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리나 호수와 트레치메(오른쪽)
코르티나담페초에서의 둘쨋날(6월 7일) 아침이다. 일어나자마자 터미널 위쪽 오솔길을 달렸다. 어제 오후 혼자 뛴 길을 다시 뛰었다. 한 포인트에서 크리스탈로(3216m)와 포마가뇽(2450m), 소라피스(3205m), 데 로제스(3225m)와 디 메초(3244m)와 디 덴트로(3237m)를 파노라마로 바라볼 수 있다.
호텔 조식을 조금 느긋하게 들고 터미널 올라가려고 양치질을 하며 옷을 갈아 입는데 분명 어제 바지 주머니에 찔러둔 발 가르데나 M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제 피자 먹으면서 빠뜨렸나 싶었다. 도비아코 가는 오전 8시 5분 445번 첫 차를 타고 20분쯤 달려 카르보닌에 내렸다. 나만 M카드가 없어 2.5유로를 현금으로 냈다. 버스에서 내려 오롯한 진입로를 생각하고 한참 두리번거렸는데 쭉 뻗은 2차로 외에 이렇다 할 진입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나 하다가 그냥 도로를 걷기로 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차가 별로 없어 걸을 만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차량 왕래가 많아져 매연도 문제인 데다 포장된 도로를 걷다 보니 지치고 힘든다. 언뜻언뜻 산봉우리들이 고개를 내밀어 반겨줬지만 도무지 길이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미수리나 호수(해발 1756m)를 걸어가고 있다. 당연히 오롯한 트레킹 루트가 있는줄 알았는데 이곳 계곡과 급류가 워낙 세 그런 길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길을 걷다니, 그것도 7㎞나, 운전자들의 표정에 언뜻 황당함이 묻어난다.
2시간여, 지치고 힘들 법했다. 지치면 그냥 돌아가 기다리면 내가 호수 보고 뒤따라 가겠다고 했다고, 집친구가 단단히 토라졌다. 혼자 뿔이 나 앞서 걸었고, 난 사진을 계속 찍으며 따라갔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오르막이 끝나고 이내 너른 평지가 나와 연봉들이 펼쳐졌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트레치메의 옆모습이었다. 그렇게 너른 길을 20여분쯤 걸으니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수리나 호수와 소라피스(왼쪽)와 크리스탈로 연봉. 두 봉우리가 이곳에서는 하나로 보인다.
이때는 몰랐다. 내가 24시간 뒤 저 산봉우리 끝에서 이곳을 한 점으로 보게 될줄.
미수리나는 처음에는 브라이에스만 못한 것 같아 보였다. 모터바이크족들이 여럿 몰려 시끄러웠다. 우리가 맨처음 앉은 벤치 옆에 빨강색 오픈 스포츠카가 이상하리만큼 물가에 가까이 주차한다. 이 인간들 왜 이러지, 싶었는데 정장 차림에 은발 노신사가 내리더니 반대편 차문을 열어 부인을 일으키는데 부인이 반신 마비인 것 같다. 아하 그래서. 부인과 함께 호수를 담은 셀피를 찍어 달라며 우리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부럽기 짝이 없었다.
역시 거닐어 보니 트레치메와 카디니(2839m), 크리스탈로 연봉을 완상하는 맛이 쏠쏠했다. 역시 브라이에스보다 높은 지역이다보니 시시각각 구름의 모양이 바뀌는 것이 박진감 넘쳤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 호수 건너편 높은 봉우리가 뭔가 싶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소라피스, 다시 말해 코르티나담페초 뒷산이었다. 다음날 팔로리아 케이블카로 이곳을 올라 조망하고서 깜짝 놀랐다. 멀리 미수리나가 한눈에 잡힐 듯 보였기 때문이다.
가운데 호텔 뒤로 난 길을 따라 트레치메 쪽으로 구부러져 오르면 아우론조. 그걸 몰라 도전해보지도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그리고 통한의 아우론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뒤늦게 깨달았는데 미수리나 호숫가 안쪽 끝에서 아우론조 산장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물론 호수 저쪽 끝에 갔을 때 호텔 앞마당에서 길이 쭉 이어지는 것을 보고 어디로 향할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코르티나담페초였는데 그때는 미처 그걸 몰랐던 것이다. 지도를 구해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코르티나에서 걸어서 미수리나까지, 걸어서 아우론조까지 충분히 오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호수 물 위로 트레치메 봉우리 바라보며 스테이크 한 입 우왕!
여튼 우리는 배가 고파질 때까지 쉬엄쉬엄 호숫가를 뱅 돌아 괜찮아 보이는 피자집 쿠치나 티피카에 들어갔다. 전날 저녁 옆자리 이탈리아 할머니 혼자(아, 이탈리아 사람들은 각자 피자를 달리 시켜도 절대 한 조각씩 떼서 나눠 먹지 않고 한판을 오롯이 먹는다, 우리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맛있게 먹던 가지 피자와 스테이크를 시켰다. 영수증이 없는데 집친구 기억에 따르면 스테이크와 피자, 화이트와인, 맥주, 커피 다 합쳐 25유로쯤, 다시 말해 브라이에스에서의 절반 정도에 먹었다.
점심 배불리 먹고 아우론조 오르막길 주위를 괜히 두리번거리다 다시 도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 7㎞ 걸어 내려왔다. 4시쯤 카르보닌에 도착해 20여분쯤 노닥거리다 버스를 타고 코르티나로 향했다. 난 집친구를 먼저 보내고 전날 저녁 혼자 뛰다가 잃어버린 M카드를 찾겠다며 피아메스에 혼자 내렸다. 휴양림 같은 것이 있어 기분좋게 거닐다 도로 건너 언덕배기로 올라붙어 전날 뛰었던 오솔길로 올라붙었다. 글로 표현하니 간단한데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하여튼 오솔길을 바닥만 보며 걸은 지 40분여, 의외로 코르티나 가까운 쪽에서 흰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했는데 맞았다. 전날 잃어버린 M카드가 온전하게 있었다. 기적이다 싶어 집친구에게 문자 넣었더니 믿기지 않는단다. 날아갈 듯 기뻐하며 돌아오는데 날씨마저 좋다. 그동안 뚜렷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연봉들이 또렷한 자태를 드러내 보였다.
크리스탈로 연봉
저 크레인만 없다면. 뒤 봉우리들은 사흘 만에 모습을 드러내고 코르티나 나흘째와 닷새째는 또 자취를 감췄다.
전날 저녁을 먹었던 조르지오 게디나를 찾아가 이번엔 마르게리따 7.5유로 포장을 주문하고 선 채로 와인 한 잔 3유로, 10.5유로만 달랑 썼다. 선 채로 와인 잔 빙빙 돌리며 집친구와 얘기를 나누니 이탈리아 사람 다 됐구나 흡족했다. 호텔 객실에서 발코니 창에 비치는 콜 로사 바라보며 피자 조각 베어 무니 이 맛도 참 별나다.
코르티나담페초 숙소 아퀼라 호텔 객실 발코니에 비친 콜 로사의 모습이다. 밤 9시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