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blog.naver.com/viking999/40094777488
[불교입문 12] 불전의 성립과 승가의 분열/ 정병조
대장경의 숫자가 많아진 이유는 우선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
첫째, 부파불교의 시대, 즉 교단이 분열의 조짐을 보일 때, 스무 개 정도의 부파가 난립하면서 각자가 자기의 교파가 정통임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의 편의대로 고쳐서 편집하였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
둘째, 불교가 중국 땅으로 전래되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즉, 산스크리트 본은 하나지만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반야심경 하나만 예로 들자면, 현장스님의 역본 외에도 여섯 가지가 더 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다 공부해야 불교 공부를 한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문헌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가장 잘 번역된 한 두 가지만 읽어보면 그 대의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출여본다면 대장경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만도 아니다. 대략 권수로 간추려 본다면 삼십 권 내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 정도라면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평생토록 도저히 공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대경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진실로 이 시대에 되살린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부끄러운 점은 아직도 고려대 장경이 한글본으로 완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196 7년 이래 이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으나 아직도 더 많은 땀과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120권정도 출판되었다. 그 러나 멀지 않은 장래에 한글로 완역된다면 불교의 현대 화 내지는 부처님 가르침의 현대적 응용이 보다 활발해 질 것으로 기대한다.
승가는 부처님이 열반한 직후부터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경전들은 기록한다. 그런데 그러한 분열이 왜 야기되었을까.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교리적인 것, 역사적인 것, 그밖에 그 당시 승단의 성격 등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불교교단의 운영이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앙집 권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지고 교단을 운영했다면 그렇게 쉽게 분열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부처님 스스로가 권위주의를 배격하였고 신격화되기를 거부하였던 만큼, 그 분열이 빨리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실제적으로 생각해보면, 교단 분열의 직접 적인 원인은 계율 조항의 해석에 대한 차이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십사의 사건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열반 후, 전통적인 공화체제로 운영되는 단일교단에 베살리에 살고 있었던 밧지족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열 가지 일을 질문한 사건을 일컫는다.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시대에 맞게 계율 조항을 조금 완화시켜 줄 수 있느냐고 질문한 사건을 일컫는다 그 밧지족 사람들이 물었던 십사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부처님이 무소유를 말하셨으나, 소금을 비축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일사병에 걸리는 경우, 소금이 원기를 회복하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는 오후 불식계에 관한 해석의 문제이다. 인도사문들은 전통적으로 오후불식계를 지키고 하루에 두 끼만의 식사를 한다. 그런데 '오후'가 언제인가에 대한 해석이 문제이다. 오후란 정오 이후이다. 그런데 혹시 식사 때를 놓쳤을 때는 해그림자가 두 손가락 두께만큼 지나기 전까지는 허용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식사에 관련된 것이다. 반드시 우유를 먹게 되어 있었는데 우유를 발효시킨 요구르트도 먹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얼핏 들으면 간단한 문제인 것 같은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심각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세한 점들을 어기는 것을 정당화시키게 되면 교단에서 지켜야 할 청정한 율행이 어디까지 무너져 내릴지 아무도 단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보수파 비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 다. 가지의 일들을 허용해 달라는 건의에 대해서 회의를 한 결과, 비법이라고 하여 옳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자 밧지족 사람들은 완강하게 그 비구들을 비난하게 된다.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때와 장소에 따라서 거기에 알맞도록 변형될 수도 있다고 주장 한다. 그런데 그렇게 보수적인 생각만을 갖느냐고 하며 별도의 교단을 운영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것이 불교 역사에서 근본분열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즉, 불교 교단이 근본적으로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보수 적인 상좌불교와, 보다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대중부의 이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시기는 부처님의 입멸 직후였다고 한다. 곧 이어서 상좌부는 상좌부대로 여러 파로 나뉘었고, 대중부도 다른 여러 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약 2백년 만에 20개 정도의 부파가 생겼다. 그래서 부처님 입멸 직후부터 약 2백여 년 동안을 부파불교시대라고 부르게 된다.
성경을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까지는 일부의 사제에게만 성경이 읽혀졌다는 사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님들의 말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면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점은 각자의 양심에 달린 문제이다. 그렇다면 먼저, 부처님의 말을 읽어야 하고 그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소승적인 분위기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이 부파불교시대가 부정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것은 부파불교의 학문성을 들 수 있다. 이 학문불교의 성격은 다시 재론할 것이다. 간략히 언급하자면 불교를 논리적, 이성적으로 완성시켜 보려는 노력이다. 흔히 종교를 감성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는 감성이 필요할 지라도 감성만으로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논리와 합리가 있어야 한다. 만약 논리와 합리성 없는 감성만의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을 면치 못할 것이다. 거꾸로 감성은 없고 냉철한 지성만이 있는 종교, 이것도 불가능하다. 요컨대 감성과 지성이 조화를 이루는 종교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문 적인 불교의 전통이 배제되고 온통 가슴만의 종교를 강조하다가 보면 바로 이것이 맹신이 되고 광신이 되는 것 이다. 이점을 염두에 둔다면, 특히 구사론을 중심으로 해서, 그 당시의 불교인들이 사물을 '75법'이라 하여 세밀 하게 분석한다. 그 분석을 토대로 해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는 철저한 학문불교의 전통을 만들어 나갔던 것은 훌륭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 불교학자들 가운데 상좌부불교가 오늘날 남방불교의 전통인 장로불교를 만들었고, 대중부라고 부르는 진보적 성향을 가졌던 이들이 나중에 대승불교의 교단을 이루는 모태가 된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대중부 계통에서 언급되고 있는 교전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대승불교의 모태가 될만한 사상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좌부 계통의 문헌에도 대승불교의 이론이라 할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따라서 굳이 대중부가 대승불교에 가깝고 상좌부가 대승불교에서 멀다고만 여길 수 없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러 각도에서 해설한 중관철학이 있다. 이 중관철학은 용수보살을 중심으로 형성된 독특한 대승불 교 철학이다. 이 용수의 불교사상에서 철저히 배격된 것 이 상좌부불교인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던 형식 윤리, 즉 그릇된 견해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의지가 담겨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부가 곧바로 대승불교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 볼 때, 대승불교의 움직임은 상좌부나 대중부의 흐름과는 별도로 새롭게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승가의 조직과 분열은 부처님의 입멸직후부터 일기 시작해서 2백여 년 동안 무려 20 여 부파가 난립하는 난맥상을 보이게 된다. 이 시대는 부파불교, 형식불교, 학문불교 등의 특징을 갖고 있지만, 그 2백여 년이 지난 후에는 대승불교라는 위대한 움직임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