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수록을 쓴 실학자 유형원은 "우리나라 풍속은 수레를 쓸 줄 모른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은 조선에서 정말로 수레를 쓰지 않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유형원의 말은 거짓이다.
유형원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많은 수레들이 잘만 쓰였다. 아래는 그 사례들이다.
1616년 8월 21일자 광해군일기 중초본 기사에 의하면, 광해군이 궁궐을 짓기 위해 벌인 공사 현장에 목재를 실은 수레들이 몇 백대나 필요할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1633년 4월 11일자 인조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대군(大君 임금의 정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의 가옥 공사를 하기 위해 돌과 나무를 실어 나르는 수레가 도로에 가득하고 아침저녁으로 노동자들이 일하는 소리가 인근에 들릴 정도라는 내용이 보인다.
1664년 10월 15일자 현종실록의 기사에는 흥평위(興平尉)의 집으로 실어가기 위해 돌을 운반하는 수레가 무려 몇 리에까지 뻗어 있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조선에서 수레가 안 쓰인다는 글귀가 적힌 반계수록은 1670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이 현종실록의 기사는 반계수록이 나온 때보다 고작 4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쓰면서도 정작 자기와 같은 시대에 벌어지던 일조차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숙종 15년 1689년 10월 2일자의 기사에는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와 의주(義州)의 세 곳에 있는 수레들의 수가 8백여 대에 이른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1794년 11월 1일 정조실록에는 화성을 쌓기 위해 벌인 공사에 아침저녁으로 1천 마리의 소와 1백 대의 수레가 건축 자제들을 실어 나른다는 말이 나온다.
이상 언급한 자료들만 보아도 조선에서 수레가 전혀 안 쓰였다는 유형원의 말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혹시 유형원이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마한 사람들은 소와 말을 탈 줄 모른다.’라는 내용을 읽고 ‘조선에서는 수레를 쓸 줄 모른다.’라는 말을 지어냈는지도 모른다.
물론 동이전의 내용 역시 사실이 아니다. 2003년 1월 10일에 발견된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마한 시대에 사용된 말이 끌고 다니는 수레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니까. 즉, 마한인들은 말을 길들여서 수레를 끌고 거기에 타고 다녔던 것이다.
이래서 문헌에 써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으면 안 된다. 그래서 맹자도 “책에 적힌 내용이라고 다 믿는다면, 책을 아예 안 읽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첫댓글 대인수레 말하는것 같은데요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타는 수레의 사용은 조선에서 극히 미비했지만, 물자를 운송하는 수레는 조선도 꽤나 많이 사용했으니, 수레를 쓰는 법 자체를 아예 모른다는 유형원의 말을 그대로 믿고 조선에 수레 자체가 전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서 여겨서 올렸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수레와 관련해서 여러 사이트들을 돌아다녀보니, 조선에는 산지가 많아서 아예 수레 자체를 전혀 안 썼다고 아는 사람들도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