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5
6월11일[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연중 제10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tWmFjSK6Os
[의정부교구 최성우 세례자요한(구리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정말이지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주말마다 저희 피정 센터에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오십니다. 한두 분이 아니라 70명, 80명입니다. 식사도 하시고 주무시고 가시니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보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도착하신지가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작별 인사를 할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떠나실 때는 대절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피정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다음에 꼭 오세요!” 하고 인사드립니다.
별것 아닌 노력이지만 형제자매들이 받은 감동이 큰 것 같습니다. 다들 하시는 말씀,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환대받고 배웅까지 받은 적은 없습니다. 촌각의 순간이었지만 작은 천국 체험을 하고 갑니다. 신부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는게 없습니다. 저희 훌륭한 형제들이 각자 자리에서 잘 도와주셔서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어떤 형제는 침구 세탁소에서, 어떤 형제는 강의로, 다들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피정이 잘 되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 형제들 덕분입니다.”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던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w4dlc6zro4
++++++++++++++++++
<교회가 다시 사람이 넘치게 할 유일한 길>
현재 수치상이나 느끼는 바로는 교회가 점점 비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는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 변하지 않는 해법을 제공하고 있다고 봅니다. 바르나바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성 바르나바의 성품과 그 열매가 잘 드러납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선교의 두 기둥처럼 함께 다니며 큰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씨를 뿌리는 역할이었다면 바르나바 사도는 키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착하고 신심 깊은 인물이었고 그 덕분에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오늘 복음의 이 말씀과 같겠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대전의 명물 ‘성심당’의 임영진 대표가 성 바르나바를 닮은 분 같습니다. 어쩌면 그분의 아버님인 고 임길순 창업주는 성 바오로를 닮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흥남 철수 때 수많은 사람이 배를 타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직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만 남아 있었습니다. 임길순 씨는 묵주를 들고 “만약 이번에 살게 된다면 그건 하느님이 살려주신 것일 테니, 남은 평생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때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미군이 보았고 선장에게 알렸습니다. 선장은 ‘레너드 라루’로 후에 수도원에 들어가 현재는 시복 추진 중인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선장은 어째서인지 무기와 차량 등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바다에 버리라고 하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우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대전에서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찐빵을 만들어 팔며 그날 안 팔린 것은 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보내기로 합니다. 먹고살 것도 없는 형편에서 아내는 “너희 아버지만 천당에 가고 나는 지옥에 갈 거다!”라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가게를 성당 가까운 곳으로 옮겼고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종교가 싫었지만, 지금은 손주들까지 모두 할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아들 임영진 대표가 빵집을 잘 운영하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연령회와 같은 봉사만 하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임영진 대표가 “주면 반드시 받게 된다.”라는 아버지의 신념이 열매를 본 것은 철거반이 왔을 때입니다. 당시 성심당은 위반건축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철거반장은 왔다가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임 대표가 말합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철거반장이 어렸을 적에 그분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봐요. 그때 저희 아버지가 그분 염부터 입관까지 장례를 치러주는 봉사를 했다는 사실을요. 철거반장이 그런 우리 아버지를 기억해내고는 그냥 돌아간 거죠.”
임 대표는 지금도 매달 3,000만 원어치의 빵을 기부하고, 회사 수익의 15%는 무조건 인센티브로 직원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폅니다. 그러다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2005년에 빵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미 동생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빚더미에 앉아있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임 대표의 아내 김미진 이사는 어차피 불을 끄러 가봐야 너무 늦은 상태기 때문에 그냥 성당에 돌아와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빵을 많이 팔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족회의를 하는데 큰딸 임선은 피식 웃으며 “전, 학교 휴학할래요.”라고 했고 아들은 “전 어차피 입대하려고 했잖아요. 날짜를 앞당겨볼게요.”라고 했습니다. 다들 착한 가족입니다. 임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살았으니 다들 그런 큰일을 겪고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임 대표는 가게를 부동산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만이 많던 직원들은 다 나가버렸고 착한 직원들이 모여 “잿더미 속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고 하며 공장을 1월 추운 날씨 속에서 6일 만에 어느 정도 정상화한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로 일궈낸 성심당에서 나오는 빵은 왠지 더 맛있었습니다. 임 대표는 말합니다. “우리는 화재를 겪으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답이 무엇인지 한 번 봤어요. 답안지를 본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죠. 위기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죠.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똑같은 방황을 되풀이하진 않을 거예요.”
