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어서야." 사막은 비어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딘가엔 생명체가 살고 있어요. 그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건 그 사막 어딘가에 물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이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물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다가 정말 갈증을 느끼지만 물이 없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물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알게 될 거에요. 그야말로 그때에 물이란 생명을 담보하는 것이니까요.
"오늘 우리는 갈증을 겪어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우물이 넓게 빛나고 있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인이 온 집안을 즐겁게 해주는 것과 같다. 우물도 사랑과 같이 멀리 뻗칠 수가 있다." 갈증을 겪어 보지 못했다면 생텍쥐페리는 사막의 아름다움, 오아시스의 아름다움을 그다지 절감하지 못했을 거에요. 사막의 오아시스, 그것은 마치 집안에 숨어 있는 여인과 같은 아름다움의 대상이에요. 한 여인, 아름다운 여인,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워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집은 정겹고, 그 집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설레요.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믿음이 사막을 아름답게 해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집안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여인의 손길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그 무엇이 아름답다면 무언가를 감추고 있어서라고 말하자고요. 사하라, 사하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이렇게 여인을 닮은, 보이지 않는 우물이 숨겨져 있어서예요. 오아시스, 그건 상황에 따라 생명 그 자체며 종교 그 자체니까요. "사하라,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이다. 사하라에 접근하는 것은 결코 오아시스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샘물을 우리 종교로 삼는 것이다."
금처럼 귀한 물, 심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겐 신앙 그 자체인 물, 삭막한 들을 초록의 세상으로 바꾸어주는 물, 물은 생명 그 자체이며, 감히 종교라고 말할 수 있어요.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물은 신성 그 자체예요. 사람은 어디서든 물이 있는 곳을 찾으려 하고, 그 물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어요. 이렇게 사람을 모이게도 하고 찾아 헤매게도 하는 물, 물이야 말로 사랑이며 생명이며 신앙 그 자체예요.
"물! 물, 너는 맛도 빛깔도 향기도 없다. 너는 정의 내릴 수가 없다. 너를 알지도 못하면서 너를 맛본다.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너는 생명 그 자체이다. 너는 관능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쾌락을 우리 속 깊이 파고들게 한다.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권리가 너와 함께 우리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말라붙었던 우리들 마음의 모든 샘물이 네 은총에 의해 우리 안에서 다시 솟아난다.
너는 세상에 있는 것 중에 가장 위대한 재물이요, 대지의 뱃속에서 그렇게까지 순결한 너는 가장 섬세한 것이기도 하다."
이토록 아름다운 물, 물은 무색이고 무취일 때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워요. 만일 물에 마그네슘이 섞여 있다면, 그리고 그 물밖에 다른 물이 일체 없다면 사람은 그 샘 위에서 죽을 수 있어요. 짠물이 엄청 많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물을 애타게 찾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물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건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을 때이며, 변질되지 않았을 때예요. 아주 갈증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에게 그런 무색 무취 무향의 물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거예요.
누군가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겐 샘물 같은 그 무엇을 감추고 있어서예요. 그걸 진실이라고 불러요. 사람이 아름다운 건 진실이란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어서예요. 사람을 피상적으로 보지 말고 그런 오아시스를 사람에게서 찾아내야 해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오아시시를 감추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사람을 길들여야 해요. 그 진실을 찾기 위해서요. 그 누군가의 진실과 나의 진실이 만날 때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설레고 행복한 마음이 일렁이겠지요. 사람은 사막처럼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