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저희가 이제까지 총8회의 주제로 매주 썼는데
그중에서 2, 4, 5 번은 저장을 하지않아서 못올렸습니다.
2005년 1학기
한국의 수필문학
(목56, 김기호 교수님)
독후감(제출일:5월 12일)
『Freedom from the known』을 읽고...
by J. Krishnamurti
정치외교학과 박 병 철
기독교에는 성경이 있고 불교에는 불경이 있으며 이슬람교에는 코란이 있다. 또한 기독교에는 예수가 있고 불교에는 석가모니가 있으며 이슬람교에는 마호메트가 있다. 얼마 전 우리는 새로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되는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콘클라베(Conclave)가 진행되는 동안 베드로 성당 앞에는 수만 명의 카톨릭 신자들이 모여서 새 교황의 선출에 환호했다. 비단 카톨릭 신자뿐만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전세계인들에게 주목받는 뉴스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은 ‘앎으로부터의 자유’ (그밖에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등)와 크리슈나무르티는 성경과 예수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김기호 선생님은 전도사인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그의 가르침에 공감하고 열광하며 소위 매니아들을 형성하며 외견상 종교적인 냄새가 풍길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우리시대 종교는 하나의 권위가 되어버렸다. 오랫동안 우리는 책과 성인들에 의해 권위자들에 의해 우리의 선생들에 의해 숟갈로 먹여지듯 양육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영향의 결과 일 뿐이다. 크리슈나무르티도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고 부정하였으며 김기호 선생님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가르침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향된 어떠한 일부분만의 삶의 방식과 인생의 문제, 배타적 진리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 삶의 전체의 문제이며 특히 나 자신 스스로에 관련된,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종교와 철학, 이데올로기 등과는 다른 또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기존의 강의시간에 접한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학생의 입장에서 볼 때 솔직히 일정한 맥락이 부족하였고 매주 목요일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단절된 이미지를 느껴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단절된 가르침은 연결되었고 전체적이고 거시적인 체계가 잡혀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강의를 통하여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랑, 자유, 지성, 두려움 등에 대해 배워왔다. 이 책에 의하면 각각의 주제들은 모두 일정한 맥락으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시 설정하고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해의 심도였다. 그리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이 처음에는 일반적인 에세이집처럼 가볍게 와 닿았으나 빠르게 달리려고 하는 내 마음을 놓아주지를 않았다. 간단히 말해 쉽게 읽혀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무려 15년 동안 학교에서 정상적인 영어를 배워온 사람이다. 비록 영어원서라 하더라도 단어 하나하나만을 놓고 볼 때는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진 활자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커다란 산처럼 다가왔고 한 페이지이상 진도를 나가는 것조차 수월치가 않았다. 때로는 어느 한 구절을 가지고도 몇 번씩을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이유에서 이처럼 평이한 영어문장이 전문 의학 서적을 읽는 것처럼 어렵게 다가왔을까? 그것은 우리가 여태까지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로 이 책을 접했기 때문이다. 마치 탁구공으로 축구를 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듯이 기존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익숙하지가 않은 것이다. 나는 인내를 가지고 이해가 안되더라도 끝까지 읽어 나가려고 애썼다. 솔직히 이렇게 독후감을 쓰고는 있지만 나는 과연 이 책의 절반이라도 이해를 했는지가 의문스럽다. 이해 안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옆에서 충고해 주는 이라도 있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지금은 시간에 쫓겨 이해가 부족하여서 감상문을 쓰는 것이 급한 일일지라도 이 책은 앞으로 시간을 두고 늘 가까이 두면서 꾸준히 반복해서 읽어나가야 할 책이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종교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지를 하거나 주위의 피상적인 원인들만 놓고 해결해나간다. 그러난 그것들은 하나의 권위를 원하는 것이고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하며 나날의 삶속에서 내적 혹은 외적으로 또는 실지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전체성을 다루는 진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의시간에 다루었던 관찰자는 관찰대상인 것이며 생각과 사실의 분리, 알아채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기울려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쾌락을 추구한다. 