이 회사는 인사고과에 사랑에 대한 평가가 40%입니다. 둘이 싸우다가 서로 화해했다면 진급 대상자가 됩니다.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직원들은 이렇게 선서한다고 합니다.
“하나,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하나, 우리는 사랑의 문화를 이룬다. 하나, 우리는 가치 있는 기업이 된다.” 이들은 포콜라레 정신에 의거하여 수입의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3분의 1은 재투자로, 3분의 1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보다 수천 배나 매장이 많은 커다란 프렌차이즈 빵집들보다 수익이 많이 납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재정의 10%를 가난한 사람에게 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 가을부터는 소공동체 시스템 변화를 통해 최대한 가난한 이들에게 자동으로 재정이 흘러가게 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돈도 사람도 부족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것이 창업주의 정신입니다. “주어라, 받을 것이다!” “우리 곁에 불행한 사람을 둔 채로 혼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론사와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부탁을 자주 했었습니다. 인터뷰는 ‘약속 대련’처럼 미리 질문지를 보내기 마련입니다.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서인지 질문지를 미처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이 메일로 보냈는데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1시간 남짓 인터뷰는 잘 끝냈습니다. 기자는 익숙하게 핸드폰을 녹음으로 해놓고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인터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는 먼저 제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저의 호적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가브리엘의 방문과 마리아의 응답으로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뉴욕에서는 신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다면, 이곳 댈러스에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자는 ‘성당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일부 개신교회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비방과 비난을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가톨릭은 큰 집, 개신교회는 작은 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교회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톨릭교회에서 작은 집인 개신교회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 큰 집과 작은 집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개신교회의 장점은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은 교계제도를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그 조직이 자유롭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고, 간단한 쇼핑도 할 수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도 있고, 샤워 시설도 있고, 주유소의 기름값이 저렴한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서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음식도 맛이 없고,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물건값이 비싼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입소문이 나서 파리만 날릴 것입니다. 휴게소가 아무리 좋아도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가지면 미련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합니다. 종교는 깨달음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휴게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찾을까요? 종교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때입니다. 종교가 지친 삶에 위로와 용기를 줄 때입니다. 종교가 불의한 세상에 희망을 줄 때입니다. 종교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외면할까요? 종교가 속 빈 강정일 때입니다. 종교가 권력에 야합할 때입니다. 종교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갈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외면할 때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자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청하였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놓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제가 이곳 댈러스에서 해야 할 소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 사도의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1,24)으로 사도로 인정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본명이 요셉이었던(사도 4,26 참조)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오로 사도가 개종한 후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였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바오로의 선교여행에도 함께 하였고,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이다.
복음: 마태 10,7-13: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복음 선포이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들의 임무를 꺼리지 않고, 장차 자신들이 겪을 위험과 싸움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선포자가 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주님의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이 되었다. 세속적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보상을 바라지 말고,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여행 보따리나, 여벌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씀이며,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참조: 탈출 3,5)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 위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힘이 아닌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팡이는 아니다.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보면,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복음의 원칙을 따라 이렇게 하시오.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 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11,3-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바르나바 사도의 삶이 바로 그러하였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고 바오로 사도와 함께 여행하였고, 결국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신 분이다. 주님의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 생명의 말씀으로 바르나바 사도에게 생명을 주었으며 그리고 우리에게도 생명을 줄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고 이어서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들은 주님께 거저 받은 권한과 능력을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거저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과 능력의 은사는, 그들이 완수하여야 할 직무적 사명과 긴밀히 연관됩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권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 있습니다. 저마다 지닌 은사(카리스마)와 재능(달란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 은사와 재능은 그 사람의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고유한 하느님의 선물로 서로 봉사하며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모든 선물은 그 자체로 선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명이 되지만, 가끔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높이는 데 그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선물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은사에 생명을 주고 그 은사가 참됨을 증명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선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13 참조)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르심’과 ‘응답’ - “저도 원하는 일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1)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루카 1,38) 이 말씀에서 ‘바랍니다.’(‘저는 원합니다.’)라는 말은, 성모님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순종하셨고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뜻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천사는 성모님께,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자, 너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거부할 수 없어서 복종한 것이라면, 그것은 순종도 응답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실 때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를 원한다. 너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원한다면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도들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그렇게 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이고,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주님의 희망에 나의 희망을 일치시키는 일, 즉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식 때의 ‘서약’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구장이 “……을 하기를 원합니까?”라고 물으면, 서품 대상자들은 “예, 원합니다.”