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석환목사블로그자료입니다
전능하산 천지를 만드신>
사도신경①
본문: 창 1:1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는 12사도들의 신조(믿는 것)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믿음의 문자화의 필요성을 느껴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성경을 가장 짧게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그 이후 모든 시대와 교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믿음의 근본 기초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도신경을 잘 배워 우리의 믿음의 근본을 바르게 세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바로 당신을 창조하셨음을 알고 계시는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하신지요?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 창조물 위에 우리 인간들이 가공을 한 것 일뿐이지요. 때로는 악하게 때로는 선하게 가공을 하였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 노력으로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찾다가 끝이 나고, 또 다른 사람이 찾다가 끝이 났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찾다가만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 큰 보물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사람에게 쓰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언인지요. 인간이 그토록 찾았었고, 찾고 싶었던 해답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인류의 빛입니다. 모든 인류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알게 된 사람은 이제 그 하나님을 섬기며, 그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이루어 가면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기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고(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합니다. 인간은 그 한계 내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대다수는 의도적으로 찾지 않음으로 책임 없이 아무렇게나 살고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음은 왜 그렇습니까?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순간을 그 누구도 다시 갈 수가 없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단지 믿을 뿐입니다. 진실하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고자 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이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하고, 찾지도 않음으로 사람들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존재하게 된 존재가 아닙니다. 목적을 가지신 그 분이 우리를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분은 인격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가장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이 땅에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물질의 일부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좋으신 분이기에 우리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곧 선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조금 세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귀하게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우주는 더 어렵기 때문에 오래 걸리고, 동물은 짧게 걸리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단순히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가지는 말씀만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삼위하나님이 의논하시고, 흙으로 정성껏 만드시고, 그 안에 영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온 우주를 먼저 만들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인간을 아주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만드셨습니다. 자신의 형상 따라 너무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유일하게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귀하게 창조하셨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우리의 출생비밀입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출생비밀을 알 때 우리가 단지 원숭이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인간으로서 의미 있게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출생비밀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다보면 인생이 뒤죽박죽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줄 잘못 서서 한 평생이 꼬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이 땅이 타락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아픔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선하신 하나님임을 알기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힘을 얻어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땅이 혹죄로 물들어 불평등과 아픔들이 많이 있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자신이 창조하신 이 땅을 결코 그렇게 내 팽겨쳐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아픔과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살아갈 이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진공청소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의 모든 슬픔과 아픔과 불평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그 말씀이 싹 쓸어갔습니다. 모든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멸시를 하나님이 쓸어가게 하시고 우리는 다시 우리를 귀하게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귀한 공주와 왕자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창조하셨기에 행복합니다
우주를 보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금방 수긍하게 됩니다. 우주의 크기는 무한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무한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지 현재의 인간의 능력으로 측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장엄한 태양과, 신비한 자연의 조화들, 너무나 넓고 크고 질서정연한 우주를 보면 참으로 위대한 그 누군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의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것(피조물)을 신이라 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침묵하고 계십니다. 어찌 하나님은 가장 귀한 인간을 그렇게 허물 많게 만드셨는지요? 아니 허물덩어리로 만드셨는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인간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장 완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주를 만드시면서도 그렇게 힘들이지 않으셨는데 왜 유독 인간에게만 그렇게 소중하고 소중하게 만드셨을까요? 그 소중함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인격입니다. 이 인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실패한 작품이 아니라 너무 완벽하기에 죄도 범하는 것입니다. 너무 완벽한 인격으로 만드셨기에 그 인격으로 감히 하나님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격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 한마디를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바로 죄로 인하여 아픔과 고통이 있지만 버려진 삶이거나 무익한 삶이 아니라 가장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계획에 의해 이 땅에 사는 것이요. 이 땅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으셔서, 곧 능력이 부족하셔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타락하였고 그래서 우리가 버려진 존재라면 우리는 너무나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과 계획 아래에서 오늘도 여전히 가장 귀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기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패작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작품입니다(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될 때 가장 진주처럼 빛나지요).
