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관저를 경비하고 있는 어느 병사가 어머니에게 현재 자신의 입장에 대한 문의가 뉴스에 나오고 있다. 병사의 신분으로서 당연한 임무 수행을 하고 있는 자신이 군 인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현재 자신이 맡고 있는 대통령 외각 경비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대통령 경비가 우선인지 닥쳐올 책임에 대한 문제가 우선인지 하는 질문 자체가 군인 인 신분으로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군인은 그것이 무엇이던 자신이 처한 직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대통령의 경비를 위한 일이라면 대한민국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망각한다면 군인으로서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인은 이유를 불문하고 명령에 죽고 사는 신분인 것이다 국가를 수호하고 국민을 지키는데 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나 군인은 오로지 명령에 죽고 사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던 지간에..
대통령 관저를 지키는 병사가 죽고 사는 갈림길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대한민국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군인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리고 대통령 경비를 맡은 군인이라면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대한민국의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고민을 한다면 그것은 군인의 신분으로서 논할 가치도 없다 명령에 죽고 사는 것이. 바로 군인이기 때문이다.
지난 일이지만 내가 군생활을 하던 때에는 지금과 같은 군에 대한 인식과 현대적인 시스템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실제 병영의 생활은 정말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군에 그런 열악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젊은이들이 현재와 같은 선진 시스템에서 병영 생활을 할 수있게 된 것이지만 후배들은 그런 것들을 알고는 있을까.
당시 18세의 나이로 1965년 1월 군에 입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훈련소를 졸업을 하기까지 힘들었던 것은 미국 사람들의 신체 골격에 맞게 제작된 MI 소총과 철 모를 비롯 미국사람들이 사용하던 전투 병기는 모두가 한국 사람들의 체형에는 정말 무거웠었다
그 당시 미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의 체형은 눈에 띄게 차이가 날 정도로 미국 사람들의 체형과 골격은 한국 사람들에 비 헤서는 월등히 차이가 났다.
내키 만한 MI 소총을 갖고 무거운 철모를 쓰고 춥고 배고픔을 견디며 전반기 후반기 교육을 간신히 마치고 부대에 배치되기까지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을 견딘 것은 명령 때문 인 것 같았다.
군인이라면 어떠한 곳에서 던지 내리는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된다는 절대적인 원칙 과도 같은 철칙이 존재한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논산훈련소에서 전반기 후반기 교육을 받으면서 무사히 교육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명령을 준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여진다.
훈련소 내무반에서 내 키만한 MI소총의 가늠 지를 입에 물고 3선에 정렬 5선에 정렬을 하던 그 시절들이 어떻게 보면 씁쓸한 기억으로 아직도 남아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군인은 그것이 무엇이던 해낼수 있어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신분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1965년 논산훈련소 전반기 후반기를 마치고 1965년 5월쯤 예하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처에서 근무도중 1965년 6월 월남 전쟁터에 차출이 되었다. 한번 지명 차출이 된 사람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 개중에 부모들이 사단장을 찾아와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되돌 릴 수없는 것이 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또다시 월남 전쟁터의 적응 훈련을 받고 1965년 9월 월남 전쟁터인 큐논항에 도착 하루 전 배에서 내리기 전 실탄 지급을 받던 날 모든 전우들의 창백했던 얼굴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고 있다.
배에서 내리는 첫날 헬리콮타를 타고 어느 야영지에 도착했는데 그닐 밤 500 미터 전방에서 헬리콮타 수십대가 어느 곳을 폭격하고 있었는데 첫날 머문 야영지에서 그 불꽃이 대낮처럼 보였다.
첫날을 시작해서 그런 날이 6개월 정도가 지속이 되었는데 그당시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은 사실이었섰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해 준 것은 조국 대한민국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명령에 죽고사는 신분인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 두려움과 공포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그 시절들이 감개가 무량해짐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명령에 죽고사는 군인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모두 이겨 낼 수있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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