쾌락은 다음의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존재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과정은 지각-감각-접촉-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의 단계가 개입된 괘락을 반복하고자 하는 바로 그 욕구가 고통을 가져오게 된다고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불안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면서 그것 때문에 마음이 혼돈되어 공포에 휩싸이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 밝고 여름에는 바람 불고 겨울에는 눈이오니 쓸데없는 잡념만 없으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오.” 라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발견한여 이원경이 인용한 어느 시의 구절의 깊은 뜻이 절실히 와 닿는 순간이었다. 위에서 말한 공포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의 일부임을 알 때, 즉 당신이 공포임을 알 때 당신은 그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그리하여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공포와 쾌락, 슬픔, 생각, 그리고 폭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인간사에서 폭력은 결코 그칠 수가 없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 속에 있는 폭력을 보는 방법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역시 우리 자신의 속을 봐야하며 폭력을 없애고 비폭력을 추구해야지 혹은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그렇게 해 볼거야 하는 것은 이미 관념의 문제일 뿐이다. 자유의 문제도 마차가지이다. 자유와 만나려면 마음의 삶을 바라보는 법을 알아야 하고 저항을 통해서 보거나 알거나 행동하지 않을 때에만 오는 것인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다. 자유는 마음의 상태이다. 거기엔 아무 두뇌작용도 없는 마음의 상태이다. 자유로워지려고 애를 쓰고 나는 자유롭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원망이나 소원, 갈망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연스럽게 올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 이미지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걸 찾을 수는 없다. 자유와 만나려면 마음의 삶을 바라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가 이미 강의시간과 보고서 주제로 다루었던 사랑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언어적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관념을 가져서도 안된다. 자유스럽지 않으면 사랑도 없다. 사랑은 생각과 시간을 초월하는 차원인 것이고 당신이 찾지 않고 원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지 않을 때 그러면 거기에 사랑이 있다. 우리 주위와 나 자신 속에는 이미 사랑이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다분히 관념과 생각에 휩싸여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현대에 들어서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면서 모든 것이 물질만능주의로 변해버리고 이기적이고 피상적인 사고에 물들어 버렸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요즘처럼 웰빙 문화가 파고들면서 요가나 명상 등의 정신문화적 콘텐츠가 인가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이미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 되어버렸고 현대인들은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면서 마음의 평화 아닌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한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명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명상이라는 것이 굳이 학원을 다니고 억지로 하려고 해서만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당신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읽었다면 그것이 명상인 것이다. 명상은 모든 것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보는 것, 즉 그것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하게 보는 마음의 상태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한 근본적 가치와 인식의 수정, 아니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여 생각과 사실의 분리로 인한 삶의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을 탐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이 책을 통해서 얻는 다면 그것이야 말로 더욱 가치 있는, 지극히 간단한(?) 명상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어떤 것으로서의 정신 자체속의 하나의 혁명이며 하나의 변화이다. 이것이 완전한 혁명으로써 아직 익숙히 못한 인류에게 다음 세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이 책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사상의 요지는 진리의 추구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인간이 자기 자신 속의 자아나 나를 완전히 버렸을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통하여 얻어진 무조건적인 자유야 말로 인간의 완전한 존엄성과 완전한 가능성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현 우리 사회는 인간성이 상실되고 물질주의가 팽배해져 있다. 사회적 안정과 더 나아가 세계평화는 이로 인한 갈등을 극복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이 극복을 위한 개개인의 심성변화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한국의 수필문학
(목5,6 김기호 교수님)
수필1
인식의 전환 - 왜 이걸 몰랐을까?
