인연으로 생겨나 그 힘이 미약하므로,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이길 수 있다. 죄인이 염불하면 죄업은 마치 한 송이 눈이 큰 화로에 다가서는 것과 같고, 약한 연기가 강한 바람을 거스르는 것과 같아, 모두 공중에서 사라지고 즉시 자취를 감춘다.
체(體)와 용(用)은 반드시 그 상(相)을 갖추기 때문에, 그다음으로 “결정에 있음(在决定)”을 밝힌 것이다. 죄업의 본체는 허망하고 인연은 미약하므로, 무상하고 결정되지 않는다. 반면, 염불의 본체는 진실하고 인연은 강대하므로, 항상 결정되어, 결정된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을 이긴다.
세 가지 뜻을 비교해보면, 십념(염불)이 더 무거워 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
참으로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임종 시에 십념은 지극히 미약하고, 광겁 이래 지어온 죄업은 무량무변하다. 그러나 무량무변한 죄업을 지닌 중생이 임종 시의 십념으로 삼계를 벗어나 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당연히 죄인에게 어떤 특별한 힘이 있다거나 “십념”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르고 있는 아미타불의 명호 자체의 힘 때문이다. 《왕생론주》에서 말하길: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가고, 털구멍 속에 바다를 넣을 수 있는 것이, 설마 산과 바다가 신기(神奇)해서인가? 아니면 털구멍과 겨자씨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인가? 이는 신통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이가 그것들을 신기하게 만든 것뿐이다.
또 말하기를:
십념염불로 왕생의 업이 완성된다는 것 역시 신통 도력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따라서 《왕생론주》에서는 “십념”을 단순히 “열”이라는 숫자로 보지 않고, “염”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지도 않았으며, 직접 명호 법체의 본질적 기능을 근거로 “끊임없이 칭명함”으로 이해하고, “반드시 왕생함(업이 성취됨)”을 밝혔을 뿐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간의 길고 짧음에 있지 않다.
십념은 실상법(아미타불 명호)를 들어서 생겨난 것이다.
십념은 아미타여래의 방편 장엄 진실 청정 무량 공덕의 명호에 의지하여 생겨난 것이다.
십념을 상속한다.
십념으로 왕생의 업이 성취된다.
경에서 말한 십념은 왕생의 업이 성취되었음을 밝힌 것으로, 꼭 염불한 횟수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염념상속하며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디 한가한 시간이 있어 꼭 염불한 횟수를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한 까닭에 십념 염불로 곧 왕생하게 된다.
이 뜻은, 후에 선도대사가 이를 완전히 계승하여, “십념”을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으로 규범화하여 해석하기를:
부처님의 본원을 바라보고 계셨으니, 그 뜻은 중생이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행주좌와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묻지 않고, 끊임없이 염불하는 것을 정정의 업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에 순응한 까닭이다.
모든 범부는 죄와 복의 많고 적음, 시간의 길고 짧음을 묻지 않고, 다만 위로 백년을 다하고 아래로 하루에서 이레에 이르기까지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하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죄와 복의 많고 적음과 시간의 길고 짧음을 묻지 말고, 일심으로 염불하며 의심하지 말라.
(4) 여래의 삼업은 범부를 다스리기 위함
《왕생론》에서는 여래의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 세 가지 공덕의 성취를 관찰한다.
《왕생론주》에서 자세히 논하기를:
범부중생은 신구의 삼업으로 죄업을 지어 삼계에 윤회하며 끝이 없다. 그런 까닭에 제불보살이 (한량없는 공덕으로) 신구의 삼업을 장엄하여 중생의 허망한 삼업을 다스린다. 어떻게 다스리는가?
중생은 신견(身見)으로 인해 삼악도의 몸, 비천한 몸, 추한 몸, 팔난(八難)의 몸, (삼계에서 윤회하는) 유전(流轉)의 몸을 받게 된다. 이러한 중생들이 아미타여래의 상호광명의 몸을 뵈면, 위와 같은 각종 신업의 계박에서 모두 해탈하여 여래의 집에 들어가 마침내 평등한 신업을 얻게 된다.
