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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발생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가중됨에 따라 조선인 교육에 대한 불평등한 현상이 일어났다.
1925년 조선 안에 있는 일본인은 41만 명이요, 조선인은 2000만 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초등교육보조비는 일본인 학교가 조선인 학교보다 많았다. 중등교육도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인이 100원을 내고1명을 교육시킬 때 일본인은 13명을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1925년도 일본인 납세액이 142만8000원이고, 조선인은 4474만 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성제국대학,각종 전문·사범 등 전체 학생수는 6,835명이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 학생수는 불과 792명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였으며, 조선역사와 조선어교육을 소홀히 하였다. 심지어 가사선생을 일본인으로 하는 우스개 같은 일도 있었다. 조선인 학생만 수용하는 학교의 절대다수는 일본인 교사였다.
이와 같은 교육의 불평등에서 오는 반일감정이 동맹휴학(맹휴)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폭발되어 전국적으로많은 맹휴가 중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공립학교에서의 맹휴가 사립학교보다 많았던 사실이다. 사립학교에는 자격 있는 선생을 채용할 것이 맹휴의 주된 이유였으나, 공립학교에서는 조선역사는 조선인 선생으로, 비인간적인 일본교사 축출, 조선인 채용증가, 그리고 조선어 수업시간 증가 등이 맹휴의 이유였다. 1927∼1929년의 3년간 사립학교 맹휴는 연평균 27건이었는데, 공립학교에서는 51건으로 사립학교보다 많았던 것은 일본인 교사와 자주 접촉할 수 있었던 공립학교 학생간에 반일사상이 증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독립만세에서 맹휴라는 방법으로 표출되었고 맹휴는 일종의 유행병과 같이 각종 학교로 전파되었다. 일본인교사 배척을 내세우며 맹휴는 계속되었다.
가령,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교무주임 사이토(齊藤)는 조선풍습에 관해서 이해가 없으니 면직하라는 것 그리고 조선 학생을 사랑하고 호의로 대해 준 다카하시(高橋) 교사의 전근은 부당하다는 것 등으로 맹휴를 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서 광주학생운동은 만 5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운동의 촉매작용을 한 것은 열차 내에서의 광주중학생 (일본인)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간의 싸움이었다. 광주와 송정리간의 운암역 부근에서,개를 잡는 조선인을 보고 일본인 학생이 야만이라고 말하자 무엇이 야만이냐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맞서 싸웠다(1929.6.26.). 다음은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 흔드는 통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분개해서 역에 내려서 일본인 학생과 싸웠다.
이와 같은 두 개의 전초전을 지나서 1929년 11월 3일 명치절(明治節)을 기하여 양교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음력으로는 우리의 개천절에 해당되는 10월 3일이었기 때문에 더욱의의가 있는 충돌이었다. 일본학교(광주중학교)가 기념식 후 신사참배를 하고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은 학교에서 기념식을 끝내고 10명씩 짝을 지어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지난번 충돌에 대해 편파적 보도를 한 광주일보사를 습격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일본인 학생과 싸웠는데, 이 싸움에 조선인 중등학생을 총동원시켜 일본인 학생과 일촉즉발의 큰 싸움이 벌어질 뻔하였다. 일본경찰은 주모자로 지목된 조선인 학생을 검거하고 죄를 캐물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은 검거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게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라는 선언문을 배포하였다. 광주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조선인 학생 70명에 대하여 체형(体刑)을 언도하였다.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학생운동으로 퍼져 이것을 광주학생운동이라고 불렀고, 건국 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의 특색은 일본인 학생을 상대로 물리적 싸움을 벌인 데 있다고 하겠다.지금까지의 만세운동을 떠나 타도운동으로 전향한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서울에서는 이화·동덕·배화·정신·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등 10개 교 여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경찰의 학교침입 반대, 식민지교육 폐지, 광주학생희생자 석방, 퇴학생 복교 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청년·학생, 오호 일본의 야만정책에 반대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약소민족해방 만세’, ‘제국주의타도 만세’,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전단을 뿌리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나 서울여학생사건은 공통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항거하였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약소민족간에 반제동맹(反帝同盟)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 학생운동도 반제운동으로 그 진로를 정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광복 전 학생운동으로 그 순수성과
학생 독자적 사상, 그리고 운동 내용으로 볼 때 2·8독립선언과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사의 백미라고 아니할 수 없다.