"하나님이 전치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말씀은 저에게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어렸지만 중 3학년 때 이 말씀은 저의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찾아 고민하던 그 시절 이 말씀은 저의 모든 삶과 생각 등 모든 것을 녹여서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저의 모든 꿈이 이 용광로에 들어가서 새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이름으로 등기된 땅 한 평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때문에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기에 이 땅에서 가슴을 열어 젖히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가장 소중하다 말씀하시니 우주를 내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신경②
본문: 요 6:27
아버지가 없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고아라 부릅니다. 그런데 실재로는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아버지가 일찍 죽었든지 아니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고아라 부릅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아버지 없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가슴이 아픈 일이지요. 그리고 또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더욱더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났기에 아버지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분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부모로서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육신의 부모님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은 부모를 참으로 귀하게 여기며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이 우리를 낳기는 하였지만 우리를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그 분의 계획안에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이 통로가 되어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 분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불렀지만 마리아가 그 분의 창조자는 아닙니다. 그 분은 본래 계셨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 부모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은 부모님과 우리를 창조하신 부모님으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제 5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부모님뿐만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야합니다.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낳으신 부모를 알고 공경하며,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도 알고 찬양하는 우리가 되야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그래야 우리는 참된 우리의 부모를 알고 기뻐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사 천지(천지의 핵심은 바로 우리 인간이요 바로 당신입니다)를 창조하신 그 분은 하나님입니다. 헌금 봉투를 보면 간혹 '하나님'대신 '하느님'이라고 쓰여진 봉투를 봅니다. '하나님'과 '하느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섬기는 같은 분을 두고 로만카톨릭에서나 지극히 일부 진보주의 교단에서는 '하느님'이라 칭하고 한국의 일반 교회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이라고 칭합니다. 우리가 쓰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한국적 단어로 만든 용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두 용어가 쓰입니다. 하나는 '여호와'요 다른 하나는 '엘로힘'입니다. '여호와'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엘로힘'이란 단오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로힘'을영어성경은 'GOD'로 한국에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엘로힘은 본래는 '지고의 신'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이나 지고의 신은 여호와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에 후에는 고유명사화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구약의 엘로힘을 무엇으로 번역할까 궁리를 하였겠지요. 그러다가 로만캐톨릭에서는 한국의 지고의 신 개념인'하느님'을 선택하였고 개신교는 엘로힘을 하느님으로 하였을 때 오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새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본래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 뜻은 막연히 하늘에 계신 신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또는 '옥황상제'정도의 개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로만캐톨릭에서는 그대로 성경의 엘로힘을 칭하기 위해 사용하였고, 교회에서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로힘'이란 단어를 가장 적합하게 말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이 단어는 기존의 하느님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발음을 내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단어여서 성경의 엘로힘을 칭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라는 단어에 '님'을 붙여서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계신 분을 의미하고, 우리가 경배해야 하는 유일한 분을 의미하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분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막연히 신을 믿는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그들은 술만 먹으면 그 신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신은 막연한 분이 결코 아닙니다. 신을 믿는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바로 그 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이 하나님입니다. 캐톨릭에서 사용하는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그리 썩 적합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말하는 용어로 사용하기에 그 하느님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이 막연히 부르는 '하느님'은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막연히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을 알기 위해서는 그 분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내가 만나고 사랑하며 그 분을 사랑하기에 믿음의 삶을 살므로 우리는 믿음의 반열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막연한 신이 아니라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 결국은 다 같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각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 내용이 다릅니다. 어찌 시계를 보고 누구는 강아지라 하고, 누구는 밥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어떤 사람은 신은 우리가 형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형용이 다 다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릇된 설명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우리가 찾아서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의 용어가 아니라 인간의 용어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어찌 한 분이 누구에게는 이 모습(개)으로 계시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완전히 다른 말(금)로 계시를 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다른 시대적 상황적 배경을 가지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계시 받은 것으로서 그 안에 아주 엄격한 통일성이 있습니다.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결국은 같은 신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맞으면 저것은 틀린 것입니다. 저것이 맞으면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와 우리를 창조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 말이 예수님이 쓰실 때는 우리들이 쓸 때와 다른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쓰실 때는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소의 세끼가 소이고, 말의 세끼가 말이며, 사람의 자식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예수님은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신도 아니면서 신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죄라는 것이지요. 둘째는 이 말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서 첫 위이신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해 쓰이는 말입니다. 둘째 위는 성자 하나님으로 예수님이시고 셋째 위는 성령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단어입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이면서 일체(하나님)이십니다. 세 분이면서 한 분이요, 한 분이면서 세 분인 것이지요.
