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도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 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이 시는 의미를 찾기보다 대상의 순수한 이미지를 감상하기에 좋은 시다.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신비스러움과 자연의 조화로운 정신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다. 현대적 시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춘수는 관념의 시를 쓰던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면 관념과 의미를 해체하고 대상이 갖는 순수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무의미의 시를 쓴다. 이 시도 그런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의 각 행들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하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에 나오는 샤갈의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적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배경으로 '눈'과 '새로 돋은 정맥', '올리브빛', '불' 등의 이질적인 시어들은 모두 독자적인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순수하고 맑은 생명감이라는 공통적인 심상을 연상시켜 준다.
이 작품은 '꽃'을 주제로 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김춘수의 초기 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시에는 시인이 줄곧 관심을 기울인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면서도 아주 낭만적인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샤갈의 마을'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공간이다. 그 공간은 샤갈의 그림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김춘수에 의해 독창적으로 변용되면서 아름답고 따뜻한 시적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샤갈의 그림처럼 따뜻하고 낭만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고, 천사나 올리브 열매들은 신비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또 가난한 서민들의 삶에 내리는 따뜻한 눈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이미지가 이미지로 단순화되기보다는 충만한 시적 의미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 샤갈의 그림과 '샤갈의 마을'
'샤갈의 마을'은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의 <나와 마을>이라는 회화 작품에서 모티프를 취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고향 모습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으로, 동화 속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굳이 김춘수의 시와 함께 감상하지 않더라도 그림 자체에서 순수한 생명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샤갈의 이 그림을 본 독자라면 이 시가 어떤 분위기를 전하고 있는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인은 상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실제 사물이나 사건의 이미지가 아닌 순수한 상상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 이 작품의 표현 기법
이 시는 전체적으로 봄의 생동감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다.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 3월의 눈, 겨울 열매, 아궁이를 지피는 아낙들은 상호 연관성이 떨어지는 소재들을 병치시킨 것이다. 또한 푸른색, 정맥과 흰색 눈, 올리브 빛 겨울 열매, 불 등 대비적인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 즉, 시인이 샤갈의 그림을 보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순수한 심상을 감각적인 언어로 형상화하여 환상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고 있다.
● '무의미시'와 김춘수의 시작(詩作) 태도
김춘수의 이른 바 '무의미시(無意味詩)'란 그가 자신의 시론(詩論)에서 밝히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시들을 주로 일컫는다. 김춘수는 시론에서 이미지를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미지가 관념이나 기타 다른 것들을 배후에 가지고 있으면 '비유적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면 '서술적 이미지'가 된다는 것이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불순한 것이라고 파악한 김춘수는, 그 배후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미지만의 시들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무의미시라고 일컬어지는 '서술적 이미지'의 시들이다.
그는 '서술적 이미지'에 대하여, 대상 자체가 소멸됨으로써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김춘수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과 자신이 지향하는 '서술적 이미지'를 서로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춘수가 '서술적 이미지'로써 대상의 무화(無化) 상태를 지향하는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작 방법에 있어 새로운 시도로 선언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의 본질적 경향을 다시금 드러내주는 그러한 것이다.
지금까지 김춘수의 시적 경향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의 시에서 설사 대상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해도 이는 실제의 외부 대상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김춘수가 그의 시에서 어떤 대상을 묘사하거나 끌어들이고 있다 해도, 이는 언제나 외부 대상 세계와 격리된 자아의 내면에서 무의식적 투사를 통해 구성한 비실재적인 것이었거나, 혹은 고양되고 이상화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 서진영, '김춘수 시에 나타난 나르시시즘 연구' 중에서)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때 복지관에서
탁구 배우려 했습니다
추첨에 떨어져
안타까워 했습니다
이제는 붙여줘도 안합니다 ㅋㅋ
송창식 밤눈,오랫만에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