▶ 2011년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 통일부총리 별세
▶ 2006년 오늘, 프랑스 작곡가 '폴 모리아' 프랑스남부 페르비뇽 병원에서 '급성 백혈병에의한 신부전' 으로 사망.
<1925년 3월 4일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에서 출생>
대한민국과 일본, 중화민국, 홍콩,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75년에 첫 방한 이래 도합 1,200회이상 공연하기도 했다. '아리랑'과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연주곡으로 편곡했으며, 1976년에 프랑스에 '아리랑'을 소개하여 이후에 유럽에 '아리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Love is blue'.
https://youtu.be/LWX7rBV4Yx4
▶ 2005년 국산김치 16개 제품에서 기생충알 검출
▶ 2004년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자 전락원 회장 별세
▶ 2004년 조지 W 부시, 존 케리 누르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재선
▶ 2002년 터키 이슬람계 정당 80년만에 단독 집권
▶ 2002년 세계최대게임대회 `월드사이버게임즈` 한국종합 1위
▶ 2000년 채권은행단, 삼성쌍용차 등 29개 부실기업의 청산-법정관리 발표
▶ 1998년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한국인 신호범(미국명 폴 신) 당선
▶ 1997년 시인 김요섭씨 별세
▶ 1995년 작곡가 윤이상 독일에서 사망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씨가 1995년 11월 3일 폐렴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그는 살아있을 당시 이미 세계음악계에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의 작곡가였지만, 정작 고국인 한국에서는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아래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통영에도 끝내 가보지 못한 비극적 운명의 사나이였다.
베를린에서 타계한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씨
1931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이웃 청년으로부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접하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아버지의 뜻도 거역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그였다. 1935년 도일해 일본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다. 1946년~56년까지 고향 통영과 부산, 서울 등에서 교사와 강사생활을 했다.
그는 일제 때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6·25때 부산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등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동포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긴 애국자였다. 그러나 1956년 프랑스대를 거쳐 독일에 유학한 후 11년째 되던 1967년, 베를린 거주 유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대거 북한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강제 귀국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71년 독일로 귀화했다.
오늘날 그는 한국과 동양정신을 서양음악에 접목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굳히게 된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오페라 ‘심청(1972년)’을 비롯,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나비의 꿈’ 등 1백50여 편이 있다. 한국에서의 작곡활동은 지금까지 동요와 가곡 정도가 알려져 있다.
▶ 1989년 대불산업기지 착공
▶ 1989년 공업용 우지로 라면-마가린 등을 제조한 5개업체 대표 10명 구속(공업용 우지 파동)
▶ 1984년 11년 만에 학생의 날 부활
▶ 1983년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발견(도산 안창호선생 장녀집서)
▶ 1982년 미해군, 5번째 원자력 항공모함 건조착수
▶ 1982년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 사망
▶ 1982년 삼성그룹, 조선호텔 및 주변부지 매입
▶ 1980년 입법회의,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의결
▶ 1980년 군사재판, 김대중에 사형선고
‘5·17계엄확대조치’와 함께 ‘사회불안조성 및 학생-노조소요의 배후조정’ 혐의로 연행된 김대중은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기소돼 1980년 8월 14일 첫 공판에 이어 9월 17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1980년 11월 3일 항소심공판에서도 원심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8월 14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린 내란음모사건 공판에 나온 김대중(오른쪽에서 두번째)과 피고인들.
그와 함께 연행된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고은태(고은), 김상현, 이신범, 이해찬 등도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는 당시 민주세력의 지지를 받던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거짓임이 나중에 밝혀졌으며 후에 모두 사면 복권됐다.
▶ 1979년 박정희대통령 국장
▶ 1978년 소련-베트남 우호조약조인
▶ 1978년 도미니카 연방,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76년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 당선
▶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1970년대 대왕코너는 대형 화재의 온상이었다. 1972년, 1974년, 1975년 세 차례나 화재가 발생, 많은 인명피해가 났기 때문이다. 1974년 11월 3일 새벽. 서울 청량리 대왕코너(현 롯대백화점) 6층 타임나이트클럽에서 200여명의 손님들이 몸을 흔들고 있을 때, 갑자기 팬티 차림의 한 여인이 “불이야”를 소리치면서 클럽 복도로 뛰쳐나왔다.
