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6
6월12일[연중 제1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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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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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nNDTTCpTeiU
[인천교구 김영인 사도요한(선학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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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과 헌신은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은혜로운 일이 참 많습니다. 도시에서 사무직에 종사할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종이나 씨앗을 뿌리면서, 잡초를 뽑거나 예초기를 돌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니, 그 안에 얼마나 ‘작은 것들’ ‘소중한 생명’들이 숨어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물웅덩이에는 벌써 뭔지 모를 작은 알들이 우글우글 거립니다. 적당히 부드러워진 땅속에는 새끼 지렁이들이 꿈틀꿈틀 댑니다.
이웃 밭과의 경계선으로 심어놓은 나무 가지 마다에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보송보송 매달립니다. 바닥에는 아주 작은 노란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오릅니다. 그야말로 여기저기 ‘작은 것’들의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만 타고 다닐 때는, 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눈부신 광경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개발 논리, 속도전에 젖어 살아와서 그런지 너무 큰 것, 빠른 것, 대단한 것, 뛰어난 것, 앞서 가는 것만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 평범한 것, 소박한 것, 가족적인 것,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신앙생활 안에도 많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 안에서도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특별한 분위기만 선호합니다. 말씀 좋고 ‘기도빨’ 세다는 곳만 순례합니다.
본당이나 단체들 강의를 다니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특강은 한 번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외식이나 간식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명강사라 할지라도 반짝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특강 한번 듣는다고 뭐가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 간식이나 외식이 아닌 주식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미사입니다. 매일의 아침 저녁기도, 이것 역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매일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기도, 습관처럼 드리는 묵주기도, 수시로 바치는 화살기도,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 일상적인 십가가의 수용, 이런 것들이 사실 신앙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여기저기 특별한 곳, 대단한 곳, 신기한 곳, 줄기차게 찾아 다녀봐야 그 끝은 언제나 허탈함이며 공허함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작은 것, 일상적인 것들을 중요시 여기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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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7wtAlGx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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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계명들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늘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십일조와 같은 계명들을 소홀히 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제로 십일조가 구원의 핵심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며 구원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지만 닿으려고 해서는 작은 계명들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 참사(1986)를 생각해봅시다. 고체 로켓 부스터의 O-링 씰 때문에 비행 73초 만에 부서져 탑승한 우주비행사 7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은 저온에서의 O-링 성능에 대한 공학자들의 경고를 간과한 결과였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작은 것은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음주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음주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집에 못 가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타닉 침몰(1912)도 그렇습니다. 선박은 여러 차례 빙산 경고를 받았지만 고속으로 계속 주행했습니다. 또한 선박 건조에 사용된 강철 리벳의 품질이 표준 이하여서 충돌 시 선체가 더 쉽게 파손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치로 인해 ‘가라앉을 수 없는’ 선박이 처녀 항해에서 침몰했고 이에 따라 1,500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목적지가 하늘나라여서는 안 됩니다. 작은 계명들을 무시하다가 결국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이 무언가 이루어 낼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부자들이 해 놓은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영국에 “펜스를 관리하면 파운드가 스스로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Take care of the pence, and the pound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란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동전을 잘 관리하면 큰돈은 저절로 관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승호 회장도 “자식(동전)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모(지폐)가 잘해줄 리 없다.”라고 말합니다. 김승호 회장이 자신의 회사 앞의 노숙자에게 지폐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놀라서 지폐와 큰 동전들만 가지고 작은 동전들은 바닥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아무 가치도 없는 동전들을 주워서 회사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적은 돈에 충실한 자신을 보며 큰돈들이 들어올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이들이 작은 것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그냥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커다란 부를 이루어내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작은 것을 소홀히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계명을 지키게 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잔 다르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려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이 ‘세심증’을 겪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성인이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사제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전사, 사제,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나의 작은 존재여, 나는 선지자들과 박사들처럼 영혼들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이 있습니다. 나는 온 땅을 여행하여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모든 땅의 땅에 심기를 원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신의 소명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수도원에서만 살았음에도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주보 성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뜻만 있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더 하늘나라에 확실히 들어가는 목적, 곧 위대한 성인·성녀가 되는 사명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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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그러자 나타나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러자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