라고 답변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나는 ……을 하겠다고 서약(맹세)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 또는 ‘서약한다.’라는 말보다 ‘나는 원한다.’ 라는 말이 더 강력한 ‘서원(誓願)’이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도들에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한다. 너희도 원하느냐? 원한다면 가라.” <역시 실제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파견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그들 자신들도 원했기 때문에, 파견 명령에 기꺼이 응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기 싫은데도 억지로 간 것이 아니라, 가고 싶어서, 정말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선교사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내가 원해서’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에 넘쳐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데도,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한다면, 그 소식은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될 수 없고, ‘전해 주기 싫은 소식’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3)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은, “너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무슨 대가를 바라지 말고 오직 ‘기쁨으로’ 하여라.”가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이지만 수당을 많이 준다니까 한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돈 소식’을 전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금, 은, 구리돈, 여행 보따리, 여벌옷, 신발, 지팡이를 지니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불편한 줄도 모르게 됩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아시는 분이고(마태 6,32), 그것을, 즉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
=====================
[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님]
<누구를 위한 당부한가?>
어릴 적 부모님한테서 자주 들었던 당부가 있었습니다. “착하게 살아라.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당부가 그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소중하고 무게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모님이 으레 하는 잔소리로 여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 당부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나의 장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이 담겨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당부는 알게 모르게 제 삶에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열두 제자를 향한 예수님의 당부가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뜻을 세상에 전할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시는 당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부는 하늘나라 선포, 병자 치유와 죽은 이들을 일으켜 줌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제자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당부는 주님의 제자이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을 짚어주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하늘나라 선포입니다. 이를 통해 하늘나라 선포가 나머지 당부의 내용을 풀 수 있는 열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선포는 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고, 예수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병자에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할 것이며,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게 부활의 삶을 안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편에 서 있음으로 마귀의 권세를 부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부는 분명 예전에 우리가 들었던 부모님의 당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곧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당부이며, 인간의 온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당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부인 하늘나라의 선포에 온 힘을 바친 성 바르나바 사도를 본받아 이제 우리가 나설 때입니다.
=====================
[청주교구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하늘 나라 선포>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늘 나라로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나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 5,3)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하시며, 죄인들을 하늘 나라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들에게 회개를 호소하시며,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루카 15,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궁핍을 겪으셨으며, 더 나아가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그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당신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으셨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사11,24)
신약의 인물 중에서 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베드로와 바르나바 사도라고 답합니다. 사실 저는 착한 사람은 못되지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약한 사람이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늘 희생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아무튼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11,24)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성품을 지닌 바르나바이었기에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때, 그를 받아들인 사람이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방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식 관습(=할례)을 강요하던 몇몇 유다계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한 사람도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인 베드로 사도를 비판했을 때도, 베드로 사도를 감싼 이가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첫 전도 여행에서 중도에 전도를 포기한 요한 마르코를 비겁한 사람이라 여겨 그를 두 번째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마르코를 자신의 여정에 동행시킨 인물도 바르나바입니다. 이처럼 착하면서도 열린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인 바르나바와 같은 선교사가 필요하고, 바르나바와 같은 사람과 동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총일까, 싶습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 시대가 필요한 아름다운 동행의 모델이라고 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선교 여정 가운데서 어쩌면 자신과 늘 함께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았기에 가진 것, 아는 것 그리고 깨달은 것,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기에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의 여정에서 비우면 비울수록 더 충만해지는 하느님 전대의 무게를 체험했기에 아낌없이 받은 것을 거저 나눠주었으리라 상상합니다. 빈 가방을 가지고 떠나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마음 자세라고 믿습니다. 저의 짧은 베트남 선교 경험에 비춰볼 때 말입니다. 곧 선교사의 마음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는 말씀에 대한 동의와 동감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착한 마음입니까?
바르나바 사도 축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선교사의 자세는 바로 이것입니다. 선교사란 단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외지나 외국으로 파견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선교사입니다. 인생의 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베푸는 삶(=사랑의 나눔과 실천)을 사는 사람이 곧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는 늘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식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일상을 살면서 늘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며 은총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체험하며 이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선교사는 자신의 삶을 비우고 나누어 주려고 할 때 결코 전대가 비워지는 일이 없음을 체험하기에 더욱더 은총의 통로, 사랑의 통로로 불림을 감사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선교사가 받은 은총이 아주 특별하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나의 동행을 필요로 할 때 바르나바와 같은 마음으로 동행할 때 참된 하느님의 사람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1, 24:10, 8)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는 세계사 안에서도 유례없는 대단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좁은 국토에 천연자원도 그리 풍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가,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놀라운 변화의 속도와 규모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듭니다. 1970년대만 해도 전화나 텔레비전 없는 집도 꽤 많았는데, 이제는 전화는 개인 필수품이 되었고 텔레비전은 극장을 방불케 할 만큼 큼지막합니다.
