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었다 숙종 때의 일이다.
'밀양아리랑'으로 유명한 고장 경상남도 밀양땅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이 머슴은 이 집 저 집 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아 혼자서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비록 홀홀 단신 머슴이지만 그는 양반 자손으로 그의 조부는 고경명이 었다는 말도 있었다. 이 사람은 늘 예의 바르고 열심히 사는 젊은이로 소문이 나 있었던 터라 그가 머슴살이를 할지언정 동네사람들도 그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는 않았다.
하루는 머슴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박좌수의 외동딸을 담 너머로 보게 되었다. 연옥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안마당을 거니는 박좌수의 딸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전부터 선성을 들었던 터이지만 이 선머슴은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도 이제 장가를 가야할 나이가 되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하지만 머슴은 침만 꼴깍 삼킬 뿐, 그 박좌수의 딸은 그림의 떡이었다.이 떠꺼머리 선머슴에게 누가 딸을 시집보낼 이가 있을까 말이다.
더욱이 이 소녀는 좌수의 딸이 아닌가?
그때였다.
마침 박좌수가 대문으로 들어가려하고 있었다. 머슴은 공손히 손을 모아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시온지요, 좌수님..."
"음, 총각이군. 일을 하고 들어오는 길인가 보군."
"네, 그렇습니다."
이 총각머슴은 쉽게 발걸음을 떼기가 아쉬워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자네는 참으로 성실한 젊은이야. 암,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있기 마련일세. 자네한테도 훗날 좋은 일이 필히 올 걸세."
박좌수의 칭찬에 힘을 얻은 머슴은 때는 이때다 싶었다. 말을 더 이어가고자 박좌수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좌수님께서는 평소 장기를 즐겨 두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은 저도 장기를 좋아하는데 감히 여쭙기 송구하나 기회가 된다면 좌수님과 장기를 한 번 두고 싶은 마음이옵니다."
박좌수는 의외로 시원스럽게 답을 했다.
"아, 이 사람아! 그렇다면 언제든지 나는 환영하네."
그런데 이 선머슴은 어떻게 해서든지 좌수의 딸과 연관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골몰하였다. "좌수님,
기왕이면 내기 장기를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꼭 재물을 탐내서가 아니라..."
"그 좋은 생각일세... 그냥 두는 것보다는 내기를 하는 것이 더 흥미로운 일이 되겠네. 그렇게 하기로 하지. 한데 무슨 내기가 좋겠는가?"
머슴은 배운 건 없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이런 착상을 해낸 것이다.
'박좌수가 이기면 자신이 3년 동안 머슴을 살아주고, 자기가 이기면 자신을 사위로 삼아 주는 게 어떻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이 말을 듣자 박좌수는 금새 얼굴색이 붉으락 푸르락 하였다.
"예끼, 이 사람, 농담을 해도 뭐가 그리 어불성설을 쉽게 내뱉을 수가 있단 말인가? 농담 말게나. 내 어찌 무남독녀 옥보다 귀한 딸을 장기 한 판 내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박좌수는 진노하여 화를 감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이쿠, 내가 아무래도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군.' 머슴은 생각해보니 엄청난 말실수를 한 것 같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묘한게 세상일이다.
화가 나고 어이 없이 당한 일을 혀를 차며 박좌수는 딸에게 이 같은 얘기를 전하자 그 딸의 말은 의외였던 것이다.
"아버님, 그 사람은 건강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던가요.게다가 본래 양반 자손이라 들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혼인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신 생각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박좌수는 워낙 어이없는 일이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소문은 참 무서운 것이었다.
누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온 동네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박좌수 편이 아니라,
일심하여 박좌수를 설득시키기에 이르렀다. 워낙 머슴이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너무나 좋아해 밀통정을 한다는 소문까지 퍼져 나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자 생각다 못한 박좌수는 고집을 꺾기로 하였다.
그는 장기 한 판은 두지도 못하고 두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 박좌수는 결국 그 둘의 바람대로 혼인을 시키기에 이르렀다.
신랑과 신부는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방님,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글을 아시는지요?"
"솔직히 말해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소. 부끄러울 따름이오."
새신랑은 솔직히 고백을 하였다.
신부는 아주 냉정하게 말을 하였다.
"서방님, 우리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은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하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글을 몰라서야 어찌 되겠는지요? 그러하오니 십년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일 아침 당장 글을 배우러 떠나십시오. 저는 서방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베를 짜며 기다리겠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신랑이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신부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는데 신부는 글을 알고 신랑은 까막눈으로 일자무식하다면 문제도 보통문제가 아닌 것일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아내는 베 다섯 필을 신랑에게 싸서 지어주었다. 신랑은 베 다섯 필을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났다. 베는 돈이 필요할 때 돈으로 바꿔 쓰기 위한 것이었다.
집을 나선 후, 신랑은 경남 합천 땅에 이르러 조용한 곳에 서당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농사일에도 성실했던 신랑은 글을 배우는 데도 누구보다 성실하였다.
나이 어린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학업이 일취월장하여 밤낮으로 십여 년이나 노력을 한 덕에 신랑은 드디어 한양에서 있은 과거시험에서 초시,복시를 모두 거쳐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
그의 문장력도 뛰어났지만 사람 됨됨이가 워낙 뛰어나 궁궐에서 왕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그를 불러 누구의 후손이냐고 물었다.
그가 고경명의 손자라는 사실과 10년간 늦깎이 공부를 하게 된 사연도 이야기하여 알게 되었다.
왕은 그를 밀양부사로 임명하였다. 그의 본명은 고유였다. 그리고 그는 금의환향을 하게 되었다.
뼈를 깎듯 고통스러웠던 지난 10년이었다. 하지만 밀양 땅에 와보니 장인과 아내가 살고 있어야 할 집은 폐가가 되어 있었다.
장인인 박좌수는 3년 전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딸은 혼자 열심히 가산을 일으켜 대궐 같은 새집을 짓고 아랫동네에서 산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하였다.고유는 그 집에 도착하였다.
"이보시오...지나는 과객이오.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오."
안에서 한 아이가 뛰어나와 굳이 방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 손님이라 할지라도 저희 집에서는 손님 대접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으니 사랑방으로 드시지요."
여나믄 살은 돼 보이는 소년은 의젓하기가 어른 같았다. 아이는 바로 고유의 아들이었다.
그도 첫눈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의 부인도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진수성찬을 대접 받은 고유는 그제서야 멀리 두었던 하인들을 불러들여 자신이 밀양부사가 되어 돌아왔음을 알렸다.
10년이란 세월을 남편과 아내는 생이별을 하면서 오매일념으로 서로 그리워하였다.
♤둘의 결실은 서로가 하기 나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