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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 13] 부파불교의 성립과 아쇼카 대왕 / 정병조
부처님의 입멸 후 정치적으로 인도 대륙은 여전히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알렉산더 대왕의 서북인도 침입이 있었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도 내부의 국내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인도에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Aioka)라는 불세출의 영주가 출 현하였다.
그는 원래 인도 중부를 무대로 삼고 있던 마가다국의 후예였다. 마가다국은 아쇼카 왕의 조부가 되는 찬드라굽 타 대제 시절에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3대를 이어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북쪽으로는 아프칸 지역까지 밀고 올라간다. 또 남쪽으로는 데칸고원을 넘어서 칼링가 일대까지 그 휘하에 넣게 된다. 아마도 인도5천년 역사상 아쇼카 왕만큼 넓은 영토를 확보한 제국을 건설한 시대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아쇼카 왕은 탁월한 전략가였으며 정치지도자였다. 그런데 그는 칼링가와의 전투를 통해 불교로 귀의하게 되는 기연을 맺게 된다.
원래 그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아쇼카 왕은 갈링가와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난 뒤 그전장터에 섰다. 전장터에는 수많은 인마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많은 양측 병사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 신음소리가 아쇼카 왕에게는 마치 자신을 향한 원망의 음성으로 들렸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이와 같이 많은 인마를 살상해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호령하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연 이 많은 인마를 살상한 대가가 내 야욕을 채우는 그것뿐이란 말인가? 그 무상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 그리고 정법에 의한 통치를 하겠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치 이상 속에 실현한 최초의 왕이 된 것이다.
아쇼카 왕은 불교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하였다. 먼저 인도의 각 정복도시마다 보시원을 두었다. 그 보시원은 주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호요양소였다. 그가 세웠던 자비원, 보시원 등에는 가축병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2천 3백여 년 전의 일이었음을 상기하면 그 당시 얼마나 구호정책이 세심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부처님의 성지를 참배하면서 그곳에 돌로 된 기둥을 세웠다. 그것은 아쇼 카 왕의 석주라 불린다. 부처님의 4대 성지, 즉 룸비니, 보드가야, 사르나트, 쿠시 나가라 외에도 부처님의 발자취가 머물렀던 기원정사, 바이샬리 등 모든 곳에 석주를 세웠다. 우리는 2천 3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석주를 통해서 불교 성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석주 때문에 불교 유적지들을 알게 된 것이다.
약간 전설적인 내용이지만 아쇼카 왕이 팔만 사천의 석주를 곳곳에 세웠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수의 석주를 세웠다는 의미이리라. 지금도 인도 전역에는 30기가 넘는 아쇼카 대왕의 석주가 원형 그대로 남아서 옛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것은 사자가 위를 향해 일어나 포효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뒷다리로 대지를 박차면서 두 다리로 뭔가 받치고 있는 형상과 그 주위에 둥근 원주를 세워 놓은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석주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무력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정법에 의한 통치를 하였다. 그는 정 치에 대해서 '정치란 국민에 대한 빛을 갚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정치란 국민을 위한 것이다. 국민들이 아파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즉, 상대방과 나와의 이견을 좁힐 줄 아는기술이 있어야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야당과 권력으로 전횡을 일삼는 여당 등은 아쇼카 왕의 정법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아쇼카 왕의 칙령은 '아쇼카 왕의 마애 14장 법칙'이라고 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법에 의한 승리라는 의미로 새겨놓은 것이다. 암벽이라든지 석주 등에 새겨진 아쇼카 왕의 마애 14장 법칙은 불교뿐 아니라 고대의 인도사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그뿐 아니라 아쇼카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법의 순행을 계속하였다. 각 지역마다 다니면서 과연 법답게 행정을 실시하고 있는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지 않는지 알기 위하여 순행을 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 이전까지는 궁중의 연회 때마다 말, 양 등을 도살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아쇼카 왕은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관행 자체마저 폐지시켰다. 또 법대관이라는 부서를 두고 부처님의 법을 펴도록 하였다. 법대관의 규율에 의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덧붙여 아쇼카 왕의 치적 하나를 더 들어보자. 최초로 외국에 불교를 전파한 점이다. 아쇼카 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 마힌다라는 장로를 스리랑카로 보내서 최초로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킬종의 전도사 같은 성격을 띠고 이웃 나라로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로부터 미얀마, 라오스, 쟈바 섬까지 일련 의 동남아시아 불교가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드디어 불교가 세계 종교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 었던 것이다.
