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원(內瀟園)은 저희 농장의 이름입니다.
소(瀟)라는 글자는 물 맑고 깊을 소자입니다. 저희 둘째 딸의 이름에서 따온 글자입니다. 다소 생경한 글자이긴 합니다만 조선 중기 대표적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에서 사용된 글자이기도 합니다.
내소(內瀟)의 뜻은 안으로 한없이 맑고 투명하다는 뜻입니다.
농장 구석구석을 돌아볼 때마다 아직 조성 단계이긴 합니다만 많은 땀이 배어 어느 한 곳 정겹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산 중턱에 자리를 잡아 농사를 짓기에는 매우 불편한 곳이지만 그래도 늘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장 전체가 지반이 바위투성이인데다가 물이 많고 배수가 어려운 곳이어서 농지 조성이 매우 힘든 곳입니다. 예전에는 다락논으로 그럭저럭 이용된 곳인데 밭이나 과수원으로 이용하려면 공사비가 농지의 몇 배가 들어 경제성도 별로 없는 곳입니다.
이런 농지가 저희 부부의 눈을 사로잡은 까닭은 오염원이 없는 주변의 청정함과 고요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산골에 우리 부부가 살러 들어와 허물어진 묵은 농지를 정비하고 집을 짓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땅 속에서 엄청난 양의 바위를 장비로 퍼올리고 유공관을 지하에 묻어 물을 빼고 배수로를 정비했습니다. 매우 힘든 과정을 4년에 걸쳐 진행해 왔으나 아직도 허물어지는 둑을 보수할 곳이 많아 걱정도 많습니다.
농지로서는 매우 부적합한 이 땅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터전이어서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던 모습의 땅이었고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평생 서울에 살면서 젊어서부터 늘 농사를 짓고 싶어 했고, 낚시를 핑계 삼아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아무 연고도 없는 예천을 처음 찾게 되었습니다. 공장이 없는 청정한 예천은 저에게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을 등지고 소백산 기슭에 자리한 이 곳 예천은 특히 낙동강을 품에 안아 더 없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늘 머리에서 예천이 떠나질 않아 주말마다 예천을 찾아 이곳저곳을 2년이나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농지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매우 실망스런 상황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아직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밤 홀로 새벽예배를 갔습니다. <저의 귀농이 바른 결정이 아니라면 저에게 땅을 보여주지 마시고, 제가 귀농해도 된다면 저에게 그 땅을 보여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예천의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마음에 드실 땅이 있으니 내려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부동산중개업소가 그동안 여러 번 소개한 농지가 늘 실망스런 것이어서 큰 기대 없이 내려왔으나 그 농지를 보는 첫 순간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마음속에 그리던 농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밝은 봄햇살이 퍼지는 남향 밭은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을 끼고 있었고 2백년도 더 되어 보이는 감나무 고목이 세 그루나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땅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뿐 감히 들어가 밟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새벽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진 놀라운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농지 구매 의사를 밝히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다소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그 밭은 8백평이 채 안되는데 귀농할 농지로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 밭 옆에 붙은 논을 함께 구매하고자 중간에 사람을 내세워 타진해 보았으나 팔지 않는다는 연락이었습니다.밭 8백평 미만이면 집을 짓고 나면 활용할 수 있는 농지는 5백평 정도여서 귀농하기에는 불가능한 규모였지요. 밭에 붙은 논의 금액을 시세의 3배나 제시했는데도 팔지 않는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매우 고민스런 상황이었습니다. 새벽기도로 찾은 밭이기에 현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도 풀리지가 않았습니다. 8백평도 안되는 곳으로 나를 보내시는 것일까.
고민 끝에 다음날 새벽 교회를 다시 찾았습니다. <저에게 보여주신 그 땅이 저에게 허락하신 땅인지요. 그것이 제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옆의 땅도 허락하시고, 아니라면 모두 불가능하게 하소서.> 그리고 바로 그 날 오후 갑자기 논 임자로 부터 논을 팔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두 번째 새벽기도가 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이 내소원(內瀟園) 농장을 우리의 가나안이라고 부릅니다.
먼 곳에서 연고도 전혀 없는 이곳에 이방인으로 들어와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늘 아브라함을 그리며 살아온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통해 처음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이삭을 통한 하나님의 시험이 매우 가혹하여 혼란스러웠으나 키엘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집사람의 인도로 뒤늦게 교회를 다닌 이래 늘 아브라함의 모습이 마음을 떠나질 않아 그 존숭의 마음이 또한 아브라함을 기리는 이 시를 쓰게 했습니다.
브엘세바
푸르른 저녁 하늘 끝으로 아득히 몰려가는 양떼들.
아버지가 부르고 있는데
어린 이삭은 어느 하늘언덕에서 놀고 있나.
별무리 휘황한 밤의 브엘세바.
짐 벗은 나귀는 잠들고
반짝 반짝 숨 고르는 이삭 곁에
잠들지 않고 빛나는 아브라함.
(1992년 作)
첫댓글 컴퓨터 정리하다가 없애기 너무 아까운 글이라
여기 공개합니다.
한재영님과 지다다니다 인사만 했지 나이을 떠나 문우로서 함께 추억을 쌓지 못했습니다.
그리운 마음으로 지나온 날들을 그립니다.
地耕 이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