정치외교학과 박 병 철
인간의 삶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이른바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라는 한 울타리 속에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삶이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때로는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기도 하며 좌절하기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을 힘들게 하는 고통의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흔히 물질적인 부의 결핍, 사회구조상의 불합리, 이상과 현실의 괴리 등으로 막연히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좀 더 윤택한 생활을 할텐데...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해야 될텐데... 등 우리는 매순간 이러한 삶의 중압감에 억눌리며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저 이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 양 우리는 제도나 시스템에 종속된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정말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행복을 방해하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조차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주어진 대로 살고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살아보지도 않은 인생을 돌이켜 보건데 나 역시 돈 때문에 고민했었고 출세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고 주변의 눈치와 강요에 의해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 때문에 고통을 느끼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강의를 통해 나는 일대 인식의 전환을 맛보았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들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데 있다는 사고와 인식의 전환을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인생에서 나 자신을 항상 괴롭히고 쫓아다니는 사냥개의 정체는 다름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라는 자아의 확장에만 주력함으로써 고통과 불행을 자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께서 던져주신 명제 "The observer is the observed." 즉 관찰자는 관찰대상이라는 것,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다 라는 것! 이러한 기막힌 논리를 왜 여태껏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왔는가 하는 후회심 마저 들게 할 정도로 내 머리 속은 한동안 충격과 여운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주어진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덧붙임으로써 스스로 고통의 자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고통의 원인으로써 바로 인간의 치명적 에러(fatal error)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단순히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자신의 삶과 대비시켜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생각을 함으로써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인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Awareness 즉, 알아채기를 통해 언어화 시키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100%공감한다. 교수님은 이러한 강의 내용들이 결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러분들이 모르는 사실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뿐이라고 하셨다. 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진작에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걸 알았더라면 우리는 좀 더 진지한 사고를 통해 고통의 원인을 해결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해결점을 찾기가 쉬었을 것인데....
우리가 이번 한학기를 통하여 배우게 될 이러한 내용들은 인도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이다. 아직 강의 초반이라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제 뭔가 감은 얻은 것 같다. 교수님께서는 이 강의가 한학기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강의라고 말씀하셨지만 내 머리 속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식의 전환이라는 것 자체가 나는 이미 시작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더 진지한 내용들은 이제 진행될 본격적인 강의를 통해서 서서히 배워나갈 것이다.
한국수필문학의 이해
(목5,6 김기호 교수님)
수필3(제출일:3월 31일)
사랑
정치외교학과 박병철
크리스티나무르티는 사랑이란 '나'가 없을때 일어나는 행동이라 했다. 우리는 나의 의지로 인해 일어나는 욕망밖에 모른다. 사냥개한테 쫓기는 우리는 그저 모방과 순응뿐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느끼고 알았던 사랑이라는 것은 극히 삶의 지극히 단편적인 부분밖에 못된다. 아니 그렇게 사랑이라고 알고 있던 자체도 정말로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정의를 내리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사랑이 무엇이더냐? 하는 물음에도 답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명확히 말을 할수있는 이는 드물것이다. 그저 머리속에 여러 이미지들은 수없이 떠오르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하기에는 정말 힘들다.
보통생각하기에 사랑이란 남녀간의 사랑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꽃과 바람, 나무도 우리에게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꽃향기가 좋아 냄새를 맡아도 꽃은 우리에게 냄새맡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인가? 우리가 생각지 못하고 지나쳤던 사랑의 참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문득 나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위처럼 따지면 어머니의 사랑의 꽃의 사랑과 같다. 난 어머니에게 어태껏 사랑한다는 말한마디 해본적이 없다.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특유의 경상도의 무뚝뚝함이라고나 할까... 그런걸 굳이 말로 해야 알수 있나? 어머니는 사랑한다는 말한마디없이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분이다. 우리 어머니를 놓고 사랑이 아닌것을 빼고 남는것을 따져볼때 그런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당신의 모든것이 나에대한 그리고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받은만큼 어머니께 사랑을 돌려준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바로 꽃이다. 대가가 없어도 어머니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신다. 옛말에 우리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마른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자식새끼 입에 밥들어가는 소리라고 했다. 참으로 멋진 말이고 맞는 말이다.