이런 빠른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만져서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 없었던 저 역시 빠른 변화에 혼란을 느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개인의 행복도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OECD 국가 중에 가장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도 뚝뚝 떨어지고 있음 역시 개인의 행복도의 하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정신적 빈곤은 지금의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외적 풍요로움이 실제 행복과는 전혀 다름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외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내적 성장을 위해 더 힘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요? 물론 ‘이런 정신적 성장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들 수 있지만, 외적 성장을 멋지게 이룬 우리의 모습은 내적 성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또 다른 나의 성장을 위해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또 부패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빛은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바로 우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또한 등불을 함지 속에 놓아서 비추지 못하는 것 역시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소금과 빛은 이렇게 짠맛과 밝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부족한 존재이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실수로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의 전능함을 우리를 통해서 높이 드러내십니다. 이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 풍요로움을 넘어서 내적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매이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그것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을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존중할 때 물질도 가치를 얻게 됩니다.
성경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0-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도>
마태오 10,7-13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사도>
빛이 보내시고
빛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빛나는 사람
믿음이 보내시고
믿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믿는 사람
희망이 보내시고
희망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희망하는 사람
사랑이 보내시고
사랑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사랑하는 사람
착함이 보내시고
착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착한 사람
곧음이 보내시고
곧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곧은 사람
화해가 보내시고
화해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화해하는 사람
평화가 보내시고
평화롭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평화로운 사람
기쁨이 보내시고
기쁨이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기쁜 사람
자비가 보내시고
자비롭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자비로운 사람
섬김이 보내시고
섬기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섬기는 사람
살림이 보내시고
살리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살리는 사람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종종 시간이 될 때 일부러 서점을 찾아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 얼마든지 온라인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지만 서점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들을 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를 직접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베스트셀러 가판대를 보면 사람들이 어떠한 욕구를 충족하고 싶어 하는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린 시절에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다루는 도서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7막 7장> 혹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와 같은 성공에 관련된 책들이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IMF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데, 어떻게 몇 억을 모을 수 있는지, 부동산 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재테크 책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서점에 갔는데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책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책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이대로 좋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 <당신의 마음을 안아줄게요>
이 제목들을 보면 요즘의 시대가 위로를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은 천천히 살아도 된다는 것, 존재만으로도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책들이 인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위로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듯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의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상기 책들의 제목처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정말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은 위로와 울림을 선사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물론 적당한 위로의 말들이 지쳐있는 일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마치 인스턴트와 같아서 순간적인 즐거움만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그 답을 찾아야 할텐데 우리는 이 모범을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바르나바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이름이 요셉이었던 바르나바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합류한 뒤 자신 소유의 밭을 팔아 교회에 헌납했고 신앙생활에 전념했습니다. 그에겐 고유한 업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오로가 초대교회 공동체에 합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사도 바오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오로는 바리사이파 출신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하는 데 선봉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는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당시 유대인 측의 증인으로 섰으며 그의 열정적인 박해 탓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오로는 흩어진 모든 사람들을 추격해 전부 잡아들여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당시의 박해란 당연히 죽음을 전제하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셈입니다.
그러한 바오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기적 이후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신앙이 검증이 되지 않은, 교인들을 직접적으로 박해하고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의심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실제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고 두려워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바르나바가 바오로의 후견인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에게 그의 회심과 관련된 기적을 적극적으로 알립니다. 만약 이러한 바르나바의 역할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결코 사도단에 들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가 읽고 있는 바오로의 서간들과 이방인 선교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후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독서 말씀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어 그곳의 교회를 예루살렘 교회를 능가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 교인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후 바르나바는 키프로스 섬에 가서 선교를 하다가 61년 경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생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왜 그의 이름이 요셉에서 바르나바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가 진정으로 위로를 베푼 것은 바오로 사도 뿐만 아니라 당시 박해를 받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다시 “위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 위로가 행동이 없는 단순한 동감에 그친다면 그것은 인스턴트와 같은 일시적인 기쁨만 선사 할 뿐입니다. 결국 진정한 위로란 보잘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존재에게 진정으로 손을 내밀어 주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확신과 증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위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 타인에게 베풀어야 하는 위로는 바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고는 우리가 베푼 것이 결국 모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찬 확신과 함께 그 힘을 발휘합니다.
