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정 본지 편집위원의 역사탐방]
청산리대첩과 중국 화룡“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지난 8월 30일 연변의 화룡에서, 아세아주 제일의 이북 무산철광을 바라보며, 두만강을 에돌아 통화로 가는 6346열차를 타고 한 정거장 거리를 달려 십리평 역에 내리니, 얼마 안 걸어가서 화룡시 청산 림장 마을에 도착하였다. 청산골 골짜기 입구, 바로 이 마을의 뒷산에 청산리항일대첩 기념비가 하늘 높이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한국에서 100만 위안을 지원하고 중국에서 시공한 기념비로, 총높이는 40m 라 한다. 산 밑 부분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상 까지는 156개의 층계가 있고, 매 22개 층계마다 3m 길이의 중간 계단이 있다. 한 층계 한 층계 숙연한 마음으로 올라가며 보니 모두 6개의 중간 계단이다. 이렇게 정상까지 오르니 눈앞이 확 트이는데 앞에는 해란강의 눈물이 유유히 흐르고, 곁에는 백두산을 지나 통화와 단동으로 가는 열차가 붕,,,붕,,, 흐느끼며 기적을 울리고 있었다.
열차가 지나 온 곳은 두 산 사이를 가로 지른, 길이 0.5km 높이 50m의 반 공중에 걸려 있는 철교다. 필자가 서 잇던 곳이 바로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한반도 근현대 역사상 유일의 항일 대첩 전적지이며, 또 중국 조선족 선열들이 싸우면서 피 흘린 곳이다.
한반도 6대첩과 청산리대첩
반만년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 6대첩이 있는데, 고대에 있은 살수대첩과 귀주대첩, 임진왜란 때의 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이 있고, 근대에 있은 일제시기 청산리 대첩이 다. 그 중 전적지와 기념비가 유일하게 외국에 있는 대첩은 청산리 대첩으로서, 또 그 위치가 청산리에 참가한 대원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만주(1) 땅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에 있다. 용정에서 떠나는 6346번 열차와 단동으로 떠나는 K7380번 열차에 앉으면, 해란강변으로부터 시작하여, 10km의 터널을 지나고, 아찔하게 내려다 보이는 계곡들을 뒤로 보내면서 , 두 산의 정상들을 이어놓는 40~60여 미터 높이의 철교들을 지나간다. 산기슭으로부터 시작하여, 베개봉을 몇 번 씩이나 굽이굽이 에돌아 정상까지 오르려면 가까운 데로부터 먼데까지, 먼데로부터 눈앞까지, 산 중턱에 우뚝 솟은 흰색의 거인이 당신을 몇 번이나 반겨 맞는다. 어찌보면, 배달민족, 백의 민족, 단군후손들의 영혼이,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모든 대원들의 영령이, 백옥처럼 결백하고, 강철처럼 견고한 기념비로 변하여 이 세상을 바라 보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대첩(大捷)이라 하면 외적과 싸움에서 큰 승리를 얻은 비교적 큰 규모의 전역이나 전투를 말한다. 청산리 대첩이란 1920년 10월 중국 경내 길림성 청산리(현 연변 화룡시에서 10여 리 떨어진 십리평 청산리 골짜기, 화룡시 청산 림장 경내)에서 김좌진을 사령으로 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 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이다.
청산리대첩이란 청산리전투(혹은 백운평 전투라고도 함), 완루구전투, 천수동전투. 어랑촌전투의 통칭이다. 유관 참고 문헌(2)에 근거하여 자세히 서술하려 한다.
독립군의 활동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20년 10월의 훈춘 사건을 조작, 이를 구실로 간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앞서 중국 군 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방침을 통고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로 이동하였다. 이와 함께 북로군정서도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 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자,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 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 하였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 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 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자제했으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 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 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 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난 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 지대 였다.
오전 9시 경 야스가와 (安川) 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 부대의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 사격을 가해 일거에 그들을 전멸 시켯다. 뒤이어 야마타 (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 , 독립군과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빛나는 승리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였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 김훈, 백종렬, 한건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 제3중대장 김찬수, 제4중대장 오상세, 대대부관 김옥현 등이 있다.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이후 계속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930년 1월 24일 자신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다가, 지금의 까자흐스탄으로 옮겨 간 뒤 그 곳에서 76세로 사망하였다.
쓸쓸하고 고독한 기념비
지난 11월 6일 한국의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주최로 조선족 동포만을 위한 “한국선진농업, 농촌견학” 2박3일 연수프로그램이 있었다. 주최측의 안내로 우리 30여명 일동은 아산에 있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를 찾게 되었다.
한산도 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쳐 민족을 도탄에서 구한 장군을 온 국민이 추모하고 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들 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을 추모하고 내려오는 필자의 심정은 복잡다단하였다.
심산속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홀로 서 있는 김좌진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에 오늘도 찾아오는 방문객은 얼마나 되는지?! 2001년 8월 31일에 건비된 이래, 마을 주민들과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기본상 없다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도 조선족들은 가끔씩 찾아온다고 한다. TV에서 보니 지난 국경절과 추석기간에 자치주에서는 기념비 앞에서 항일 투사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땅 밑에 누워 있는 충골(忠骨)들은 멀리에서 들려오는 대한민국 후손들의 말소리만 들어도 반가와 하리라.!!!
봄부터 가을 까지 매일이다시피 수 십 명을 헤아리는 대한민국 관광객들이 연길로부터 출발하여 화룡시 고동하변의 천수동, 어랑촌, 완루구와 해란강변의 백운평등 청산리 대첩 전적지를 지나 백두산으로 질주하면서 지나가니 말이다. 오호라 ?! 청산리 대첩 영령들이여?!
현충사를 방문한 김충정 편집위원
주(注) : (1)간도: 중국 길림성의 동남부 지역으로 두만강 유역의 동간도와, 압록강 유역의 서간도를 이른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백의민족(지금의 조선족)이 많이 살았다. (2)문헌 : 청산리 대첩에 관하여 중 한 조 세 나라에 여러 가지 부동한 문헌이 있다. 특히 독립군 참전 인원수와 소멸된 토벌대의 인원수에 대한 통계가 천차만별이다. 여기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를 참고로 한다.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28호 2014년 12월 5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28호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