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계 李元桂 , 이자춘의 장남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동생의 뜻에 반대하며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살한 고려의 충신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아들들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이기에 동생(태조 이성계)에
직접 힘을 보탤 수 없지만 너희는
작은 아버지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라."
고 전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들 이양우, 이천우, 이조, 이백온은
그들의 작은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도왔고 이방원의 집권을 돕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이 4명의 조카들을
매우 신뢰하고 아꼈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4형제 모두가 조선의 왕족으로서
주요 관직을 지내었다.
그러나 이원계 본인은 위와 같은 사연 때문에
오랫동안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하였고
사망 후 490년이 지난 1872년(고종 9년)이 되어서야
완풍대군(完豊大君)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1330년(충숙왕 17년)에
환조 이자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보에는
어머니 한산 이씨는 이원계가 어린 날에 죽었고
이자춘은 영흥 최씨와 결혼했고 이성계를 낳는다.
또 이자춘은 정신 김씨와도 결혼하여
의안대군 이화를 낳는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이원계는
첩 내은장(內隱藏)의 소생,
이화는 첩 곰가(古音加)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원계는 공민왕 대에 문과에 급제했다.
1359년 홍건적이 침략해오자 모두 이를 물리쳤으며,
특히 홍건적이 2번째로 침략했을 때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고려 말의 삼원수 중 한명인 안우(安祐)와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2등 공신이 되었다.
강화도에서 나세와 함께 왜구를 물리치고
1380년에는 전라도로 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를 도와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다.
이원계와 이성계 두 형제는 우애가 매우 깊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5살 차이 나는
이복 형인 이원계를 평생 매우 깍듯이 대우했다고 한다.
1388년 우군도통사 이성계 밑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요동으로 가게 된다.
이원계는 개경으로 말을 돌리려는
이성계의 회군을 끝까지 반대했다고 하며,
위화도 회군 5개월 뒤에 독을 마시고 자살한다.
이원계는 이성계의 뜻이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것임을 알고 죽음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시조를 남겼는데
이것이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절명시
(사람이 죽기 직전에 남기는 시)이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三韓故國身何在 삼한고국신하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地下願從伯仲遊 지하원종백중유)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오,
(同處休云裁處異 동처휴운재처이)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荊蠻不必海桴浮 형만불필해부부)
그리고는 네 명의 아들들을 불러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이성계)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라." 라는 말을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죽음을 맞는다.
무덤은 함흥의 정릉(아버지 이자춘(환조)의 능)
의 우측에 있으며 선원사와
북청의 삼의사에 모셔져 있다.
ㅡ 사극 용의 눈물에 등장하는데 역사대로
이복동생인 우군도통사 이성계를
조전 원수로써 참전하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결정에
'이건 고려에 대한 반역'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회군 결정 철회를 요청한다.
허나 이성계의 마음은 정해졌고,
그 와중에 다른 장수들이 회군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진중에서 처형 당하자
집행을 막고자 급히 뛰어오나
이미 처형은 끝난 후였다.
평소 형 이원계의 말을 줄곧 잘 따르던 이성계였으나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확신을 품은 뒤에
그 부분 만큼은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성계가 평소처럼 형 이원계을 말을 따랐다면
한반도의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포함해서 역사적 기록이
상당히 부실하고, 편찬자의 의도가 강해서,
관련된 문서를 상당한 의심 해야 하는 인물이다.
고려 공민왕대 인물인데 무과를 봤다거나,
이자춘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 때인데
충목왕 때 음서에 천거되고 충정왕 때
문과 합격했다거나,
가계도가 애매하다거나,
심지어는 문익점의 가상 아들들을
처조카로 두었다는 식의
언급이 국방일보를 거쳐서 위키백과에 실리기도 한다.
이원계가 이성계에 반발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위에 언급한 내용이 아니라,
이원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고,
개국공신명단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후에도 이원계의 이름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 이성계에 반발한 이들을
다 고려 충신으로 뭉쳐서 볼 수 있느냐가 문제다.
단적인 예가 조영무. 사실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은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의도를
정몽주에게 몰래 알려줬던 인물인데,
조선 건국 이후에는 그냥 조선에서 일하면서
정치적으로 활동하다가 정도전의 일당으로
활동한다고 1차 왕자의 난 때 사망했을 정도이다.
즉,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정치적,
혼맥적 문제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어느 한쪽으로 단언할 수 없다.
또한 이원계가 금기시 된 것에 대해서는
이원계가 서자가 아닐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도 문제이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이용익이 그의 후손이다.
이원계(李元桂)
1330(충숙왕 17년) ~ 1388(우왕 14년)
지식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