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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마태 22,34-4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냐 고생 많으셨죠, 그런데 여러분 오늘 여기 왜 오셨습니까?
‘주님이 불러주시어’(대답)
모두 답을 알고 오셨네요.
네, 맞습니다.
이곳은 물론 성지는 아닙니다.
행여 어디 가서 ‘신부님 계신 성지에 갔다 왔다’ 얘기했다가는 저는 바티칸으로 끌려갑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거룩한 곳이죠.
이곳엔 많은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어요.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인 유해가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분들이 왜 40여 년 사제생활 동안 어떻게 나를 찾아오셨을까?
한꺼번에 오신 것은 아니겠죠.
40년 동안 전부 다 드라마틱하게 저에게 오셨습니다.
예를 들어 비안네 신부님, 비안네 신부님의 발목뼈가 모셔져 있는데 어떻게 오시게 됐는가 하면,
2014년에 카페 식구들을 데리고 성모님 성지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일정에 없던 비안네 신부님이 사셨던 아르스를 가보자고 제가 가이드에게 요구했어요.
그래서 정말 억지로 억지로 설득해서 아르스를 갔습니다.
아주 조그만 동네라서 버스 기사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이에요.
갔더니 작은 성당이 있고, 그곳에 비안네 신부님 유해가 사제복을 입고 누워계셨죠.
가이드는 우리에게 20분의 시간밖에 주지 않았어요.
너무 아쉬웠죠.
저는 그 유해 앞에서 ‘나중에 은퇴하면 이곳에 와서 신부님처럼 1년 정도 고해성사만 주다 가겠습니다.’ 하고,
너무 아쉽게 그분과 헤어졌어요.
그리고 루르드로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다녀오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녁마다 광장에 모여 묵주기도를 하죠.
아베~아베~ 노래를 부르면서, 각 나라는 자기 나라 깃발을 들고 돌면서 묵주기도를 드려요.
저는 우리 신자들 찍어 주기 위해 우리 팀을 벗어나 있었어요.
우리 앞 팀은 다른 나라 팀이죠.
그런데 그 팀에서 한 자매가 제게 오더니, 신부님께 유해를 드리고 싶다 해요.
무슨 소리냐 했죠.
그랬더니 묵주기도를 하고 있는데, 자꾸 소리가 들리더래요, ‘오른쪽을 보아라.’
그래서 보았더니 웬 동양 신부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더래요.
그러면서 ‘저 사제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성인 유해를 드려라.’ 하더래요.
그 자매는 성인 유해를 어떻게 갖고 있었는가?
개인이 모시고 있는 성인 유해는 그렇게 교회가 관리를 합니다.
사제가 1년에 한 번씩 가서 정성껏 모시고 있는지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서 교구청에 보내요.
개인이 모시고 있는 성인 유해는 그렇게 교회가 관리를 합니다.
그런 유해 중 하나였어요.
그 자매는 비안네 신부님 유해를 먼 길을 떠날 때는 항상 모시고 다닌대요.
어쨌든 오른쪽을 보니 동양 신부 하나가 있길래 환청이 들이나 무시했는데 계속해서 갖다주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온 것이고 비안네 신부님 유해인데 제게 주겠다고 해서, 얼떨결에 받았어요.
그런데 받고 가만히 생각하니 어제 내가 비안네 신부님 만나고 왔잖아요.
유해 앞에서 안타깝게 ‘아 한 시간 너무 짧다, 짧다.
은퇴하면 여기서 한 1년 정도 머무르면서 신부님처럼 한국 순례자들 고백성사 드리겠습니다.’ 했죠.
세상에! 그런데 비안네 신부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바로 다음 날.
그때 우리 한국 순례자들에게 호텔 로비에서 그걸 보여주었어요.
울고불고. 신자들도 너무 아쉽게 헤어졌거든요.
이렇게 여기 모셔져 있는 유해 하나하나가 다 그런 사연들이 있는 거예요.
예전에는 은퇴한 신부를 ‘은퇴 신부’라 했는데, 한 10년 전부터 ‘원로 사목자’라 바뀌어 은퇴한 신부들 뒷다리를 잡아요.
끝까지 사목하라는 거죠.