2달 전쯤에 봉사자 한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 본당에서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해서 성령의 밤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댈러스에서 그게 가능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한번 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성령 기도회를 보았습니다. 지구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당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봉사자는 찬양 팀을 만들었고, 악기 봉사자들로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찬양 팀의 이름을 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라우다떼(찬양하다)’로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었고, 봉사자는 찬양 팀과 음악 밴드와 함께 멋진 찬양의 밤을 신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댈러스에 뭐 대단한 게 있을까?’라는 저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찬양의 밤을 마치고 저는 봉사자에게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앞으로 찬양 팀과 음악 밴드가 함께하여 ‘음악 피정’을 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바알의 예언자들이 엘리야를 이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알의 예언자를 물리치시고,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골리앗은 큰 칼과 갑옷을 입었습니다. 다윗은 볼이 불그스레한 청년이었습니다. 손에는 돌팔매만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배움이 많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부들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비록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교회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역사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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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셨다. 그리고 파스카 신비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계명도 하늘나라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롭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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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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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문제로 충돌한 일이 많았는데, 그런 일들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감히 폐지하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의 실천이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완전한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입니다.>
실천이 불완전하고 부족했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고(마르 10,17),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10,19) 그런데 그는 십계명만으로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예수님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0-22)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고, 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지향으로 계명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긴 했는데, 그에게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바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는 하지만 재물에 대한 애착심에 막혀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부족해지고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경우에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율법 실천을 완성하는 방법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2)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를 해설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계명들과 율법들을 잘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산상설교’ 전체가 ‘율법 실천의 완성’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산상설교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은, 또는 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바로 ‘사랑’입니다.>
3)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입니다.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입니다. <한 자 한 획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계명들과 율법들은 없어지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명들과 율법들의 역할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도 계명들과 율법들을 의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떻든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는 “자기 마음대로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시하거나 안 지키고”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리사이들은 ‘사랑 없이’ 안식일을 지키기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라고 가르치셨고, 그렇게 실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 안식일을 원래의 정신대로 지키신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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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율법의 완성>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보면 예수님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손씻는 규정라든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쳐 주는 것 등, 사실상 율법의 파손자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서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일 획, 일 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폐하려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려는 율법은 무엇이고, 예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그토록 책망하시었기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율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똑같은 한 종류의 율법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말은 네 가지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십계명을 율법이라는 의미로 사용함.
2) 구약성서의 첫번째 5권, 즉 모세 5경의 말씀들을 말함.
3) "모든 성서의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율법과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함.
4) 구전 율법이라고 해서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의미하기도 함.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의 율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성서 그 자체라든가, 십계명 그 자체에는 규례와 규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으며, 크고 넓은 원칙만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매사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수천 개의 규정과 규칙을 만들어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사소한 규정과 규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삶과 죽음이 달려 있는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라고 간주했고,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그들의 말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이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 전체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교훈 전반에서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한 자 한 획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하게 율법을 심화하시거나 폐기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유다교의 613가지에 이르는 계율들을 :
- 원수 사랑 (마태, 5, 43-48 :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주시고.……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과
- 황금률 (마태 7, 12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마태 22, 37-40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것이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이렇게 환원시키어 단순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풀이하신 율법(계율)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일컬어질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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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바알 하느님>
독서가 전하는 구절이 은혜롭습니다. 그날 카르멜 산에 모여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엎드려 부르짖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때 뿐 그들은 다시 풍요한 삶을 위해서 바알을 섬기고 금송아지를 야훼라 경배하는 행동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좋은 게 좋은 것이며 많아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지 고민하는 일은 믿음의 근본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물음에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미카 6,8)
그날 엘리야 예언자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할 수 있었던 일이야말로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했던 자세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전적으로 따랐던 행위임을 깨닫습니다.
