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날 특집 시모음> 임보의 '완전한 부부' 외 + 완전한 부부남편은 장님이고 아내는 앉은뱅이그들은 따로 따로 살 수 없지만부부가 되어 잘 살아간다남편은 아내의 발이고아내는 남편의 눈이다남편의 등에 업힌 아내가 앞을 보고아내를 업은 남편이 길을 간다아내를 밭에 갖다놓으면 김을 매고아내를 시장에 데려가면 장을 본다두 불구가 만나 하나로 완성된동심일체 완전 부부온전한 사람들은다 결손 부부들이다(임보·시인, 1940-)+ 부부(夫婦) 돌아서서 한번 손을 흔들면 생소한 이웃이 되고 말 인연을 짊어지고 집요하게 숨어드는 한 칸의 작은 우리. 검은 머리채로 너의 가슴을 덮고 피가 뿜어지는 얘기를 듣는 밤엔 외면하고 싶은 생활도 잠시 어둠에 숨는다. 태고에 점지(點指)하여 외로움을 저당하고 얻은 또 하나의 외로움. 애증(愛憎)을 다투면서 가난하게 기대인 약속의 방에 덧없는 꽃이라도 놓아보는 마음이여.(강계순·시인, 1937-)+ 부부 인연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함이 시소처럼 평형이 맞아서만 아니고 서로의 잡고 있는 연(緣)에 의함이 크다 조건보다 어느 하나 둘이 모자란다 해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 인연일 수도 첫 만남 첫 느낌 마음의 움직임이 연일 수 있다 그 인연이 씨앗을 틔우고 정(情)이란 잎이 생겨 사랑의 고동이 울려 퍼진다 부부란 같은 배를 타고 서로 행동을 조절해야 아름답고 좋은 항해가 되는 것 때로 악풍을 만나 큰 풍랑이 일어도 부부가 방향계를 조절하여 행복의 꽃을 피우려 끝없이 노력하는 것.(박태강·시인, 1941-)+ 수작酬酌당신 왜 나랑 결혼했어?싱겁기는, 당신 수작에 넘어간 거지 머아내랑 농을 주고받다 생각하니수작이란 그 말잔을 섞어 수작이요말을 섞어 수작이요마침내 몸을 섞으니 수작이라수작이라는 그 말, 듣고보니얼마나 설레는 말이냐수작 한 번으로 아내를 갖고수작 두 번으로 아이 둘을 가졌으니수작이라는 그 말얼마나 신통방통한 말이냐그래, 당신 말이 맞다!수작에 넘어갔다는 그 말도 맞고딴 데서 수작 걸지 말라는 그 말도 맞다!(박제영·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행복해서 자지러지게웃는 그대의 모습이보고 싶다하얀 구름이 휘어감은산자락처럼그대를 안고서로 몸 비비며거친 숨결이 온몸에 단풍처럼 타오르도록하나가 되는 사랑을 하고 싶다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기웃기웃 눈치 보며사랑할 필요가 없다혀끝으로 다가오는 감촉만으로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기에서로의 마음을 확 열어놓아꼭 빠지면 빠질수록 좋기만 하다우리는 하늘의 허락으로서로를 사랑하는부부니까 (용혜원·목사 시인, 1952-)+ 성인(聖人) 못생기고재미없고배경 없고능력 없는나 만나 다 늙었다고 아내 등 쓸어줍니다나 만나 고생했다고 남편 손 잡아줍니다(김일연·시인, 1955-)+ 늙은 부부오래 살아서등이 굽은 소나무 두 그루흰 눈을 머리에 이고 수저질 한다푹 익은 된장과 고추장 담고뚜껑에 흰 눈 수북히 얹고 있는겨울 장독 항아리 풍경이다늙은 부부는 머지않아흰 쌀밥 수북한 제사상 놋쇠 밥그릇으로같이 앉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공광규·시인, 1960-)+ 노부부 아침 산책길 언제나 만나는 노부부 지팡이 짚고 나란히 참 정다웁구나 저분들은 부부싸움이란 말 모를 거야 어젯밤에도 한바탕 전쟁을 치른 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이문조·시인)+ 오래된 약속편운재로 강의하러 가기 전날 밤아내가 신병으로 몸져누웠다.어느 편을 선택해야 할지한동안 R. 프로스트 말처럼 머뭇거리다가결국은 그 말의 주인처럼강연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안성으로 달리는 차창에아내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다.아, 그렇구나!강연약속은 한 달 전쯤의 일이지만 우리는 50년 전에사랑을 약속했지.참 오래 전 선약.그래, 나는70세 시인으로 집을 나섰지만20세 청년으로 귀가할 것이다.(김대규·시인, 1942-)+ 부부의 배 1톤 짜리 낚싯배 거기에 목숨을 걸었다 새벽부터 나온 목에 목도리 동동 감고 갯바람을 피하는 부부 시동이 산을 울리고 다시 골짜기 물로 내려온다 4대에 내려오는 돌담집 지붕만 갈았지 한 번도 문을 잠가본 적이 없는 집 이렇게 부부가 한배에 타는 것도 운명이다(이생진·시인, 1929-)+ 자전거 탄 부부의 풍경자전거를 앞뒤로 사이좋게 타고 가정이란 안장 위에 앉아 함께했던 당신과 내 삶은 바퀴 닮은 둥근 성격으로 둥글게 굴러왔고 둥근 시간의 굴레 속에 구겨진 삶의 애환을 평탄하게 직선으로 펴가면서 동고동락 길이사랑으로 바쁘게 달려왔소 난 사랑의 가속 페달을 힘차게 밟았고 당신은 내조로 껴안고 보듬어 자전거 가정 여행을 해왔소 여보, 앞으론 자연을 구경하며 서행하는 자전거를 탄 풍경으로 나들이 소풍의 삶 살자구요. (안상인·시인, 충북 옥천 출생)+ 부부의 길믿음이란 장미 한 송이 말라서 부서질 때까지 하염없이 늪 속을 헤매어도 덧없이 흘러준 당신이기에 검붉은 장미 되어도 난 기쁘오. 사랑이란 장미 한 송이 불길 속 정열 연기될 때까지 정처 없이 바람 속을 헤매어도 나만을 사랑한 당신이기에 벼랑 끝 죽음이 오더라도 당신을 대신하겠소. 검소란 장미 한 송이 화려함을 접고 불혹을 넘어서까지 자식을 위한 운명 속을 살았던 당신이기에 이젠 자력이 조금 풀려도 당신 뜻에 따르겠소. 살아본즉 물거품 같은 세상 무지개 빛 사랑은 아니더라도 허망한 헤어짐이 올 때까지 웃으며 살아보오. (유일하·시인, 1960-)+ 천생연분 구월의 싱그러운 밤을 코스모스 늘어진 중랑천 산책로를 따라 손깍지로 다정히 하나 되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아내와 함께 걸었다 이십여 분 걸었을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는 발등에 서서히 물집이 잡혔다 아내는 두툼한 등산 양발을 벗어 내 큼지막한 두 발에 신겨 주었다 한참을 걷더니 아내가 말한다. '여보, 나도 발등이 쓰라려 오네.'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오른쪽 발등이란다. 사실 난 왼발 발등만 쓰라렸기에 냉큼 오른쪽 양말을 벗어 아내에게 신겨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켤레의 양말을 나는 왼발, 너는 오른발에 신고 상쾌한 가을 공기 속을 걸었다 천생연분! (정연복·시인, 1957-)*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출처: 중년의 사랑 그리고 행복 원문보기 글쓴이: 정연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