하지만 원로 사목자라는 이름이 있어도 대부분 은퇴신부님은 그냥 아파트에서 혼자 사세요.
그냥 그냥 늙어 가는 거죠.
그리고 예전에는 은퇴 후 은퇴발이 한 1년은 갔어요.
1년 동안은 전화도 오고 식사 대접하겠다고도 하는데, 요즘은 6개월 지나면 없어요.
그런데 ‘원로 사목자’라고 하는 이 타이틀이 저한테는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왜냐하면 은퇴하기까지 제가 그냥 평탄하게 본당 신부만 하고 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너무 지쳐 있었죠.
정말 이제 은퇴하면 사람 아무도 안 만나고 은수자, 숨어서 살고 싶었어요.
전화기도 없애버리고 아무도 안 만나고, 그것이 제 본마음이었죠.
그런데 그 원로 사목자라는 말 때문에, 이게 그 죽을 때까지 사목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면 난 어떻게 사목해야 하나?
묵상 끝에 두 가지 결론을 내렸죠.
첫 번째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
저는 피정 지도를 부제 때부터 했습니다. 참 오래됐죠
‘나에게 주신이 말씀의 카리스마를 그냥 묵혀서는 안 된다. 내가 병상에서 숨이 떨어지기까지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은퇴한 그다음 날부터 유튜브 강론을 바로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말씀 선포하는 것이 원로 사목자의 첫 번째 일이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무엇인가?
지금은 환난의 시대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상처에 피를 흘리고 살아요.
겉으로 표현을 안 해도 몸이 아파서 힘든 사람, 또 가족들끼리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그분들 어디 가서 기도할 장소가 없어요.
그렇다면 원로 사목자가 할 수 있는 두 번째 일은 뭐냐?
그분들이 와서 기도하고, 위로받고, 치유받고 갈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준비해야겠다.
아멘
이것이 제가 은퇴하고 난 다음에 은퇴하기 전부터 생각했던 두 가지 이유였던 겁니다.
사실 2010년에 내가 감곡 매괴 성당을 떠났습니다.
5년 동안 정말 많은 고생을 했죠. 그리고 한 2년만 더 있으면 명실공히 동양의 루르드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2년 연장 신청을 했는데, 당시 주교님이 NO 하셨어요.
왜냐? 감곡은 이제 급한 불 껐으니 죽어가는 배티성지 가라 하셨어요.
그때 마지막 인사하면서 본당 신부로는 다시 못 오겠지만 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배티 가서 7년 동안 허허벌판을 지금 가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런 모습의 배티 성지, 세계적인 성지로 만들었죠.
그리고 사실은 배티에 삼박골이라는 옛 교우촌이 있는데 그곳에 땅을 사서 치유센터를 짓고
현대판 교우촌을 만들어 보는 것이 제 은퇴 후 꿈이었죠.
그런데 주교님이 또, 배티는 급한 불 껐으니 서운동성당 가래요.
‘서운동 성당은 청주에서 첫 번째 성당이고, 서운동 성당 관할에 순교 터가 다섯 군데 있는데 관리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것까지 신부님이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4년 동안 서운동 성당에 부임해서 다 정리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가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한 가지가 있었어요.
뭘 잊고 있었을까요?
감곡 떠나면서 했던 말. 다시 감곡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
그때 감곡 신자들도 듣고, 성모님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나만 잊고 있던 거죠.
아마 신자들도 잊었을지 모르지만, 누구는 잊지 않고 있었을까요? 성모님.
원래는 이 터가 아니라 저 멀리 산의 다리 건너 장호원 쪽에 살려고 했어요.
저 산이 발이 백 개 달린 지네가 살았다는 백족산이에요.
전설에 의하면 전설에 하면은 남이 장군이 지네를 때려죽이고 똘똘 말아 감곡으로 던졌대요.
그래서 감곡에 가면 지네 바위가 있어요.
백족산 밑에 청미천이 흘러 남한강으로 흘러가는데 청정 지역이죠.
은퇴하기 1년 전에 집 짓고 살려고 저 밑에 과수원이 하나 샀던 거예요.