88명의 생명을 앗아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현장. 가장많은 희생자를 낸 나이트 내부
새벽 2시47분에 같은 층 브라운호텔 복도 천장에서 전기합선으로 일어난 불이 어느새 호텔방과 나이트클럽으로 번진 것이다. 전기가 나가자 ‘키스 타임’이라며 반기는 손님도 있었다. 곧 화재 사실을 알게 된 손님들이 피신하려 하자 클럽 종업원들은 “술값을 내라”며 입구를 막았고, 하나밖에 없는 회전식 출입문은 문 양쪽으로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려 이미 출구가 아니었다. 모두 88명이 숨지고 35명이 부상해, 1971년 165명이 사망한 대연각호텔 화재에 이어 두 번째 대형 화재로 기록됐다.
▶ 1970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사망
▶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 취임
▶ 1969년 미국, 아폴로11호 우주인 방한(암스트롱, 콜린즈, 올드린 부부)
▶ 1966년 세계반공연맹 가입
▶ 1966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도착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가 쿠바의 아바나를 출발, 소련의 모스크바, 체코의 프라하, 프랑스의 파리, 브라질의 상파울루를 경유, 볼리비아 라파스 공항에 밀입국했다. 그는 아돌프 메나라는 가명으로 입국했으며 130748번 우루과이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대머리에 검은 안경을 끼고, 어두운 색 옷에 넥타이를 맨 그는 어디로 보나 전형적인 학자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볼리비아의 경제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미국 연구소가 발행한 파견장까지 갖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변장을 하고 밀입국한 것은 남미 모든 정부와 미국 CIA가 그의 입국을 두려워하며 그의 초상화를 공항이나 국경 초소에 배포했기 때문이었다.
체가 볼리비아에 몰래 입국한 것은 남미 국가 중 최빈곤국인 이곳에 쿠바에서와 같은 혁명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바로 산중의 혁명 거점인 낭카우아수로 입산했다. 체는 11개월간 산속에서 게릴라 부대를 인솔하며 정부군과의 무장투쟁을 통해 쿠바에서의 경험을 살려 혁명을 시도했으나 1967년 10월 8일 전투중 총상을 입어 체포돼 이튿날인 10월 9일 사살됐다.
체가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기본적으로 쿠바와 볼리비아의 주객관적 조건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쿠바와 달리 볼리비아에는 어느정도의 농지개혁이 실현된 상태여서 농민들이 무장투쟁에 관심이 없었고, 볼리비아 정글의 생활여건은 쿠바의 산악지대보다 훨씬 불리했다. 더구나 볼리비아 공산당의 비협조도 체의 실패에 한몫했다.
▶ 1964년 존슨, 제35대 미국대통령에 당선
▶ 1961년 유엔사무총장 대리에 우 탄트 임명
▶ 1958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 대관식
▶ 1957년 소련, 개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 발사
1957년 우주궤도 비행한 최초 동물 ‘라이카’
냉전시대의 우주경쟁 희생양
1957년 11월3일 구 소련은 자국의 두번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를 우주로 쏘아올렸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 미국을 놀라게 한 지 불과 한달여 만이었다. 스푸트니크 2호에는 우주선(宇宙線)과 압력·기온 등을 측정하기 위한 장비와 무전 송신기, 그리고 ‘라이카’라는 이름의 잡종견 한마리가 실렸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동물이 우주 궤도를 비행하는 순간이었다.
당시는 미국과 구 소련이 누가 우주를 선점할 것인지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스푸트니크 1호를 보란듯이 성공시킨 구 소련은 한발 더 나아가 유인 우주선의 가능성을 타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구 소련 과학계는 우주선 내부의 인간이 발사 시 어떤 충격을 입을지 알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일단 동물을 우주에 보내 실험하기로 했고, 거리를 배회하는 떠돌이 개였던 라이카는 돌연 우주 개척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훈련에 돌입하게 된다.
라이카는 가속도·소음 적응 훈련을 받았고, 20일에 걸쳐 점차 작은 크기의 용기로 집을 옮기며 비좁은 우주선에 적응하는 훈련도 받았다. 먹이로 우주 음식인 고영양의 젤리가 제공됐지만,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낸 라이카는 배변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발사 당일 과학자들은 라이카의 털을 알코올로 소독하고 곱게 빗질한 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길로 라이카를 실어보냈다. 구 소련은 라이카가 우주에서 약 1주일 간 생존했다고 발표했다. 라이카의 ‘유해’는 58년 4월14일 지구로 귀환하던 스푸트니크 2호가 폭발하면서 우주로 흩어졌다. 그러나 2002년 10월 스푸트니크 2호에 참여했던 과학자 디미트리 말라센코프가 “라이카는 로켓 단열재가 떨어져 나가면서 41도까지 치솟은 내부 온도와 공포로 괴로워하다 발사 5~7시간 만에 숨졌다”고 밝히면서 라이카의 최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라이카는 냉전 시대 미국과 구 소련이 벌인 우주 경쟁의 희생양이었다. 구 소련은 라이카 실험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61년 4월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탄생한 시점보다 약 10개월 앞선 기록이다.