셋째는 우리에게 가장 밀접한 것으로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말이 쉽지 아주 엄위하고 높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능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러우며 두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감히 부르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의 가장 기본내념은 이 당시와 오늘날이 조금 다른데요. 이 당시에는 법을 상징하였습니다. 또한 두번쨰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입니다. 아버지의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가장 가까운 분입니다 가장 따스한 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실수 때문에 우리를 내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안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 곁에 있지요.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항상 만나며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어거지를 부려보기도 하는 분입니다. 그 분은 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고 우리의 그늘 막이 되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는 멀리 근엄하게 앉아 계시는 하나님과, 가장 따스하게 가장 가까이에 계시며 우리의허물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을 하나님으로만 알아서도 안 됩니다. 또한 아버지로서만 알아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 아버지'로서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서 더욱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가까이에서 의논하고 허물중에도 의지하는 분이 되야 하는 것이지요.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그 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영적 고아라 합니다. 영적 고아는 육적인 고아보다 더 불행합니다. 육적 고아는 자라가면서 힘이 들어 불행한 면이 있지만, 영적 고아는 그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기에 아주 불행합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면 그의 삶 전체가 거부되어집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참된 기쁨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막연히 어떤 신이 아니라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자, 아버지로서 우리안에 계심을 우리가 알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며 참 행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하나님을 만나서 기쁘고 행복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경배함으로 기쁘고, 하나님 아버지의 따스한 품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어 기쁘고 행복한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③
본문: 삼상2:22-26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 건강을 물려받은 사람, 똑똑한 머리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물려 받은 것이 너무 거대하여 보통 사람들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100m달리기로 한다면 그들은 아예 90m 정도 앞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꼴이지요.그러나 상속할 수 없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음의 통로가 될 수는 있지만 믿음의 주체는 될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믿고, 아버지가 믿고, 배우자가 믿고, 온 집안 식구가 다 믿어도 그 믿음이 나의 믿음을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는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유능한 대제사장이요, 사사였습니다.그러나 그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악을 행하여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부모가 믿음이 좋으면 그 믿음이 자녀에게 기계적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이어지려면 부모는 자신의 신앙과는 별개로 자식에게 믿음을 전해주기 위해 수고해야합니다. 노력해야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받아들이는 그 자녀가 스스로 믿음을 받아들여야하지요. 믿음은 결국 내가 믿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내 손으로 해야 하는 가장 급하고도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나의 입술로 나의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스스로 결정할 만한 시기가 되면 가장 먼저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축복되고 흥분되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평생 다른 사람을 통해 배웁니다. 목사님을 통해 듣고, 부모님을 통해 듣고,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 배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믿음들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끝이 나고, 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들은 사랑했지만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빨리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만나시는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넘어 그 분은 이제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여전히 나의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분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도록 간구 하십시오. 나의 일을 가지고 간구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나의 의식주에 관심을 가지고 인도하는 분임을 경험하십시오. 믿음이 내가 고백하는 믿음이 되어 하나님을 알고, 나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 안에서 샘솟는 기쁨을 알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아들일만한 충분한 증거와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불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지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여전히 믿음 밖에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결코 믿음의 내용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유한한 우리는 무한한 능력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본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은 부모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창조된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믿음이 아니고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이제 믿음을 넘어 그 이상을 알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며 성경의 내용이 사실임이 마음에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믿음은 이제 믿음 그 이상이 되어 우리 안에 사랑이 되고 애절함이 되고 따스함이 됩니다.