그런데 하천과 과수원이 사이에 3m 도로가 있었는데, 설계하고 보니, 세상에, 그 사이에 그 길이 하천이 되어버렸어요.
남한강 보호법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차는 다니는데, 그 법이 생기고 난 이후에는 집을 못 짓는 거예요.
그전에 진 집은 할 수가 없고요.
아무리 해도 집을 지을 수는 없고, 그러면서 은퇴 날짜가 다가와 은퇴했죠.
그런데 어디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은퇴하면서 바로 저 산 밑으로 내려가려 했는데, 어떡합니까?
아파트에서 8개월 동안 월세로 살면서 왜 저곳에 가는 것을 막으셨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아’ 내가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른 거예요.
그래 내가 다시 감곡 온다고 분명히 얘기해 놓고 잊고 있었구나.
그러면 감곡 근처에 빈집 하나 사서 리모델링해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빈집을 찾아보니 여기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여기가 교우 집이었고, 제가 14년 전에 와서 축성했다는 거예요.
저는 밤에 다녀와서 느티나무가 있었는지 연못이 있었는지 아무 기억이 없었죠.
그런데 낮에 와서 보니 조립식 건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뭐만 보였을까요?
느티나무, 그리고 세상에! 그 밑에 지금은 연못 주변이 정리가 되었는데, 풀 속에 무슨 물 같은 것이 보여.
연못이더군요.
저는 느티나무만 보고 이 땅을 산 거죠.
사람들이 제게 느티나무 신부님이라는 이름은 신부님이 스스로 하신 거냐 물어요.
아니에요.
저는 가는 성당마다 느티나무가 그렇게 많았어요.
특히 충청도는 느티나무가 많아요.
큰 느티나무가 많은 성당에 가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신자들이 ‘저 신부님 이름이 뭐더라?’ 하다
기억이 안 나면 느티나무 신부님이라 불었어요.
내 동생 신부는 소나무 신부예요.
사목하는 성당마다 소나무가 많았어요.
자연적으로 소나무 신부가 된 거예요.
아무튼 은퇴하고 난 다음에 원로 사목자로서 할 일 두 가지, 말씀 선포하는 것과 신자들이 기도하고 머물다 갈 수 있는 장소 만들기.
저 집은 작년 6월 6일 제가 입주했습니다.
입주해서 허물어져 내려가는 땅을 겨우내 디자인해서 시공 업자에 맡겨 올 3월 초 공사가 시작되어 10월 3일 축성식을 한 것입니다.
3, 4일 전만 해도 단풍이 절정이었어요.
지금은 앞에 보이는 나무들이 대왕참나무인데 올해 옮겼기에 몸살을 앓아 낙엽이 떨어지는데,
원래 대왕참나무는 한 겨우 내내 단풍이 든 채로 잎이 붙어 있어요.
그리고 봄이 되어 새잎이 나오면 그때 떨어져요.
그래서 이 나무를 심은 첫째 이유는 단풍이고, 두 번째가 그늘인데, 2, 3년 지나면 아마 나무들이 붙어 터널을 만들 겁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에는 황금 느티나무도 그저께 최고 절정에 있었어요.
제가 사진을 찍어 카페에 올렸죠.
눈부시게 황금색이었어요.
지금은 바닥에 많이 떨어져 있는데, 그것이 다 붙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이지만, 그때는 전혀 하늘이 보이지 않았죠.
그리고 근처 30리 안에 있는 느티나무는 얘가 엄마 나무예요.
여기서 씨가 날아가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신기한 것이 이곳 느티나무는 색깔이 달라요.
저도 느티나무 있는 곳에서만 본당 신부 했지만, 이런 색이 나오지 않아요.
도시에 있는 느티나무는 절대 이런 색이 나오지 않죠.
느티나무는 지금은 색이 좀 바랬지만 이틀 전만 하더라도 밝은 황금색 있죠.
아주 밝은 황금색, 눈이 부시게.
그리고 그 밑에 떨어져 있는 낙엽도 다 황금색이었어요.
지난번 나무 박사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보통 나무가 300살이 넘어가면 한쪽이 죽는대요.
사람들이 허리가 꼬부라져서 지팡이를 짚어야 하듯 쇳덩이로 받쳐주어야 한대요.