중생은 교만으로 인해 정법을 비방하고, 성현을 헐뜯으며, 윗사람을 경시한다.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혀를 뽑히는 고통, 말을 못 하는 (언어장애인) 고통, 말로 가르쳐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고통, 명성이 없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 중생들이 아미타여래의 지덕(至德)한 명호와 설법의 음성을 들으면, 위와 같은 각종 구업의 계박에서 모두 해탈하여 여래의 집에 들어가 마침내 평등한 구업을 얻게 된다.
중생은 삿된 견해로 인해 마음에 분별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유무(有無), 시비(是非), 호추(好醜), 선악(善惡), 피차(彼此) 등의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길이 삼유(三有)에 빠져 여러 가지 분별의 고통과 취사의 고통을 받으며, (무명의) 긴 밤에 오래오래 잠이 들어 벗어날 기약이 없다. 이 중생들이 아미타여래의 평등한 광명의 비춤을 만나거나, 아미타여래의 평등한 의업에 대해 듣게 된다면, 이러한 중생들은 위와 같은 각종 의업의 계박에서 모두 해탈하여 여래의 집에 들어가 마침내 평등한 의업을 얻게 된다.
“治(치)”에는 대치(對治)와 구치(救治)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여기서 “대치”는 중생의 잘못된 행동이나 번뇌를 바로잡고 다스린다는 뜻이고, “구치”는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고 치료한다는 뜻이다.) 인지(因地)에서 법장보살의 삼업의 원행(願行)은 본래 범부의 허망한 삼업을 대치하기 위함이므로, 과상(果上)에서 아미타불의 광명 신력은 인천과 삼악도의 모든 고통을 구치할 수 있다. 또한 범부는 업으로 인해 죄업을 지으므로 그 업을 대치해야 하고, 과보에서 계박이 되므로 구치를 해야 한다.
여래의 삼업이 어떻게 범부를 다스릴 수 있는가? 아미타불의 명호 때문이다.
《왕생론주》에서는 여래의 삼업이 모두 중생을 구제하고 치료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기 위해, 우선 중생이 죄업을 짓는 삼업과 대응시켜 하나하나 설명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의 신업이 중생의 신업 계박만 해탈시킬 수 있고, 신업과 구업의 계박을 제거하지 못한다거나, 여래의 구업이 중생의 구업 고통만 제거하고, 신업과 심업의 고통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상 중생이 여래의 삼업 중 어느 한 업만 보거나 듣더라도 모든 신·구·의업의 계박에서 모두 해탈할 수 있다.
그러나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지 않으면 여래의 몸과 광명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깨닫지 못하면 여래의 진실하고 평등한 마음을 알지 못하며,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접하지 않으면 여래의 설법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이러한 범부가 어떻게 삼업의 계박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그 무량한 장엄 공덕과 삼업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법력을 명호 안에 담아, 중생이 듣고 칭념하게 하셨다. 중생이 명호를 칭념하면 모든 중죄와 일체의 속박이 단박에 제거된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명호는 “지덕의 명호”, “방편 장엄 진실 청정 무량 공덕의 명호”, “지극한 무생 청정 보주의 명호”라 불린다. 이른바:
어떤 사람에게 비록 한량없는 생사의 탁한 죄업(罪濁)이 있더라도, 저 아미타여래의 지극한 무생청정보주명호를 듣고 이 명호를 탁한 마음에 던지면, 염념마다 죄업이 소멸되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즉시 왕생하게 된다.
이 여래의 명호와 저 부처님 국토의 이름은 일체 악을 그치게 할 수 있다.
무애광여래의 명호는 중생의 일체 무명을 깨뜨릴 수 있고, 중생의 모든 소원을 만족시킬 수 있다.
《왕생론주》에서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구업의 공덕인 설법 음성에 배대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히 중생의 칭명이 구업의 음성에 속해 유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로는 아미타불의 명호가 모든 법문의 바다를 통섭하고, 모든 법문이 육자명호에서 흘러나와 모두 칭명으로 귀결되며, 여래는 명호로 설법하므로 중생이 명호를 부르며 왕생을 발원하는 것은 곧 여래의 법음에 수순하고 여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칭명하는 사람이 현세에서 아미타불께서 항상 그들의 머리 위에 계시고, 광명이 그 몸을 떠나지 않으며, 임종 시에는 반드시 보신과 화신의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며 영접해 주시는 것도 명호 속에 여래의 신업 공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칭명하면 만 명이 닦아 만 명이 왕생하고, 왕생하면 평등하게 성불하게 되므로, 명호가 곧 여래의 평등한 대자비심이다. 만약 명호가 아니라면 닦을 수 있는 중생과 닦을 수 없는 중생이 있게 되므로, 이는 곧 평등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명호로 여래의 삼업을 모두 포섭한다.