▶ 1956년 시리아-이란군부대 요르단에 진주
▶ 1955년 바그다드조약기구 성립(터키 이라크 영국 파키스탄 이란)
▶ 1954년 프랑스화가 앙리 마티스 사망
마티스 [Matisse, Henri-Émile-Benoît, 1869.12.31~1954.11.3]
ㆍ50여년간 하루 12시간씩 그림
색채는 감정이고 감각이며 에너지이고 생명이다.”
1954년 오늘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20세기 거장 앙리 마티스가 천상의 빛을 따라 이승을 떠난 날이다. 향년 84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날부터 50여년간 빠짐없이 하루 12시간 이상씩 그림만 그렸던 그는 말년 병마와 싸우면서도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관절염으로 붓놀림이 자유롭지 않게 되고, 십이지장암으로 거동조차 어렵게 됐을 때에도 병상에 누워 색종이를 잘라 붙여 가위로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1869년 12월31일 북프랑스의 르카토 캉브레지의 외가에서 곡물사업을 하는 부친과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살 때부터 22살 때까지 한 법률사무실 서기로 일하던 중 맹장염으로 보앵에서 수술을 하고 회복기를 보낸다. 그런데 옆 병상의 남자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병상에 그림도구를 가지고 와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결국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화가로 전향한 마티스는 구스타브 모로의 주목을 끌며 색채화가로서 천부적 자질을 드러낸다. 당시 대다수 화가들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데생, 즉 선이라고 믿었다. 반면 마티스는 색채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 데생 대신 색채로 사물을 표현했다. 특히 1905년 마티스가 파리 살롱 도톤 전람회에 출품한 초상화는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자신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였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표현방식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얼굴은 녹색과 연보라색·파란색으로, 목은 빨강과 주황색으로, 모자 밑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은 한쪽은 빨강, 다른 한쪽은 녹색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평론가와 관람객들은 일제히 마티스의 야수 같은 짓에 분노했다.
이처럼 마티스는 대상의 원래 색깔과 전혀 다른 강렬한 색채로 칠했다. 그 바람에 ‘야수파 화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것이다. 이후 성숙한 색채와 구불거리는 선이 특징인 ‘생의 기쁨’(1906) ‘춤’(1910) ‘음악’(1910) 등 마티스의 작품세계의 정점이라고 평가받는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1917년부터 1954년까지 37년간 프랑스 남쪽 니스에 머물며 니스를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마티스는 니스에서 사망했다. 니스에 소재한 방스성당의 건축·장식 일체도 그가 1948년부터 디자인해 1951년 완공한 것이다.
▶ 1953년 제1회 학생의날
▶ 1948년 김구, 미소양군 철수후 통일정부수립 요지의 담화
▶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신문 `고대신문` 창간
▶ 1946년 일본, 신헌법 공포
▶ 1945년 고당 조만식 평양서 조선민주당 결성, 당수에 피임
▶ 1945년 미국, 전시생산국 폐지
▶ 1937년 브뤼셀에서 중일전쟁에 관한 9개국회의. 일본비난선언 채택
▶ 1936년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에 재선
▶ 1936년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에 재선
▶ 1935년 필리핀공화국 수립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발생
▶ 1911년 소설가 남석(南石) 안수길 출생
▶ 1908년 미국 대통령에 태프트 당선
▶ 1903년 파나마, 콜롬비아로부터 독립
▶ 1901년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 출생
▶ 1898년 만국우편협약 비준
▶ 1718년 오늘, 영국 존 몬태규 출생,
영국 '샌드위치가문'의 네번째 백작으로 노름하기를 좋아해, 끼니를 잊고 지내기가 일수였다고 한다,
1762년 어느 날, 24시간 동안 카드를 잡고 앉았다 드디어 시장기를 느낀 그는 '빵 두 조각 사이에 고기 조각을 넣어서' 가져오도록 했다. 포크를 쓸 시간이 아깝고 귀찮았던 것이다. 이렇게해서 '샌드위치'가 탄생하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