그런데 이 나무를 보더니 깜짝 놀라요.
500살 정도인 이 나무는 문화제로 등록할 조건이 충분하지만 제가 일부러 안 해요.
하면 간섭이 많아요. 철조망도 둘러야 하고 사람들 바글바글 찾아오고.
여기서 제가 이제 봄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사이 푸르렀던 나무가 옷을 갈아입고 이렇게 낙엽으로 떨어질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삶도 같지 않을까 생각하며
카페에 사진을 올리며 포토 에세이를 이렇게 적었죠.
‘인간도 이 세상 여행 마치고 긴 여행 떠날 때 단풍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늙어 가면서 추하게 늙는 사람들 많아요.
늙어가면서 포기하지 못하고 죽을 때 수의에 주머니가 없는 것을 모르고 베풀지 않고 땡전 한 푼 못 가져갈 것을.
게걸스럽고 탐욕스럽게 늙어가는 추한 늙은이들 많아요.
젊었을 때는 마음대로 살았다 하더라도 한해 한해 나이를 먹어 가면서 또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이렇게 나무한테 배우는 교훈대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창조 섭리를 다 몸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죽기 전에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나무들은 알고 있어요.
그리고 떨어지고 나면 거름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죽고 난 다음에 내 후손, 내 후대 사람들이 우리들이 살아온 모습을 되새기면서
용기를 내게 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멘
오늘 복음은 짧죠.
오늘 복음의 핵심은 뭐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그냥 사랑하라 그랬어요?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첫 번째 하느님을 사랑하고, 두 번째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라.
솔직히 어느 것 하나 쉬운 거 없어요.
첫 번째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맞습니까, 틀립니까요?
여러분들, 솔직히 이제껏 살면서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해 왔습니까?
제가 강론 때 그 얘기 자주 묻지요.
주변에서 외인, 혹은 대녀 대자가 믿음이 도대체 뭐냐 물으면 뭐라 답해주실 겁니까?
뭐라 하라 했죠?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은 머리에 새기고 가세요.
그렇게 못 산다고 하더라고 적어도 목표는 있어야 하죠. 그렇죠?
‘나는 죽기까지 이제 하느님을 열 번째 자리에 모시고 살 겁니다’가 아니라 첫째 자리.
여러분은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삽니까? 못 살잖아요.
자식이 첫째고, 아픈 내 몸뚱아리가 첫째 자리고, 돈이 첫 번째 자리고, 내 취미 생활이 첫 번째 자리고,
하느님은 당서열 한 20위 밖으로 밀려나 있고 급할 때만 꺼내쓰는 자판기요.
그냥 기복으로 끝나고 말죠.
하느님은 여러분들의 자판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 비가 땅에서 밑으로 올라갑니까, 아니면 하늘에서 밑으로 내려옵니까?
참 바보 같은 질문 한다고 하는데, 은총의 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겁니까, 아니면 밑에서 올라가는 겁니까? 하늘에서 내립니다.
하느님께서 첫째 자리에 좌정하고 당신 자리에 앉아 계실 때, 그 밑에 모든 청원은 은총의 비를 맞고 열매를 맺는 거예요. 아멘
자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온종일 머릿속에 자식만 첫째 자리에 있고 하느님은 어디 간지 몰라.
자식에게 축복 주는 분은 하느님인데 자식 밑으로 내려가 있다는 거죠.
주님 저한테 물질의 축복 주세요, 그러면 정말 좋은 곳에 쓸게요.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면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산 적이 몇 번 되는가.
급할 때는 첫째 자리에 모실 거예요.
몸이 아플 때, 벼랑 끝에 몰렸을 때는 그렇지만 그것이 해결되고 나면 ‘다 때가 돼서 해결된 거지’
화장실 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죠.
늘 철없는 아이처럼 급할 때만 찾고 보채고 땡깡부리고 살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지 마십시오.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다 우상이에요.
여러분들이 온종일 살면서 하느님 생각보다는 돈 생각이 훨씬 많았다면, 그 돈이 우상이에요
자, ‘우상’의 정의는 뭐냐? 한번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
이제 우상의 개념을 아셨죠?