믿음은 우리가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믿음은 우리가 믿고 싶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이 '내가 믿사오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법적으로는 믿음의 주체가 나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성경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가질 만한 자격이 있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다 하여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인격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인격에서 한 쪽만의 일방통행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인격은 쌍방간의 합의이요, 쌍방간의 받아들임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서 우리의 위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을 갖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 찾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애써서 사랑하여 만드시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믿음을 찾게 되고 그래서 그 찾음을 보고 '내가 믿사오며'라고 붙여주는 것입니다.그 외침이 우리안에서 진실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한량 없는 은혜를 가지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안에 믿음의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 안에서 진짜 '내 가 믿는다'고 말하게 됩니다. 기적같이 믿음의 모든 내용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사실로서 다가오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매 마음대로 내가 믿고 내가 버리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믿음은 신실합니다. 그래서 중도하차가 없습니다. 중도하차 하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은 참믿음이 아니든지 아니면 더 나은 믿음을 위한 단계이든지 일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참으로 믿고 있다면 그 믿음은 영원히 우리 안에 아름답게 빛을 비추며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의 위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이 세상의 모든 말을 합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말입니다. 이 고백을 마음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신 복입니다. 이 고백을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고백을 우리가 할 때 하늘에서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우주창조보다 더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이 큰 기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고백을 우리가 할 때 그 사람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그 단절이 다시 연결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품에 돌아감으로 우리 안의 깊은 곳에서는 왠지 모르는 평안과 행복이 생기게 됩니다. 이 고백을 우리가 하게 될 때 그 사람의 삶이 바뀝니다. 그 전에는 의미가 없고 무가치한 삶이었다면 이후에는 의미가 가득하고 고귀한 인생이 됩니다.
'믿음을 내가 고백함'이 없이 이 땅에서 산 모든 인생을 합한 것보다 믿음을 고백하고 사는 하루의 삶이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믿음을 고백함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행위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도 결국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인데 믿음을 고백하고 하는 행위는 작은 일 하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는 가장 귀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행위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 땅의 믿음이 없는 모든 행위는 최고로 살아보았자 가장 작은 죄입니다. 물론 최악으로 살면 가장 큰 죄이지요. 믿음 없는 삶은 어찌 행하든지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항상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죄를 거부하고 죄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기에 죄에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고백함이 없이 사는 삶만큼 비참하고 억울한 삶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믿음을 고백한 삶이기에 너무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것의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누구도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만드십시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관계를 가지십시오.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를 책망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맺어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유익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십시오. 믿음은 내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정 이 땅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의 옷을 입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이 악합니다. 믿음의 옷을 입어야 모든 것이 선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알고 각자의 입술과 마음으로 그 하나님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이 땅을 아름답고 선하게 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도신경④
본문: 마26:63-64
이 땅의 삶을 한 단어로 줄이면 무엇이라고 줄일 수 있습니까? 철학자들이나 석가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땅은 '고통'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은 한 편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이 땅은 아픔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픔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아픔이 가득합니다. 왜 이 아픔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아픔속에서 그렇게 계속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대책은 없습니까? 이 땅의 모든 인류가 계속 아픔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가끔가다 찾아오는 기쁨이나 행복은 잠시였습니다. 인간의 삶은 항상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이 고통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이 고통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여전히 이 고통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다린 메시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오늘날 우리가 흔히 '원시 복음'이라고 말하는 이 말씀에 따라 인류는 여자의 후손(한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그의 첫 자녀를 얻고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에는 '얻었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인에 의해 에덴동산이 회복될 것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지요. 하나님의 계획은 더 길었습니다. 온 인류의 역사는 계속 이 한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기다리다 지쳐 이 기다림이 약화되었고, 사람들 중에는 이 기다림을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으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한 사람을 계속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계속 이 한 사람을 기다린 역사입니다. 이 한 사람을 그들은 '메시야'라고 불렀습니다. 간혹 이 메시야가 혼동되어 어떤 절박한상황에서 구원해주는 사람의 경우에도 사용되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이 메시야는 아담과 하와가 기다렸던 '그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본래의 뜻입니다. 이 메시야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한 사람'입니다. 이 메시야는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고 사탄의 권세에 의해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이 메시야 사상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때로는 이 기다림이 희미할 때도 있지만 이 메시야를 기다림은 계속되었습니다. 세례요한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는 누구입니까? 하늘에서 올 분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고 오실 분으로서 신의 권세를 가지고 오는 분입니다. 메시야가 여자의 후손으로 온다고 하였기에 사람들은 사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신의 권세를 가진분으로서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을 한 신이지요. '메시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하나님의 외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는 그 당시 가장 흔한이름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자를 기다리며 '예수'라는 이름을 선호하였습니다.