때문에 그날 바알 예언자 사백 오십 명과 맞섰던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고쳐 쌓으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이 모든 일을 한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날 엘리야 예언자의 기도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정과 신의에 꼭 들어맞고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겸손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맨 하늘에서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기적은 그 공정과 신의에 충실했던 겸손한 엘리야 예언자를 기뻐하신 하느님의 응답이라 새깁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만 부자가 되도록 출세하도록 큰소리를 치면서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풍요를 빌고 부귀영화를 청하는 기도에 솔깃해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잡신들처럼 복채에 따라서 복을 줬다 뺏었다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세상에서 얻는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도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주님께서는 무조건 이 땅의 것은 소홀히 여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집이나 가족들을 팽개치고 돌보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 집보다 더 내 것에 연연하는 마음보다 좀 더 많이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기억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할 때에는 꼭 현세에서도 여러 곱절을 채워 주실 것을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주장하고 권하고 따르는 재태크 방법을 하느님의 뜻보다 낫게 여긴다면 바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창하고 향하는 갖은 유형의 특별하고 대단한 삶을 위해서 온 정성을 쏟고 있다면 바알을 숭배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날 엘리야 예언자에게처럼 기쁨의 응답을 쏟아 부어주실 수가 없도록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라고 엎드려 외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진리입니다.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기를 청하는 것일 때 내가 바로 그분의 종임을 깨닫고 순명할 때 그분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하여 주신다는 이르심이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언제까지나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이냐?”라고 물으십니다. 무어라 답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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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율법의 완성>
예수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첫 계약’ 때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새 계약’이 주는 은총의 빛으로 해석하시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율법이 더 이상 돌 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의 ‘가슴에’ 곧 그 ‘마음에’ 새겨진 것으로 드러납니다.(예레 31,33)
그 ‘종’은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기”(이사 42,3) 때문에 “백성을 위한 계약”(이사 42,6)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어,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받기까지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들이 먼젓번 계약 아래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셨기”(히브 9,15)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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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
자연과 언어 사이에 있는 간극 곧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우리는 쉽게 감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은 연속성,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지는 상태나 성질을 늘 함유하고 있지만, 이를 표현하는 언어는 불연속성, 분절성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과 언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처럼 구약과 신약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핵심인 율법과 예언의 정신은 신약에도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동시에 신약에 와서 불연속성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까닭은 구약의 율법은 낡고 화석화된 언어라면, 신약의 복음은 살아있는 자연 곧 생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 하고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는 구약의 핵심인 율법과 예언의 근본이자 본질인 ‘사람과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충실한 계약 곧 자비와 사랑은 변할 수 없기에 이어지겠지만, 본래의 의도와 정신이 사라진 채 율법주의적인 문자는 파기하시겠다는 의도를 표명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셔서 율법과 예언을 통해 하느님 당신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셨지만, 세상과 사람은 당신의 뜻을 거역했기에 마침내 당신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 구원계획을 완성 곧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율법은 한계를 지닌 인간의 언어, 불연속성이라면 복음은 예수님의 인격 곧 예수님의 존재와 삶 자체이기에 단절과 분절이 아닌 영속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사랑으로 사람이 되신 당신의 강생과 당신의 파스카로 말미암아 세상과 사람의 구원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의 완성은 율법 준수, 문자라는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실천에 있지 않고, 율법의 근본인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인 사람을 구원하고 사랑하는 일, 곧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13,1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하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의 실행이 곧 완성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매개이며 본질입니다.
사실 율법이 필요한 때가 있었죠. 사도 바오로는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3,24) 하고 가르치면서도, 아울러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3,20)하고 선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5,19)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23,4) 하고 말씀하신 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던 율법 학자들처럼 ‘입술’로만 살지 말고, 비록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의 삶을 살라고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5,19) 하고 확언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존재의 크기는 바로 율법과 복음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존재와 삶으로 실행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중심은 사람이며,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달려 있기에 무엇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유효한 까닭은 바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영속성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를 예수님은 당신 존재와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고 그 흔적을 따라 성령과 함께 뒤따라오기를 지금도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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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랜만에 어느 자매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전의 젊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도 많이 늙었네요.”
무엇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요? 자매님의 삶일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이 자매를 거의 30년 만에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50대 초반이었던 자매님은 80대 할머니가 된 것이고, 저는 20대의 풋풋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50대 중년이 되어 만난 것입니다.
자매님을 그리고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그 흐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 바뀌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이기시고 또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큰 착각은 자기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구약 시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율법을 통해 사람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은 자유와 해방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억압과 구속하는 법으로 만든 것입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팽배했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정신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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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큰 사람이 되십시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여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는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 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작은 것,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작은 것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가운데 큰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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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만 그러하게 하소서>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다만 그러하게 하소서>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불신에는
이유가 있고
믿음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믿음일 때까지
다만 믿게 하소서
절망에는
이유가 있고
희망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희망일 때까지
다만 희망하게 하소서
증오에는
이유가 있고
사랑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사랑일 때까지
다만 사랑하게 하소서
거짓에는
이유가 있고
참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참일 때까지
다만 참되게 하소서
악에는
이유가 있고
선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선일 때까지
다만 선하게 하소서
추함에는
이유가 있고
아름다움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아름다움일 때까지
다만 아름답게 하소서
죽임에는
이유가 있고
살림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살림일 때까지
다만 살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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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戰士)>
“더불어(together) 영적승리의 삶”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오늘 복음 환호송 시편이 맘에 듭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참으로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모두가 제대가 없는 평생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이 됩니다. 이 주제는 수도사제생활 만35년 동안 강론시 계속되는 주제가 되었고, 되고 있으며 사는 날 동안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주님의 빛나는 불굴의 전사 엘리야 예언자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 450명과의 대회전에서, 1:450의 싸움에서 엘리야의 승리로 끝나는 신바람 나는 긴 장면을 읽으면서 순간 착안한 오늘의 강론 제목이 “주님의 전사, 더불어(together)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겠고, 영적승리의 삶에 앞에 반드시 붙어야 할 ‘더불어(together)’란 말마디입니다. 영적승리의 삶은 혼자가 아닌 주님과 더불어의 삶, 영적전우들과 더불어의 삶을 통해 쟁취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과 맹자의 말씀도 오늘 강론 주제와 일치합니다.