누군가에게 가진 것을 거저 베푸는 것.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사랑을 행하는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지혜로운 하느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그분께서 더욱 더 큰 위로와 축복을 안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늘의 영성체송은 따뜻한 예수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리라.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참 좋은 제자들이자 선교사들>
“성 바르나바 사도...”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 믿는 이들의 이중신원입니다. 안으로는 제자이자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 역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을 사랑했던 주님의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바로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러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지난 주일 가톨릭신문 20면은 성미술 작가 조광호 신부의 고백과 같은 글이었고 일부 소개합니다.
“저도 교회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했어요. 회화외에도 조각과 판화, 스테인글라스 등 필요한 것들을 배우면서 작업을 해요. 컴퓨터 그래픽도 배웠어요. 특히 스테인글라스의 경우는 당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동검도 채플’은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제가 받은 은총을 내놓기 위해서 만들었죠. 교회에 봉헌한 제 삶을 모두 모아 작은 경당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놓기 위한 곳이에요. 24시간 열려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로, 누구나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울 때,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성 바르나바 사도처럼, 역시 교회와 주님을 사랑한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인 사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볼 때 다산 정약용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교회의 사람, 주님의 사람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도 공감합니다. 한결같이 진리를 깨달은, 삶의 지혜가 농축된 말씀입니다. 진리의 사도라 해도 좋을 다산입니다.
“비범한 진리는 찰나의 깨달음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축적된다. 궁리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며 만가지 변화를 섭렵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행하는 도리를 헤아려 말없이 마음속에서 살피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길을 놔두고서 굳이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생을 노력으로 착각하지 말라.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만들어진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거친 돌길이나 우거진 덤불속을 헤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특정 지역에 그리그도교를 전한 대표 선교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사도라 부르고, 성치릴로와 메토디오를 슬라브 민족의 사도, 성 파트리치오를 아일랜드의 사도라 부릅니다. 또 더 넑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우리를 주님의 사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바르나바가 ‘격려 또는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 뜻대로 얼마나 신도들을 잘 격려하고 위로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어지는 내용도 그가 얼마나 교회에 충실한 인물인지, 또 사울에 대한 최선을 다한 노력에서 얼마나 좋은 배려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고, 바르나바의 편지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사도가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5세기에 쓰여진 ‘바르나바의 전도 여행과 순교’에서는 키프러스 섬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우선적 목표가 하늘나라의 선포요 이와 더불어 치유활동과 구마활동입니다. 이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명합니다. 이미 예수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이 각처에 있어 제자들을 영접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흔연히 나그네를 환대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무소유의 자유롭고 홀가분한 선교 여행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참 좋은 보답은 주님 평화의 선물입니다. 무소유와 무욕의 자유로운 삶을 통해 그대로 주님 평화의 통로가 됐던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의 두 연설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제6차 국제 젊음이들의 성가대들 모임에서 성가대원들에게 한 연설로 그들의 섬김의 활동에서 세가지 본질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형성에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첫째, 조화(harmony)입니다.
교황님은 “음악은 조화를 창조한다. 그것은 누구에나 전달되어 고통중인 이들을 위로하고, 좌절한 이들의 마음에 열정의 불을 붙인다. 음악은 하느님의 조화로운 빛을 반영하는 아름다움과 시같은 경이로운 가치들을 사람들 마음에 가져다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친교(communion)입니다.
교황님은 “합창은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와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여정은 위대한 ’연주회(concert)’의 향기가 될 수 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면서 ‘친교의 교향곡’(thy symphony of communion)’안에서 각자 고유한 풍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강조했습니다.
셋째, 기쁨(joy)입니다.
교황님은 “여러분은 예술, 아름다움, 영성의 오랜 보물의 관리인들이다. 이기심, 야망, 질투, 분열로 더러워진 세상적 정신상태가 너희들 안에 스며들지 않도록하라. 너희 음악은 점차 하느님께 자기증여의 기쁨이 될 수 있고, 그분의 사랑과 더불어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밝히고 모든 것을 변모시킬 것이다. 너희는 성 아우구스티누의 권고를 채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혀로,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우리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자.' ”
새삼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조화, 친교, 기쁨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는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는 교황청의 대사들 모임에서 한 연설인데 세부분으로 된 명연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첫째, 가정(family)입니다.
