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 허혜정
명함은 받아 챙겼어도 기억나는 이름은 없다
끝내 군중 속에 흩어져갈 얼굴들을 마주보곤 있지만
호기롭게 반말지꺼리부터 하던 그 어르신은 누군지
친필사인이 담긴 신간을 건네준 풋내기는 누군지
침이 튀도록 정치적 식견을 과시하던 그 논객은 누군지
갑자기 선생님, 하며 돌아앉는 해맑은 청년도
기억하지 않는다
뭘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나는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렵다
마주칠 때마다 악수의 스크럼을 짜며
가장 글러먹은 시대를 자랑스러워하는 악한들
유난히 티를 내며 술값을 계산한 신사가 누군지도 모른다
노래가 빠지면 서운한 뒷풀이도 기억하지 못한다
실력으로 따지면 가수가 맞는 그 화이트칼라는 누군지
천둥치는 킬리만자로의 노래방에서 졸고 있던 그 가이는 누군지
노예의 한이 서린 지식인의 블루스도 기억하지 못한다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들
이런 인간을 불러대는 저들의 정체는 뭔지
삶은 엄청나게 명료하거나 철저히 비통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즐거워야 하는 내게
완벽하게 통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완벽한 타인인데
고주망태로 노래방기기를 혹사하다 나와
인간은 외로운 티를 내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는 이들
만나기 위해 잊어야 하고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
조직에서 처단되지 않으려면 미쳐야 한다
광기의 나날도 질서롭게 보이는
이 따위 생에서는 무엇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출처: 시와 글벗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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