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아니면 도피
어릴 때 어떤 책을 읽었느냐에 따라 개인의 앞날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야생의 위로>>(The Wild Remedy, How Nature Mends Us)의 저자 에마 미첼(Emma Mitchell)이 그러하다.
박물학자요, 저술가이며, 삽화가인 그녀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책꽂이에서 찾아낸 <<영국 식물도감>>(The Concise British Flora in Color)에 매혹되어 식물학이란 별세계로 빠져들었다. 25년간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한 그녀에게 이 책은 거실을 나가지 않고도 봄날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종이와 잉크로 만들어진 항우울제였다고 진솔하게 말한다.
<<야생의 위로>>는 그녀가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의 북동부 지역인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 펜스(The Fens)로 옮긴 것에서 시작한다. 우울증과 싸우며 자연에서 야생의 꽃과 식물을 수집하고 새와 동물에 관한 그림과 사진을 모아, 열두 달 자연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야기가 있는 달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일기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의 자연풍경을 차례로 쓰는 게 순리임에 반해, 그녀의 이야기는 10월부터 시작하여 9월에 끝난다. 그 낯선 순서배열이 의아했으나, 2, 3월 이른 봄의 이야기를 읽어나가자, 사연을 알 수 있었다.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것이 연상되었다. 우울증을 앓는 그녀에게 만물이 소생하는 초봄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의 머리는 온갖 상념과 통렬한 자기 비난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제대로 하지 못한 일, 완전히 망쳐버린 일을 끊임없이 헤아린다. 끝내 “난 무가치한 인간이야”라며 절망한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봄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낙엽이 땅을 덮고 개똥지빠귀가 철 따라 이동하는 10월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라는 수많은 풀과 꽃과 나무, 그리고 새와 동물, 어류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자연 교과서를 보여주듯 섬세하다. 그중에서 새는 우울증 완화에 도움이 되어 가까이 두었다고 한다. 풍광이 좋은 오두막집에 살아 숲에는 항상 새들이 지저귄다. 더 가까이서 소통하기 위해 먹이를 마련하여 정원 안쪽으로 숲속의 온갖 새들을 불러 모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새들끼리 텃세를 부리며 서로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자리다툼을 하는 것이다.
그녀는 3월 초이면 수만 마리의 찌르레기 떼를 보기 위해 먼 곳 바다까지 차를 몰고 친구와 함께 간다. 새 떼의 공중 원무(圓舞)는 그녀의 머릿속에 온갖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다 문득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작은 무리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다시 합치기도 한다. 하늘 여기저기서 벌 떼처럼 촘촘하게 뭉쳐 드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나무 위로 길게 줄지어 굽이치며 날아간다. 그런데 그 찌르레기의 원무에 낫 모양의 날개가 달린 포식자 송골매 한 마리가 공격 목표를 향해 같이 날아다닌다. 송골매가 찌르레기 사이에 끼어들어 사냥하는 경우, 새 떼는 더욱 촘촘히 날아 포식자를 교란하며 더욱 현란하고 복잡하게 움직인다. 포식자로부터 스스로 지키는 방어본능의 지혜일 것이다.
5월이면 그녀에게 생각나는 새가 있는데 가장 놀라운 소리를 내는 희귀 철새인 나이팅게일이다. 그녀는 이 새의 울음소리를 일련의 음악적인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흔히 ‘새처럼 자유롭다’(Free as a bird)라는 말을 한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 11월 임진강 비무장지대 하늘에 편대를 지어 휴전선을 넘나들며 나르는 기러기 떼들의 비상에서 그들의 자유로운 몸짓을 보았다. 그런데 실상은 새들도 그 머무르는 곳이 일정한 장소로 제한되어 있다.
’새처럼 도망하라‘(Flee as a bird)는 찬송이 있다. 미국의 쉰들러(Mary Dana Shindler, 1810-1883) 여사가 1840년에 작곡한 찬송이다. 이 찬송은 “새처럼 그대의 산(안식처)으로 피하세요, 죄악에 지친 그대여”라 시작된다.
류시화 시인은 그의 수필에서,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라고 했다. 이 말은 새가 자유를 원하는지 아닌지와는 관계가 없는 수사이다. 새장 안의 새는 옛 숲을 사랑한다는 도연명의 시는 자유를 위해 날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를 수 없는 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지빠귀가 바로 그런 새다. 이 새는,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좋아하지 않는 야성의 기질로 인해, 애완용으로 기를 수가 없다. 따라서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 새를 애완용으로 소유하는 것이 불법으로 되어있다.
이런 지빠귀의 야성을 순화시키려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대계 미국인인 솔 벨로(Saul Bellow, 1915-2005)였다. 그의 집은 숲 근처에 있어 갈색 지빠귀 떼가 날아와서 쉬다가 가곤 했다. 지빠귀의 예쁜 소리에 반한 그는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와 새장에 가두었다. 이튿날 갈색 지빠귀의 어미가 입에 먹이를 물고 새장으로 날아와 새끼에게 정성껏 먹이를 먹였다. 그런데 다음 날 새장으로 가보니 새끼가 새장 바닥에 죽어 있었다. 얼마 후 영국의 유명한 조류학자 아서 윌리(Arthur Willey)가 그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어린 솔은 조류학자에게 갈색 지빠귀가 왜 갑작스럽게 죽었는지를 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갈색 지빠귀 어미는 자신의 새끼가 새장에 갇힌 걸 알고 일부러 독초를 먹였단다. 평생 새장에 갇혀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긴 것이지.” 이는 어린 소년에게 심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절대 야생 동물 채집을 하지 않았다.
어미 새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자유를 빼앗긴 노예로 살기보다 차라리 장렬한 죽음을 택하라는 명령인가. 진실을 존중하는 개인으로 남기 위해 이 사회에서 스스로 지켜야 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야생의 자연은 모든 생명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주소다. 그곳에는 우리가 모든 생명 넘치는 풀과 꽃과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천부적 자유함이 주어졌다. 이 땅이 야생을 빼앗긴 황량한 도시나 황무지라면 우리의 자유로움은 사라질 것이다.
존엄한 개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자유를(Free as a bird) 쟁취해야 하는지, 아니면 피난처인 거룩한 산으로 피해야 (Flee as a bird) 할지는 각자 철학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