교황님은 “교황대사들은 인류가정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 우선적 자리에 사랑과 형제애, 함께와 나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놓고 이를 살아내고 전수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하늘나라 가정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분열과 전쟁으로 파괴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둘째, 희망(hope)입니다.
교황(pope)이란 단어가 흡사 희망(hope)처럼 들립니다. 교황님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우리는 좌절하거나 비관적이 냉소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희망은 우리 세상 안에 현존하는 좋음을 인정하고 우리 시대의 도전에 직면할 힘을 마련해 준다. 이런면에서 여러분들은 희망의 표징들이 되어 달라.”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평화(peace)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는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 안에서 타인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관계의 열매다. 우리가 무관심과 두려움을 제쳐놓을 때, 성장하고 번영하는 영구한 일치로 이끄는 상호 존경의 진정한 분위기도 피어날 수 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peacemakers)이 되도록 노력해 달라. 전능하신 분이 축복하신다” 라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형제애, 희망, 평화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 역시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점차 우리 모두를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우리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로, 즉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 그리고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당발 봉사자>
요즘 개인과 인권이 중시되면서 말의 사용도 바뀝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많이 쓰던 ‘불구자’니 ‘운전사’니 ‘간호원’ 같은 말을 요즘은 쓰지 않지요.
같은 맥락에서 ‘가용인원’ 같은 말도 논란입니다.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런 면에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썼다가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허투루마투루 쓰이는 것을 싫어하고, 여기저기 자기를 내어주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 좋아하는 일 한 가지만 하려고 합니다.
어제도 모 형제회 평의원들과 평의회를 하는데 공석이 된 평의원을 대신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걱정의 마음이 있었는데 식당 봉사자들이
또 몇 분 못 오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제도 손님이 많아 바빴는데 봉사자가 없어서 연세 드신 봉사자 한 분이 너무 고생 많이 하셨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지금 교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제일 큰 이유는 웬만큼 젊은 분들은 다 직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이 봉사하시는데 너무 힘들어 못하시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제일 큰 이유지만 그러나 앞에서 얘기한 대로
자기를 내어주려는 자세가 부족한 것도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내어주는 분들은 이미 바쁜데도 여기저기 뽑혀 더 바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는 그 반대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준 분입니다.
초기 공동체 모습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을 보면 이렇습니다.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부터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었고, 타루스스로 가서는 바오로 사도를 데리고 와 같이 열심히 선교하여 안티오키아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바르나바를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먼저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순종 잘하는 사람,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서 후뚜루마뚜루 쓰이는 가용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해서는 교회 안에서 이렇게 가용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착하기만 해도 교회 밖에서는 마당발로 불리며 왕성히 활동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필수적이고 성령 충만은 마당발 봉사의 완성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소임이라고 믿는 사람, 더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만이 그 소임이 맡겨졌을 때 거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치지 않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교회 봉사자가 점점 줄어들어서 걱정하는 오늘 저이고, 바르나바와 같이 자기를 내어주는 마당발 봉사자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
<사도들의 파견!>
오늘 복음(마태10,7-13)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람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7-8)
이어서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하시면서, 떠날 때까지 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어떤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사도들의 파견!
오늘 복음 말씀 중에서 더 눈에 띄게 다가오는 말씀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과 복음을 선포하러 세상으로 나아갈 때에는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내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이기에 이것이 너에게로 또 다시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처럼'(마태8,20),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전념하고, 나머지 것들은 하느님께 맡겨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습 안에서 보면 우선적으로, 본당으로 파견되어지는 본당 사목자들이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이 복음 선포에만 전념하면 하느님께서는 신자들을 통해 다 채워주십니다.
오늘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사도 11,24)인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바르나바 사도의 모습을 닮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착한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 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HS_hhIwFhg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아름다운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 납니다.
받은 것이 무엇이며
주어야 할 것이
무언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잃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주는 것이며
채우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도 거저 받은
오늘임을
예수님께서는
잘 가르쳐주십니다.
거저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삶임에도 너무
어렵고 복잡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소유하려는 이 마음을
내어드리는 것에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은
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모든 길 또한
거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의 길이었으며
지나가야 할
모든 시간 또한
거저 주어야 할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서로를 자유롭게
하십시오.
거저 받은 생명과
거저 주어야 할
자유는 하나입니다.
자유롭게 장미
활짝 피어 오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