그밖에 흥미로운 점은 아쇼카 왕의 행적이 우리나라의 역대 군왕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이다. 예컨대 신라 진흥왕순수비도 아쇼카 왕의 석주와 관련시킬 수 있다. 마운령비, 창녕비 등의 순수비는 단순한 경계 표식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성지를 참배하고 석주를 세웠듯이 진흥왕도 아쇼카 왕의 행적을 본뜬 것이라고 이해된다.
또 신라 문무왕의 경우를 들어보자. 경주에서 대왕암이 라는 곳으로 가다보면 암곡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문 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뒤 무장사라는 절을 세웠다. ' 무장'이란 갑옷과 투구를 감춘다는 의미이다. 문무왕은 삼 국을 통일한 직후에 '앞으로 어떠한 명분일지라도 다시 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상징적인 표식으로써 무기와 갑옷, 투구 등을 땅 속에 묻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장사를 짓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도 아쇼카 왕의 행적을 본뜬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 외에도 진흥왕 때 있었던 유명한 고사로서 '금강산 유점사'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러 하다. 강릉 앞 바다에 배가 닿았다. 그 배 안에는 불상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편지가 있었 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인도의 아쇼카 왕이 불상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인연 있는 땅에 가서 조성되어지기를 바라면서 인도에서 실려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라 조정에서는 불상을 만들게 되었고 아주 훌륭하게 불상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조성된 불상이 유점사뿐 아니라 황룡사에도 있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바로 장육존상이다.
사실 이러한 고사는 연대적인 문제가 있다. 아쇼카 왕이 기원전3세기경의 인물이고 진흥왕은 기원후 6세기에 활약했다. 따라서 그 연대가 무려 7백년 가까이 차이가 난 다. 역사적인 엄밀성만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 라. 그러나 그 설화가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인 면을 생각 해 보았을 때, 고대의 우리 선조들이 어떤 경로로든 아쇼 카 왕의 선정과 업적을 알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니까 역대의 군왕들이 아쇼카 왕을 본받으려고 했다는 것 이다. 이후의 불교 교단사에서도 아쇼카 왕을 전륜성왕이라고 부르게 된다. 전륜성왕이란 인도 불교에서 아주 이상적인 국왕을 가리킨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 정법 통치를 하고 그 힘에 의해 사대주 오대양을 통솔한다는 왕이다. 역사적으로 그런 왕이 있을 수 있다면 아마도 아쇼카 대왕이 아니겠는가 하는 믿음이 생겨났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학술적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아쇼카 왕 시절에 세 번째의 결집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남전 계통,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지지되고 있다. 그러나 북방 계통에서는 아직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학설이다. 즉, 당시의 승가가 상당한 부를 향유하게 됨에 따라 타락의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포살법회마저도 7년 간이나 하지 않았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전해진다. 아쇼카 대왕은 이것을 못 마땅히 여겨서 '여법치 않은 수행 절차를 가진 승려들은 사원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칙령을 반포한다. 비정통적이도 불교의 교의를 어기는 무리들을 대규모로 추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대에 제3결집 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명확한 확인 자료가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 다. 아쇼카 대왕의 시대에 전대미문의 융성을 누렸던 불교문화도 아쇼카 대왕이 죽고 나자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인도대륙은 사분오열된다. 그것은 마우리아 왕조 자체가 붕괴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위대한 군주, 위대한 지도 자가 없어지고 난 다음 공백기가 생긴 것이다. 그 후로 쿠샨은 중앙아시아 이민족의 제국이 형성되기 이전까지 인도는 또한 2~3백년에 걸친 분열기를 맞는다. 그리고 불 교는 더욱더 많은 부파로 나뉘게 된다.
