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청주 기생, 해월은 어떤 여인인가 #해월(海月)은 청주영에 속한 #기생이었는데 성은 김씨이다. 당시에 병영의 군관이던 홍림(洪霖)은 80살 먹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효심이 지극해 주변에서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본부인에게 자식이 없자, 남연년의 주선으로 자식을 낳기 위해 김해월을 첩으로 맞아들여 남문밖에 살림을 차렸다. 마침내 해월이 아기를 잉태해 하루 속히 아기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는데, 영조 4년(1728) 눈보리가 휘몰아 치던 밤 이인좌(李麟佐)가 정희량, 이유익, 박필현 등과 공모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해월과 홍림은 폭발소리와 함성 그리고 백성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홍림이 칼을 꺼내들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성쪽을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에서 비장한 각오를 느낀 해월이 남편의 바지를 붙잡으며 애원하며 싸움에 뛰어드는 것을 말렸다. '이미 때가 늦었는데 어디를 가려고 합니까. 노모가 살아계시고 내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으니 목숨을 보전하고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 그러자 홍림은 '주장인 이봉상이 무너지는데 내 어찌 불효가 된다하여 의를 버리고 나만 살기를 꾀할 수가 있느냐. 내가 죽거든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홍씨 가문의 혈육을 이어가도록 잘 길러라.고 말하며 절도사와 더불어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하였다. 다음 날 이인좌를 찾아간 해월은 애원을 해서 이봉상, 남연년 그리고 홍림의 시체를 거두어 우암산 기슭에 장례를 치렀다. 그 해 10월에 아들인 홍유복을 낳았고,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하게 자랐는데, 불행하게도 7살이 된 아들이 변을 당해 죽었다. 그러자 해월은 “내가 남편이 죽던 날 같이 죽지 못한 것은 하나 밖에 없던 홍씨 가문의 혈육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월은 기생으로써 흔하지 않게 정열을 지켜 후세 사람에게 많은 교훈을 주어 1814년에 정려를 받았다. 김해월묘(정면) 김해월묘(측면) 김해월묘 묘비(열녀김해월지묘) 김해월 묘(후면) 2.해월의 묘와 열녀각 1)해월의 묘는 우암산의 우회도로에 있는 대한불교수도원의 기점에서 약 800m 지점이며 수암산전망대와 가까운 곳이다. 수암산전망대의 앞 도로가에는 조선시대 때 청주를 다스렸던 절도사 등의 공덕비 7개 서있는 비석군이 있고 그 비석의 왼쪽 끝에 있는 가파는 산길을 따라 30미터 올라가면 해월의 묘가 좌측에 있다. [출처:카카오맵] 김해월묘 찾아가는 길 김해월의 묘 앞 도로 가에 있는 비석군 2)청주의 표충사(表忠祠)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동 87번지에 있는데, 영조 때의 충신인 이봉상(李鳳祥), 남연년(南延年), 홍림(洪霖) 세 충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삼충사(三忠祠)라 부른다. 1731년 청주목사 조준명이 주도하여 세웠으며, 1736년에 표충사(表忠祠)로 사액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기생 해월(海月)의 절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이 있다. 해월은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홍림의 첩으로 남편이 순절하자 반란군에게 애원하여 남편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냈다. 남편과 함께 죽고자 했으나 자식 때문에 죽지 못하다가 아들이 7세때 요절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814년에 민이혁 등이 상소해 정려를 받았다. 1814년에 건립한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정면에 ‘열녀각(烈女閣)’이란 현판이 걸리고, 안에는 홍림의 사적이 기록된 편액이 걸려 있다. 해월의 정려문은 “烈女贈參判 洪公房妓海月之閭上之十四年甲戌命旌(열녀 증참판 홍공 방기 해월지려 상지십사년갑술명정: 열녀 참판에 추증된 홍공(홍림)의 房妓 해월의 열녀각이 1814년에 정려됨).”이라고 쓰여 있다. 정려가 표충사 경내에 있는 관계로 보존상태 양호하다. 표충사 내 김해월의 열녀각 김해월 묘(축면) [출처] [청주여행]열녀 해월의 유적지를 찾아서 [출처] 열녀 해월의 유적지를 찾아서|작성자 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