금송아지만이 우상이 아니에요.
무당집에 가는 것만이 우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우상이죠.
신앙의 핵심, 믿음의 핵심은 ‘죽기까지’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살다 가신 분들이 순교자 맞죠?
‘목숨 살려 줄게 이 묵주 밟아, 십자가에 침 뱉어. 밖에 나가서 애들이랑 살아야 하잖아.’
하지만 안 밟았어요.
아이들이 밖에서 ‘엄마, 엄마. 침 뱉고 우리랑 살아.’ 그래도 안 밟았어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독한 인간, 광신자로 보였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나 살려고 다 몇 초 배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어요.
내가 이렇게 죽어도 자비하신 하느님이 내 새끼들을 거둘 것이다. 아멘
그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외인들이 보면 그렇게 죽은 그들이 아주 어리석어 보이죠.
‘아이고 등신들. 밟으라 할 때 밟고 나가서 고백성사 한번 진하게 보고 애들 데리고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
저 혼자 천국 가겠다고 안 밟고 새끼들을 거렁뱅이 만들어?’
손익계산 대차대조표가 하느님과 우리 것이 다른 거죠.
우리는 하느님보다 자식이 먼저고, 아픈 몸이 먼저고, 돈이 먼저고, 교만함과 우월감이 먼저인 양 살 때가 많았습니다.
또 두 번째 계명인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라.’
우리는 한 번이라도 내 몸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내 몸이 아프고 병들고 고통스러우면 견디지 못하죠.
어떻게 해서든 나으려고, 병든 내 몸뚱아리 살리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내 몸 아끼듯 이웃 사랑하는 것은 힘들어요.
그래서 사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불가능해 보여요.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신앙 선배들 가운데 이렇게 살다 가신 분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두 계명을 지키고 완벽하게 지키고 살다 가신 분들이 있죠.
도대체 그분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삶을 살았길래 기적같이 그 두 계명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고 살았을까?
분명히 비법이 있었어요.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첫 번째, 그분들은 고통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사신 분들이에요.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 한발 다가서는 신앙인으로 살면 두 계명을 지킬 수 있어요.
고통 자체는 선이 아닙니다.
고통 자체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이죠.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 우리는 외로워지고 고독해집니다.
그때, 바로 건강할 때 못 만났던 예수님을 만나요.
건강할 때는 내 안에서 늘 밀어내던 그 예수님을 붙잡기 시작해요.
성당도 안 나가고 기도도 안 했던 사람이 아프기 시작하면 늘 밀어내던 그 주님의 다리를 잡기 시작해요, 살려달라고.
그래서 고통 자체는 선은 아니지만, 신비스러운 거예요.
베드로 사도 아시죠?
베드로가 몇 번 배반했습니까? 세 번.
첫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했어요.
왜 성서는 일대 교황이면서 으뜸 사도인 베드로 사도의 치부를 드러내는가?
싹 지워버릴 수도 있었잖아요. 그죠?
세 번 배반 전과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고개를 못 들고 살았죠.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또 나타나시어 물으셨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몇 번 물었어요? 세 번.
그렇죠, 죄의식을 씻어 주시는 거예요.
세 번 물음으로써 해방, 치유된 거예요. 아멘
베드로 사도의 이 세 번의 배반이라는 고통이 없었다면, 베드로 사도는 이름뿐인 일대 교황으로
우리의 존경받는 베드로 사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또 여러분들 다윗 왕이 얘기할 때 ‘다윗 성왕’이라는 ‘거룩한 성(聖)자’가 붙어요.
그런데 다윗이 한 짓을 보면 거룩한 것은 없어요.
사실 남의 아내 꼬셔 겁탈하고 그 사이에서 솔로몬이 태어났죠.
그리고 겁탈만 했나요, 살인죄까지 저질렀죠.
더운 여름날, 왕궁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여자가 발가벗고 목욕하고 있어.
음란 마귀가 들어오죠.
물론 음란한 생각이 순간 들 수 있죠.
그러나 그때 다윗은 고개를 돌렸어야 했어요. ‘아이고, 못 볼 것 보았구나.’
하지만 다윗은 시종에게 저 여자 끌고 들어오라 했죠.
