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佛子)와 절
김소연(나성거주, 약사)
불자란 부처님의 제자를 말한다. 부처님의 종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방법대로 우리도 따라 실천해 보겠다는 높은 스승님을 따르는 제자를 뜻한다. 그런데 이 불자란 말을 모르는 이가 있어 한심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미동포 사회에서는 처음 만나면 대뜸, “어느 교회에 나가세요?” 하고 묻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내가 기독교 인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이런 무례한 교양없는 태도를 대할 때 “난 불자입니다.” 하면 “불자가 뭐에요”하고 되묻는 경우도 있으니,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쉬운 대답으로 “마음닦는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하면 되지만, 난 이 불자란 말을 좋아한다. 이 속에는 스승을 섬기도 따르겠다는 겸손의 의미도 들어 있고, 언젠가 우리도 스승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도 들어 있으니 항상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좋다. 그러한 우리 불자들은 다같은 제자이고 마음공부하는 친구이니, 도반이라 하기도 하고 도우나 법우라고 불러쓰니, 스님도 도반이요, 법사도 도우이다.
불자가 모여 같이 공부하고 기도하고 도를 닦는 장소를 사찰이라고 하는데, 이 사찰이라는 말보다 우리는 절이란 표현을 즐겨 쓰고 절에 다닌다고 말한다. 사찰을 “절”이라 불러진 유래는 고구려의 아도라 스님이 신라에 불법을 전하고자 신라땅 선산군 모례집(털보집)에 기거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털보집”이 어음 변화를 일으켜 “절보집”이 되고 나중에는 “절집”이 되었으며 간단하게 “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난 아무래도 “절”이란 바로 절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절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나라 한사상(단군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에 의하면 절이란 “저의 얼”의 준말이고, 절을 할 때 엎드리는 것의 의미는 저의 얼이 당신의 얼보다 낮기 때문에 보살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소원하는 행위인 것이다. 만약 절에서 절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우스운 모습이 될 것이다. 혜능 선사가 법달 선사에게 말씀하시길, “절은 본래 아만의 깃발을 꺾는 것, 머리가 어찌 땅에 닿지 않겠는가. 나라는 모습 두면 죄가 곧 나고, 공(功)을 잊으면 그 복을 견줄 수 없게 되리.”
그러면 불자라 말하는 불(佛)을 한번 풀이해 보자.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고 억지 풀이다 하고 웃을지 모르나, 재미로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본다. 불은 사람 인(人) 변에 아닐 불(弗)을 붙여 만들었으니, 이는 부처님이란 인간이 아니다 라는 해석도 되겠으나 이를 좀더 하나 하나 풀어보자. 성형문자 풀이에 의하면 불(弗)의 뜻은 서로 반대 쪽으로 굽은 두 선을 실로 묶은 모양을 나타낸다고 되어 있고, 활 궁(弓)에다 두 선을 내려 그었으니, 두 선을 나대로의 해석으로 하나는 하늘을 향하는 선이고, 다른 하나는 땅으로 내리는 선이니, 즉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흐르는 선이 되겠다. 여기서 하늘이라 하면 물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고, 땅이란 물질적인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말할 수 있고, 이 두 반대쪽으로 향하는 것을 활로써 묶어 놓은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활 궁을 잘 들여다 보면(실제 활을 들여다 보면) 등을 오그리고 있는 모습 같다. 즉 불(佛)을 다시 풀어 보자면 인간이 엎드린 상태에서 하늘 기운과 땅의 기운을 조화시키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佛)이 탄생된다고 하겠다. 아무튼 억지 풀이일지 모르나 불자라고 말하는 이 속에는 절하는 모습이 있고, 불자라면 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불자란 단순히 어떤 종교의 교리만을 지키고 믿는 교인이 아니라 스스로가 닦아 제자의 모습에서 스승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엎드려 스승님게 나를 낮추어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회교도인들은 알라에게 절을 할 때 완전 큰 절(오체투지), 즉 몸을 완전히 땅에 엎드리는 절을 의식 때는 하는데, 그야말로 자기를 온전히 땅처럼 낮추어 신 앞에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 불자는 그렇게 큰 절을 하지 않지만 몇 번 하느냐에 따라 고행의 척도로 삼기도 한다. 성철 큰스님이 늘 말씀하신 3000배라든지 말이다. 불자라면 염불을 하거나 경을 공부하거나 절을 하든지 무엇이든 적어도 하나 이상은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은 초보자들은 우선 경을 공부하고, 절하는 습관을 길러 나가길 부탁한다. 절을 하면 얻는 육체적 건강상의 이익은 여기에서 생략하겠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20년 넘게 불교계통 책을 뒤적거렸는데 실제로 내가 절에 꾸준하게 나가게 된 것도 얼마되지 않으며, 절을 시작하게 된 것도 1년이 채 되지 못한다. 사실 아침에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절하면 될 것을 그것이 습관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처음에는 집을 나서기 전 3배 만이라도 하자 결심을 하고서도 번번히 잊어 먹고 차에 앉으면 생각이 나 차 속에서 세번 고개 숙이고 합장 한 적이 많았는데, 차차 익숙해지니 매일 하게 되었고 절의 횟수도 점점 늘려가고 있다. 내 생각에는 몇 배를 해야 한다는 어떤 틀에 얽매이지 말고 각자에게 맞추어 3배를 하든, 3000배를 하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절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고, 꾸준히 하는 것이다. 절을 자꾸 하다 보면 몸도 가벼워오고 머리가 맑아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왜 불자가 되었는가? 진리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구도자가 되어 볼려고. 도를 닦아 보겠다는 이유이다. 마치 까르비의 “구도자의 노래”를 불러 보는 것처럼. “진리에 몸을 담그라. 진정한 삶의 스승을 찾아라. 그리고 진정한 ‘신의 이름’을 굳게 지켜라. 벗이여! 신을 찾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모든 행동이 신을 찾고자 하는 불같은 열망으로 타 올라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신= 진리 = 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길을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에게 절대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리를 찾는 방법도, 알라에게 호소하여 진리를 찾는 방법도 있으나 진정한 길은 나 아닌 타인에게서 구할 것이 아니라 우매한 나를 밝은 지혜로 이끌어 주십사고 높은 스승님께 엎드려 절하면서 그 스승님이 살았던 삶을 우리도 실천해 봄으로써 진리를 찾는 방법을 스스로가 개발해 가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신 분은 많은 성인들 중에서 석가모니가 최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따르고 배우고 깨달아 진리를 탐색해 가는 것이다.
절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어느 날 염불도 하게 되고, 참선도 하게 되니, 마음은 우주의 에너지로 충만되어 기쁨의 날을 가질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하며 도반들이여, 우리 함께 절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