이제 나 자신을 놓고 사랑아닌 것을 하나씩 빼나가 본다. 과연 뭐가 남을지...사랑아니것을 빼나갔으니 마지막에는 사랑만 남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만 억지로 남겨보았지만 그 스스로가 자기는 사랑이 아니니까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참으로 허무하다. 내 속엔 사랑이 없는 것이다. 하기야 알아채기도 잘 안되는 마당에 내 속에 진정한 사랑이 있을리 만무하다. 여태껏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은 대가를 바라고 사랑이라고 포장된 그 속엔 시기와 질투와 악의가 섞여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때로는 사랑이란 이름하에 의도되고 과장된 행동과 생각까지 담겨있었다. 그동안 내가 전공하고 있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사랑도 남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했는데 학문의 대한 사랑도 사실은 학점을 잘받기 위한 나의 욕심, 그리고 주위 친구들에 대한 지적 자만심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처럼 내가 가장 자신할 수 있었던 부분의 사랑도 하나같이 욕심에 빠진 것이니 나에게는 진정 사랑이란 없다. 원점에서 다시시작해야 되는걸까? 너무 혼란스럽다. 욕심을 버리고 나를 버려야 할텐데 고민이다.
2005년 1학기
한국의 수필문학(김기호 교수님)
수필6(제출일: 5월 12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자
정치외교학과 박 병 철
한 학기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강의? 그래서 일까?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아마 정말로 한학기가 지나고 나서야 시작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루하루 알아채기를 통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물론 의식적인 노력은 배제해야겠지만...
이번 주 수필 주제는 혹시나 역시나에 빠져있는 내 모습 보기이다. 내 삶의 상당부분이 아마도 이러한 곳에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기대를 하고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난 주 금요일 밤 나는 편의점에 들러 로또 복권을 구입했다. 그간 5등도 당첨 안되는 것에 회의를 느껴 다시는 로또를 사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그날을 왠지 복권이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로또를 사면 흔히들 만원어치 10판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늘 1000원어치 한판만 한다. 그것도 자동선택으로.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도 있지만 어차피 10판을 하나 1판을 하나 8백만분의 1이라는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로또를 사게 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추첨이 토요일 저녁에 있는데 미리 월요일에 사두면 일주일 내내 기분이 좋고 마치 이번에는 당첨이 될 것처럼 기대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꽝이 나더라도 돈이 아깝지 않은 이유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당첨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즐거운 기분이라는 경제학적으로 충분한 효용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또한 금요일 저녁부터 기대에 부풀려 있고 왠지 모르게 당첨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날 밤 꿈자리도 좋았고 몇 가지 운도 따랐기 때문이다. 친구들하고 고기를 먹고 계산을 하는데 주인이 계산을 잘못해서 4000원이나 득을 보았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데 잔돈이 더 많이 나온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나는 이 모든 행운을 유치하게도 저녁에 있을 로또 당첨의 전조(前兆)로 돌려서 생각하였다. 나도 무릇 범인(凡人)들과 다르지 않아서 1등 당첨되면 원룸으로 자취방을 옮기고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혼자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6숫자 중 하나도 맞지 않았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토요일 오후 8시 당첨자 발표라는 그 순간 하나의 사실에 나는 비록 이틀 동안이지만 온갖 생각과 관념에 휩싸여 허영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2005년 1학기
한국의 수필문학
(목5,6 김기호 교수님)
수필 7
Timelessness = 행복
정외과 박 병 철
신림동에서 친구를 만나고 밤늦게 지하철을 타고 외대로 왔다. 그냥 단순히 난 신림동과 외대를 오갈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고통이 있다. 다름 아닌 지루함이다. 신림동에서 외대를 오려면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 된다. 아무리 빨라도 50분이상은 걸리게 마련이다. 솔직히 50분이면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오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먼 거리를 오다보면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 마련이다. 속으로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고 건너편 사람과 어색한 눈길도 주고받으면서 지루함을 달래 보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이처럼 먼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오는 것이 나에게 왜 고통을 주는가? 그것은 그냥 단순한 사실일 뿐이다. 하지만 역시 그 속에 생각이 개입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왜 이리 먼 거야? 지하철이 오늘따라 되게 느린 것 같네, 앞으로 외대 도착하려면 10코스나 넘게 남았잖아? 등 단순한 사실자체에 우리는 생각을 부여해서 없는 고통도 만들어 내게 된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께서 언급하셨듯이 생각의 속성자체가 과거이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은 시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고통을 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면 그 속에는 시간성도 없는 것이 된다. 지하철에서 내가 경험하는 사실들도 시간성을 배제하고 쓸데없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면 지루함도 못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굉장히 열중을 하게 되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된다. 