누구냐 하니 전쟁에 나가 있는 우리야의 아내라 합니다.
그리고 음욕을 못 이겨 그 여자를 범합니다.
하지만 돌려보내고 난 다음에 불안해지기 시작해요. 임신했을까 봐.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전쟁터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 아내랑 같이 자라고 해요.
하지만 우리야는 영문도 모르고 ‘내 동료들은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하면서
갑옷을 입은 채로 그냥 문밖에서 있다가 집에 안 들어갔어요.
다윗의 첫 번째 작전이 실패한 거죠.
남편이 들어가서 동침해야만 애가 생기더라도 그 사람 아이라 그럴 텐데.
그다음에 어떻게 했어요?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가지고 가는 이놈을 최전방에 내보내서 반드시 죽여라.’
우리야는 그것도 모르고 왕의 편지를 상관한테 갖고 가죠.
상관이 보니 죽이려는 거야.
그리고 이 편지로 실제로 죽였죠. 전사.
다윗은 간음죄만이 아니라 살인죄까지 저지른 사람이에요.
그리고 시치미 떼고 있는데 누구는 알았습니까?
나탄 예언자는 알았죠.
다윗 앞에 와서 호통을 칩니다.
그때야 다윗은 옷을 찢으면서 회개해요.
그다음부터는 성왕으로 바뀝니다.
그 처절한 살인죄 간음죄를 겪고 악의 밑바닥에서 헤매던 다윗이 성왕 소리를 듣는 거예요.
고통이라고 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절대 성왕이 될 수 없었죠.
또 바오로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만나기 전에 이름은 사울이죠.
유명한 랍비 있어요.
랍비 중에서도 엄청나게 똑똑한 랍비 있어요.
그리고 이 사울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이는 권한이 주어졌었죠.
다마스쿠스에 천주교인들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을 타고 다마스쿠스로 가다
언덕에서 빛을 받으면서 굴러떨어져 눈이 멉니다.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로 들어갔더니, 하나니아스 예언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세례를 주고 ‘바오로’라 이름을 바꿔줘요.
사울은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가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에요.
박해하는 괴수 중에 제일 왕이었던 사울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바오로가 됐죠.
그런데 바오로 사도에게는 불치병이 있었다는 것을 아세요?
온몸이 가시로 찔리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랬어요.
너무너무 그 병이 괴로워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을 이병으로부터 치유해 달라고 기도했대요.
그런데 치유가 안 됐어.
성서학자와 의학자들이 연구하기를 바오로 사도의 이병을 간질로 봐요.
지금은 약을 먹으면 그것을 억제하지만, 옛날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반에 한두 명은 간질 앓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다른 애들 다 나가라고 하고 아이를 돌보았죠.
거품 무는 아이 무섭다고 친구들이 가까이 가지 않았죠.
바오로 사도는 대 웅변가예요.
설교하다 간질이 일어나서 설교대 아래서 뒹굴면 사람들이 난리가 났죠.
깨어났을 때 얼마나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고 얼마나 죽고 싶었겠어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주님 저 써먹으려면 이 가시 좀 뽑아 주세요.’ 그랬죠.
그랬는데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안 뽑아 주시고 코린토 2서 12장 9절에 말씀을 주시죠.
‘바오로야,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강하고 건강한 자, 가진 자가 아니라 약하고 고통받는 자 안에서 내 권능은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답을 합니까?
‘이제 알아들었습니다, 고통이 무슨 뜻인지. 제가 이 가시마저 없다면 저는 무지 교만해질 사람입니다.’ 하면서
바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아멘
그때부터 바오로 사도는 나는 간질병 환자다, 이 가시가 바로 나를 주님께 연결하는 다리다,
이 가시 빼버리면 다시 옛날처럼 나쁜 놈이 될 거라 그랬어요.
주님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아픈 몸뚱아리 치유를 청할 때 주님은 치유시켜 줄 수도 있지요. 아멘
그런데 어떤 때는 치유가 안 되는 대신 영적으로 더 성장시켜 줄 때가 있어요. 아멘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을 지켰던 분들의 그 삶을 뒤돌아보면 고통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던 분들이었어요.