통상 부처님의 입멸 직후부터 2백여 년간의 인도불교를 아비달마 불교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아비달마에서 아비 란,'~을 해석한다, 주석한다'라는 의미이며, 달마(dharm a)란 흔히 '법'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혹은 그 깊은 의미 를 손상치 않기 위해서 그대로 '달마'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다르마라는 말 자체가 다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어떤 때에는 진리라는 의미로도 쓰여 지지만 복합적인 자연의 현상, 섭리 등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비달마라고 하면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여러 현상에 대해서 해석, 주석을 하고 분석하였던 시대라는 뜻을 갖는다. 이것을 통상 소승불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부파불교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소승이란, 대승불교에서 지칭한 상대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용수보살 같은 이는 중론등의 저술에서 당시의 부파불교가 심취했던 여러 가지 오류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소승의 무리들이라고 낮춰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부파라는 개념을 소승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비달마의 불교는 해석불교, 불교, 또는 부파 불교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당할 것이다. 부파불교시 대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도 있다. 그 시대에는 아비달마라는 말 그대로 사물의 어떤 현상적인 것들을 매우 냉정하고 엄밀하 게 분석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흔히 서양 철학사에서 중세의 철학시대를 스콜라 철학이 라고 부른다. 그 스콜라라는 의미도 교부신학에 대한 주 석을 뜻한다. 즉, 철저하게 철학적인 방법론으로써 신의 존재, 신의 구원 등을 논증한다. 따라서 철학사에서는 암흑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히 침체되었던 시기였 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학문불교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 아비달마의 불교다. 이것은 위대한 교조가 열반한 뒤 나타난 운명적인 변화이다. 왜냐하면 부처님, 그는 우리가 말하는 일상적인 범주로써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 을 느낀다. 이를테면 부처님은 철학자이다. 부처님이 가 지고 있던 철학적인 조직력, 사성제, 팔정도나 십이인연 등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제시했던 것은 거의 완벽에 가 까운 논리의 완성이다. 삶과 죽음의 번민과 그것을 극복 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과학자라 할 수도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고정적인 실체는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 연에 대한 십이연기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화엄에서 말하고 있는 육상원리의 상호보완적 관련 같은 것은 과학에서는 상대성이론 등에 의해 증명을 하고 있다.
동시에 부처님은 위대한 종교인이다. 카리스마적인 권위로서 군림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였다. 또 그를 믿고 따르는 교단을 창시하였기 때문에 위대한 종교인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현대식으로 말 하자면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문과학 등의 모든 학문 범주들을 통달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한 위대한 인격이 이제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 없는 상황 속에서는 위대한 인격이 가졌던 일부분의 어떤 능력이나 일부분의 현상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비달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입멸 직후 부터 아비달마불교가 펼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밀하게 분석해 그 법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출가중심적인 학문불교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고대사회에서 출가자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오늘날과는 판이하다. 그들은 정신적인 권위의 상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집단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출가자들은 엘리트 그룹이었다. 아비달마의 불교도 출가자 중심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아비달마불교가 고대사회의 그 모든 것들의 집합이었기 때문에 출가중심적인 불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학문불교의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관념의 허상에 얽매이고 공부만이 최상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와 같은 학문불교를 터득하면 거기에서 진실한 믿음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만약에 모르고 믿는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어놓은 집 과 같다. 맹신, 광신 등은 모르고서 믿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반면 아비달마불교는 학문불교를 이루는 공헌도 하였으나 동시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그것은 법유아무라고 부르는, 단지 학문을 위한 번쇄적인 학문불교로 변질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진실한 믿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학문이야말로 알파(a)요, 오메 가(H)이며, 모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짐으로써 번쇄하고 현학적인 학문 풍토에 빠진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비달마의 논서로는 <십주비바사론>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서적들은 부처님이 가르친 법에 대한 해석을 보여준다 그 주장들은 대승불교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렇게 비판되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 당시의 부파불교 사람들이 '법요아무'라는 사고방식을 가져 부처님의 진실한 법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적으로 다르마를 이해하고 출가정신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대승불교라고 하는 위대한 불교사상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이는 아비달마불교가 이룩한 위대한 사상적인 업적이라고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