그래서 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이 많았었지요. 그러나 드디어 그 예수라는 이름에 가장 합당하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신세대인 그에게 새로운 어떤 다른 이름이 아니라 가장 흔한 이름인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름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 분이 참으로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람의 이름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며 구원자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철수(가장 흔한 이름으로서의 사람)'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인 예수가 누구입니까?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이 세상의 모든 험한 꼴을 다 보며 살았고 사람들의 눈에 여전히 한 나약한 인간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이 땅에서 가지게 된 이름을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그 분이 예수로서 이 땅에 사셨기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분은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기에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그 분은 예수로서 이 땅에 사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서 사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예수라는 사람이 되심은 임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히 인간이 되심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의 외아들로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분이 2000년 전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의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성자 하나님으로서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셨고 그래서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제 항상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심은 너무 큰 은혜입니다. 그것도 임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서 입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에베소서에서는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측량할 수 없자 '없다'고 주장하는 우를 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은 참으로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저는 이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묵상하다 하나님이 내 안에 채워주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이 사랑이 가슴을 사무치며 다가옵니다. 이 깊은 사랑이 우리에게도 사무치며 다가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외아들이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스도로 오심으로 이 땅의 사람들은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은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는 주'로 고백하는 그 사람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례를 주셨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ㅇㅇ에게 내가 성부와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야 구원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심은 그 분이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의 철저한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요 사탄의 종이었기에 우리는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이지요. 예수님의 종이 되어 우리는 멸망의 시민에서 구원을 받아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천국백성이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좋은 종이지요.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의 종이 되고, 재물의 종이 되고, 명에의 종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섬겨야합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참 많은 것들이 우리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를 이리 몰고 저리 몰고 다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행할 때 그것을 행하는 처음 이유이자 마지막 이유는 오직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 이어야합니다.'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 충성하기에 충분한 분입니다. 주인이 종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어찌 종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으려는지요? 하나님의 외아들인 그 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고 또한 이 땅의 삶을 고난과 죽음으로 마치셨습니다.그래서 그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이 때로는 세상과 맞지 않고, 나의 기분과 맞지 않아서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도 그 분을 우리의 주로 고백해야합니다. 그 때도 그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 그 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뜻을 따르기가 참 힘이 들 때, 마지막으로 그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심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주인은 철저히 종을 위한 종입니다. 종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고, 종을 위해 모든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래도 그 분의 주인 되심을 벗어나서 제멋대로 하고 싶은지요?
이 땅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외아들이'구원하는 주'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크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여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그 사랑을 우리는 가슴 깊이깊이 사무치며 알기를 소망합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는 구원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지금 믿는 우리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생명의 길이요 풍성한 길로 가기를 원하시며 우리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삶에 주인이 되시도록 훈련되어져야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주가 될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픔과 고통의 삶이 아니라 행복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도록 훈련하고 복종하는 삶은 가장 큰 성취의 삶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주가 되셔서 우리의 삶이 더욱더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사도신경⑤
본문: 마1:18-21
모든 인류는 죄 가운데서 태어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이후 육체적, 정신적, 영적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죄가 없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태어나서 죄가 많은 세상속에서 또 죄를 범하며 살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땅에 살면 살수록 우리의 죄는 더 쌓여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면 살수록 죄에 더욱 단단히 죄에 메여지는 것입니다. 움직이면 움질일수록 더 단단히 조여지는 수갑과 같습니다.
조용히 다가온 너무 큰 사랑(성령으로 잉태하사)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들의 죄문제를 해결하러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여자의 몸에 들어오셨습니다.성령으로 잉태된 이유는 죄가 없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자녀는 원죄가 있습니다. 죄가 없어야 대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외아들은 이 땅에 사람으로서 오기는 하되 사람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함은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어 인간이 되신 역사적 사건입니다. 얼마나 숭결하고 고귀한 사랑입니까? 그 분이 인간이 되시되 장성한 성인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겸손히 한 소녀의 배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아니라 평범한 한 여인의 배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참 조용하고도 잔잔하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분이 그 소녀의 배속에 들어가실 때 세상은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천상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숨을 죽였을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 약하고 악하기까지 한 한 사람의 배속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렇게 이 땅에 다가왔습니다.