두 번째로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이 두 계명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순종만큼 힘든 게 없죠.
왜냐하면 내 이성과 합리주의적인 내 성향과 늘 부딪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순종의 결과는 순명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이 내립니다.
어제 하루 종일 피정시키면서도 순명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향주삼덕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에 정말 죽이려 했죠.
따지지 않고 자식 주신 하느님이 거두어 가신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 이야기하나?
마치 욥과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그 순명의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축복받았죠.
또 모세의 순종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래서 순명의 결과는 치유요, 해방입니다.
또 성모님은 순종으로 인해서 성모님에게 붙여지는 수많은 영적 명예 칭호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레지오 쁘레시디움 숫자만큼 성모님의 이름이 많지요?
그중에서 성모님에 붙여진 가장 큰 이름은 뭘까요?
‘천주의 모친, 하느님의 어머니’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이 두 계명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아멘
세 번째로 혀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두 계명을 지켜 나갑니다.
많이 기도하고 많이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이 있어요.
지껄이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비수가 되어 사람에게 상처를 주죠.
늘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축복의 말은 죄인을 회개시키기도 하고 영적인 상처를 낫게 하는 힘이 있어요. 아멘
내 입에서 축복의 말 아름다운 말을 하기도 짧은 인생인데 왜 입만 열면 죄를 짓고 살까?
창조주 하느님이 사람을 뭐로 빚었죠? 흙.
흙으로 빚었을 때는 그냥 흙 인형이에요.
눈코입을 다 만들고 오장육부를 만들고 제일 고민했던 것이 뭐냐?
혓바닥을 어디에 둘까?
처음에는 혓바닥을 겨드랑이 밑에 붙어 놨는데 걸을 때마다 혓바닥이 걸려 불편해.
그다음에는 등에 붙여 놓았더니 옷을 입을 때마다 뒤집혀.
그래서 생각하다 그래 거기가 제일 좋겠다고 하시며 목 안에다 깊숙이 혓바닥을 붙여 놨어요. 하지만 그래도 불안해. 왜?
창조주 하느님을 알고 계셨죠.
혓바닥 한번 잘못 놀리면 집안이 뒤집히고 혓바닥 한번 잘못 놀리면 성당이 뒤집히고 나라가 뒤집히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어떻게 서든지 은밀한 곳에 감춰두어야 말을 덜 하거든.
그래서 ‘담을 쌓자’ 이빨을 만들었죠.
이를 만들어 담으로 둘러쌌든 대도 불안하더래요.
그러면 두꺼운 가죽으로 앞을 막자, 그래서 입술로 더 막아 놓은 거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은 틀니까지 빼가면서 침까지 튀겨가며 남 이야기로 시작해 남 이야기로 끝나고 뒷담화하죠.
여러분들 거룩한 성(聖)자가 한자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죠?
귀이(耳) 자에 입구(口) 자에 왕왕(王)자로 이루어져 있죠.
거룩할 사람이 되려면 자기 귀와 입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죠.
가려서 들어야 하고 함부로 얘기해서 안 된다.
지금 이야기한 이 세 가지의 삶을 사신 분들은 그렇게 기적처럼 여겨지는 두 게명을 행하고 사셨더라는 겁니다. 아멘
첫째, 고통의 의미를 깨달으신 분.
둘째, 하느님께 절대 순종하시는 분.
셋째, 입을 다스리는 분.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 있으면 우리도 어렵지 않게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살 수 있어요. 아멘
그리고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둘째 셋째 자리로 하느님을 내려놓았다가 ‘아유 하느님, Sorry! 죄송합니다. 다시 올려 드릴게요.’
아멘
다시 올려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 이웃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 많잖아요?
그 기적 같은 것들이 이 세 가지, 밑에서부터 이야기하면 혀를 다스리고, 하느님께 순종하고,
또 고통이 올 때마다 분노하지 않고 고통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주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게 해주세요. 주님, 2천 년 전에 아픈 사람 치유해 주셨잖아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까지 저를 불러 주셨잖아요. 도와주세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세요.
저는 모든 것을 다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멘’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오늘 주님이 하신 두 가지의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인 계명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3년 연중 제30주일 (10/2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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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