“시련이 나를 태우는 불이라면, 노력은 나를 깨우는 망치다. 불굴을 품은 강철은 수없이 두드려져야 완성된다.”<다산>
“하늘이 큰 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뜻을 세우기까지 괴로움을 주고 피곤케하며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한다.”<맹자>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다산과 맹자는 주님의 빛나는, 불굴의 전사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습니다.
저보다 11세 연상의 87세 노시인이 출간한 시집이 흥미로워 구입했습니다. 유명한 단편소설 <소나기>의 저자 황순원의 큰 아들인 황동규 시인이 그 주인공입니다. 앞머리에 소개된 이채로운 말마디를 통해서도 이 시인 역시 불굴의 전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시인 황동규는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도정에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한가운데서 세상 살기의 의미와 진실에 이르기 위해 하루하루 전력투구하고 있다.”
얼마전 “그냥 살라” 제 강론에 항의성 비슷한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정말 치열히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 레지나 자매와 오고 간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정말 그냥 살아요. 눈뜨면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면 졸고 성체조배가면(21시-22시) 그냥 자고 자다가 집에 오면 또 자고 새벽부터 다시 시작...그래도 행복합니다. 졸지도 잠도 주무시지 않는 주님이 계시니까요.”
“자매님은 그렇게 치열히 사는 것이 아름답고 맞습니다. 그냥 주님의 전사로 치열히 사시다가 때로 주님 앞에서 그냥 쉬기도 하시구요”
어제 오후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이런 축제와 같은 장례미사를 장례예식장에서 봉헌하기도 처음입니다. 포크레인 요한 형제의 모친 이순금 마르타 자매님의 장례미사였습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입니다. 수도원 초창기부터 한결같이 성실히 수도원 공사시나 온갖 허드렛일 봉사를 해준 포크레인 세례자 요한 형제를 통해 만나뵙지 못했지만 그 어머니의 인품과 신앙을 짐작할 수 있었고 적중했습니다.
장례미사시 30여명이 성체를 모셨고, 미사전에는 10여명 젊은 자손들이 고백성사를 봤고 유가족들이나 참석한 분들의 모습이 즐거워보이고 착해 보였습니다. 요한 형제가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당시 12살의 큰 형에 동생이 셋이니 어린 자식들 5명을 젊은 과부가 되어 산전수전 다 겪으며 훌륭히 키워냈고 끝까지 충실히 신앙생활에 충실하다가 90세로 선종한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전사로서 더불어의 평생 영적전쟁을 승리로 끝낸 죽음으로 마침내 천국에 입장하셨다고 강론중 전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장례미사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축하합니다! 주님의 전사, 마르타 자매님, 복된 선종의 죽음을!”으로 정했습니다. 미사후 수도형제의 “지난 주일미사 강론시 ‘생명선’(lifeline)이란 말마디가 무슨뜻인가요?” 질문이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공동체 울타리가 바로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보호해주는 생명선입니다. 공동체 울타리 생명선이 없은 노숙자나 행려자들 얼마나 위태한 삶을 살아갑니까? 더불어의 울타리 생명선이 무너져 혼자될 때 절망과 좌절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우리 수도형제들 수도원의 울타리 생명선에서 벗어나 세상 한복판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되겠습니까? 얼마전 어느 선배가 후배에게 주었다는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직장이 전쟁터라고? 밀어내기 전까지는 살아 남으라. 밖은 지옥이다!’”