또한 아미타불의 명호를 구업에 배대하는 것은, 중생들이 정법을 비방하는 죄를 구업으로 짓기 때문에, 이러한 죄가 너무 중대하여 명호가 아니면 구제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정법을 비방한 자가 왕생하지 못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임을 알 수 있다. 정법을 비방한 자가 왕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래께서 그들을 구제하지 않으려 하거나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왕생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생론주》에서는 “이 어리석은 사람이 부처님의 교법을 비방한 이상, 어찌 부처님의 국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왕생할 수 있다고 밝히는 것은, 과거에 정법을 비방했던 사람들이 명호를 듣고 마음을 돌이켰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듣고도 듣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후에 선도대사는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역과 십악의 죄업을 지은 이가 죄업을 소멸하고 왕생하고, 정법비방과 일천제도 마음을 돌이키면 모두 왕생한다네.”라고 말하였다.
“여래의 집에 들어가 마침내 평등한 신업을 얻게 된다” 등은 범부가 정토에 왕생하면 삼업이 여래와 같아져서, 곧 성불하게 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왕생론주》에서 범부에 대한 논술은 전면적이고, 깊이 있으며, 체계적이다.
범부의 본성은 곧 전도된 것이고, 허위인 것이다. 이러한 전도되고 허위인 범부가 닦는 모든 인천의 선과 인천의 과보는 원인이든 결과든 모두 전도되었고 허위이므로, 이를 부실공덕(不實功德)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러한 공덕으로는 삼계를 벗어나 무루(無漏)의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 이러한 전도되고 허위인 범부가 삼계를 벗어나 정토에 왕생하려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본원력과 명호의 진실한 공덕에 의지해야 한다. 불력에 의지하는 방법은 “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저 명호의 의미에 따라서”로, 즉 “두 가지 앎과 세 가지 믿음”이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이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칭명하면 마치 광명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듯 무량한 생사 죄업이 단박에 소멸되고, 빠르게 공덕의 큰 보배 바다를 만족시키며, 삼계의 업력이 잡아당겨 계박하지 못하고,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을 얻을 수 있다.
정토에서 섭수하는 근기를 밝히기 위해, 먼저 《대경》에서 아미타불의 본원인 “다만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는 경문을 인용하여 논주가 함께 하려는 대상이 바로 범부임을 밝히는 동시에, “아미타불의 본원은 본래 범부를 위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관경》의 하품하생을 인용하여, 모든 범부는 정법을 비방하지 않고 부처님을 믿고 염불만 하면 모두 왕생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으며, 나아가 《관경》의 하하품에서 “오역죄를 지은 자가 임종 시에 열 번 칭명”으로 제18원의 근기와 법의 내용을 강조하여, 양자의 유기적인 연결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어서 또 이치적으로 설명하기를, 정법을 비방한 자가 왕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여래의 구업 공덕을 통해 아미타불의 명호가 정법을 비방한 극심한 죄업도 소멸시킬 수 있고, 마음을 돌이킨 자는 모두 왕생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왕생론주》를 통해, 용수보살과 천친보살이 열어준 정토의 대승보살도가 우리 범부들 앞에 활짝 펼쳐지니, 눈이 번쩍 뜨이며 신심이 배가 된다. 만약 《왕생론주》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었겠는가! 이는 바로 “한 조각 흰 구름이 골짜기 어귀에 걸리니, 돌아오던 많은 새들이 둥지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구나.”와 같다.
그리고 우리를 궁극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담란대사는 《찬아미타불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무시 이래 삼계를 떠돌며
허망한 윤회의 수레바퀴에 휘말렸네.
한 순간, 한 생각의 업조차도
족히 육도에 묶여 삼도에 가로막히네.
경에서 말하길, “중생이 어떤 몸으로 구제받아야 할지에 따라 그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하신다.”고 하였다. 대사의 깊고 두터운 은덕은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질 것이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하하품의 근기를 정토문의 주된 근기로 삼는다는 것은 담란대사로부터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