흔히 하는 말이 와~ 그 영화 너무 재밌어서 2시간이 언제 훌쩍 지나가는 줄도 몰랐어 라고 하면 바로 이것이 시간성이 없는 상태를 경험한 것이다. 나도 중학생 시절 점심을 먹고 나서 펄벅의 대지를 읽기 시작하였는데 정말이지 너무 재밌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방에서 책에 심취해 저녁이 되도록 붙잡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들어오시면서 하는 말씀이 날이 어둑어둑해져 가는데 불도 안 켜고 책을 본다고 꾸중을 하셨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날이 어두워진 것도 몰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시간성이 없는 상태에서는 전혀 고통을 못 느끼게 된다. 오히려 행복하기까지 하다. 한동안 가만히 먼 산을 넋 놓고 바라본다던가 드넓은 잔디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전혀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역시 시간성이 매몰되기 때문이다. 앞서 예를 든 지하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신림동과 외대는 멀다. 우리가 순간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리를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사실은 단순히 사실일 뿐이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면 즐겨라 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지하철에서의 지루함과 따분함의 시간성을 날려버리기 위해 재미있는 책을 본다던가, 신문을 본다던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등 무언가에 열중을 하게 되면 50분의 거리는 5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고통을 떨쳐버리려면 사실의 바탕위에서 살고 시간성이 없는 내 존재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5년 1학기
한국의 수필문학
(목5,6 김기호 교수님)
수필8(제출일: 5월 26일)
관계 -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
정외과 박 병 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새삼스럽게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라나고 생활한다. 태어나는 첫 순간부터 인간은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혈연관계를 맺게 되고 그밖에 친족관계, 교우관계 등 수 많은 관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는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관계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도 개개인의 국민과 공적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더 넓게 보아서 inter-national, 즉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도 상호 관계 속에서 국제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관계는 인간 삶의 근본요소이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친구, 선생님, 동료, 선배 등 모든 단어들도 그 속에는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자아의 모습이라는 측면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인식 속에서 존재가치가 발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야 말로 내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이라 말할 수 있다. 만약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면 나가 곧 전부이고 전부는 곧 나에 국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이렇게 중요하다면 우리는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주위에서 인간관계를 잘 못해서 왕따가 되거나 남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애초부터 주어진 사회적 관계를 올바로 영위해 나가야만 ‘나’라는 존재도 그러한 관계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꼭 필요한 존재로 대접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관계를 똑바로 유지해 나가지 못한다면 그 역시 또한 삶의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병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히키코모리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히키코모리란 핵가족화로 인한 이웃·친척들과의 단절,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한 급속한 사회변화, 학력 지상주의에 따른 압박감,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취업을 하지 못하는 데 따르는 심리적 부담감, 갑작스런 실직 등 여러 요인을 원인으로 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히키코모리란 인간관계의 실패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관계라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더욱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에 실패한 존재들로 인한 부작용은 우리사회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앞에서 자신의 실제 모습은 모든 관계에서 순간순간 드러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은 그렇게 드러나는 자신의 실제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므로 자신의 그 실제 모습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분명히 보고 알게 되면 그것은 변한다. 즉 관계를 잘하는냐 못하느냐의 궁극적인 해답은 우리가 지난 수업시간에 배웠던 주제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 자유, 지성, 두려움, 시간 등에서 배웠던 깨달음들은 관계 속에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처방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 실체를 알게 된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여 새롭게 태어날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알게 된다면 변할 가능성은 더욱 가까이에 와있는 거겠지요... 생각의 흐림이 잘 보여지는 수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