영적전투의 승리에 공동체 더불어의 품 울타리, 생명선(lifeline) 안에 머무름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천하무적, 하느님의 전사 엘리야가 최종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믿음 충만한 언행을 소개합니다. 흡사 다윗과 거인 골리앗의 전투를 연상케 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나 됩니다.”
최선을 다한후 생사가 달린 절박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영적전투에서 만반의 준비를 다한후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주님의 전사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주십시오.”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에 이어 지체없는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리니, 엘리야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 정말 통쾌한, 유쾌한, 상쾌한 삼쾌의 빛나는 승리입니다. 그대로 빛나는 영적승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이 친히 배경이, 동반자가 되어 주시는 더불어의 영적전투일 때,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엘리야를 훨씬 능가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불세출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한 철저한 주님의 전사 예수님인지 다음 대목에서 확인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율법이나 예언서들 모두에 대한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예수님의 확신이 단호한지요! 모세의 십계명을 업그레이드 하여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선보인 주님께서는 이어 참으로 모든 율법을 포괄하면서도 그들을 훨씬 업그레이드 된, 6개의 대당명제를 제시합니다.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서 완전한 영적승리를 위한 최고의 처방을 제시하십니다. 내일부터의 복음이 소상하게 이를 밝히 보여줄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살아 계신 하느님과 함께 할 때, 공동체의 영적전우들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로써 영적승리의 삶이 뒤따를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끝으로 읽을 때마다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는 제 좋아하는 담쟁이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26년 전 1998년 나이 50에 쓴 시이지만 여전히 새롭게 읽혀지는 제 좋아하는 자작시 중 하나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일이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요 구원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 주님의 전사이다” <1998.6.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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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없는 황홀경?>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오늘 독서는 카르멜산에서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입니다. 누구의 신이 응답하는지 그것을 놓고 대결하는데 그 과정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예언 황홀경에 빠지지만 신의 응답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
이것을 보면서 저는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과 같은 경험을 우리도 하거나 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황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없는 꽃 감상을 하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하느님 찬미는 없고 꽃 감탄만 하는 일은 우리에게 많지요.
이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서 그리고 기도한다면서 하느님 없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부좌 틀고 관상 기도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명상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에 그치거나 하느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그 목적인 기도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목적이 하느님 또는 이웃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라면 그것은 재물을 많이 달라고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적인 기도이기에 당연히 사랑의 기도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시시하게 물질을 탐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탐욕인 황홀경을 기도 욕심으로 원할 수 있습니다.
황홀경을 다른 말로 하면 무아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약 중독자들도 원하는 황홀한 경지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황홀경을 탐할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했듯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원해야 할 것이고, 그랬을 경우,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아닌 크나큰 고통이 반대로 올 수도 있습니다.
성인들의 경우, 특히 프란치스코의 오상의 경우와 같이
너무나 사랑하여 기도할 경우, 주님의 상처를 같이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도 사랑하면 똑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라고 알려진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지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이 황송하옵게도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꿀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 달게 해주시고, 불과 같은 당신에 내 마음 뜨겁게 해주시어, 당신 사랑의 크신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저의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 주님을 사랑하듯이 지극한 사랑으로 기도하면 그의 고통을 내가 대신 느끼는 일도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의 고통이 내게 옮겨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고 신체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이런 기도를 바치기까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 예언자들처럼 고차원적인 욕심을 채우는 기도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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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율법의 완성!>
오늘 복음(마태 5,17-19)은 '예수님과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내려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이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잘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큰 잘못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간과했고, 이 율법을 의인과 죄인으로 갈라놓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율법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외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율법은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이지만, 그것을 형식적으로만 지켜서는 안 되고,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은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고 새로 만든 법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라는 계명'입니다.
율법의 완성!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때인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나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심판의 잣대'는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들을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켜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고,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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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mbxHlYy2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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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부족한 우리의
사랑을 채워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사랑으로 완성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 가닿는
거기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이끄십니다.
사랑으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가르치십니다.
가치있는 삶이
정녕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오독과 혼돈
사이에서도
첫자리에 계셔야 할
하느님을 드러내십니다.
사랑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사랑입니다.
바꾸고 고쳐야 할 것은
계명이 아니라
우리 마음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우리 마음을
쓰다듬고
끌어안습니다.
탐욕과 집착
이기심을 내려놓을 때
사랑의 계명은
너와 나, 우리 사랑의
관계를 더욱
완성시켜 줄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이
채워지는 완성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이 여정이
완성의 참된 여정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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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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