처녀가 성령으로 아기를 임신하고 낳았다는 말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것을 과학에서는 무엇이라 말할까요? 19C 과학까지는 이것을 비과학적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20C 과학부터는 이것을 결코 비과학적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과학적이라 말할때는 과학으로 거짓이라고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것은 과학의 영역밖입니다. 오늘날 과학은성령이라는 조건을 주고 실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과학적이지도 비과학적이지도 않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절대주의자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불가능하기에 믿을 수 없다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증명할 수 없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학적 사실이 일반 학문으로 넘어오기까지는 참 많은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말이 비과학적이라는 허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과학적이라고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런 허상을 오랫동안 잡고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사실은 합리적입니까? 비합리적입니까? 합리적입니다. 합리적이란 조건과 결과가 같을 때 말하는 것입니다. 앞뒤가 맞아야 합리적인 것입니다. 공부도 안 하면서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게임만 하면서 프로게임머가 되기 위해서 그렇다고 말하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게임머는 컴퓨터 언어를 배워야 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게임하고는 많이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합리적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찌 남자와 여자가 만나지 않고 아기를 낳을 수 있느냐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아야합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조건을 잘 살펴야합니다. 성경은 그냥 아가씨가 임신을 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조건이 있으면 아가씨가 임신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앞에 두고도 아니다아니다 하면 그 사람에게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만 감추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인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인간의 몸 안에 잉태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엄청난 사건일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왜 일어났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구원합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사하시는 방법입니다. 너무 놀라운 사랑아닙니까?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나님의 외아들이 한 소녀의 몸에 들어오셔서 나셨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은 것은 너무 특이해서(인류의 사건에서 유일) 그 당사자들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래서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법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하기도 전에 임신을 하면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의 경우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이 일을 크게 알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혼자 손해보는 선에서 끝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대중앞에서 돌로 쳐죽이기보다는 정혼관계를 끊는 선에서 마무리하고자 하였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임신을 하는 것은 그토록 그 당사자에게도 너무나 큰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함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해 나셨다는 사실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엉뚱한 것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마리아'에 과도하게 집중하며 사람들은 아주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해 나셨다는 것이 마리아를 특별한 존재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마리아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테레사 수녀라는 분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성모 마리아를 제4신으로 모셔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분의 신앙은 기독교적으로는 다시 재고해 보아야합니다. 캐톨릭안에서 성모 마리아를 제4신으로 추대해야한다는 의견이 아주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근본을 흔드는 것으로 그렇게 관철된다면 천주교는 구원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 이제 극단은 아니게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이 나시기 위해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그 분이 우주의 일부분이 되셨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이 역사속의 한 페이지로 나셨습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때 그 분은 지극히 평범한 한 소녀를 통해, 지극히 평범한 한 가정에 오셨지만 그 분의 오심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심으로 죽음과 생명이 나뉘어집니다.그 분이 오심으로 영생과 영벌이 나뉘어집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날이 언제일지 연도와 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주변의 역사자료를 통해 추측하며 학자마다 4-5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분이 오심을 기점으로 삼은 연도를 기준으로 항상 말을 하고 있습니다. 2004년 3월28일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지 2004년 3월28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그 분이 이 땅에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오신 것을 믿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모든 사람들은 이 연도를 말합니다. 그들도 모르게 그들의 삶의 중심이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하나님의 외아들을 우리가 믿어야합니다. 우리의 과학이나 우리의 지식으로 증명 불가능하다고 거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증명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것은 증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것이 증명할 수가 없다하여 비합리적인 것은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이성으로 따져볼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배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는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을 만나야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하사' 이 땅에 오신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셨겠는지요? 우리가 그 큰 사랑을 증명은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 분을 만날 때 우리 자신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증명을 요구하기보다는 우리가 증인이 되야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증인이 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분을 만남으로 이 땅의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함을 얻어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가볍고 힘차게 이 땅에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놀라운 사랑이 실현되게 합시다.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그 분의 사랑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우리가 믿어 구원에 이릅시다. 우리가 구원을 전합시다.
<고난 받으사>
사도신경⑥
본문: 이사야 53:1-12
예수라는 분이 1970년 전쯤 고난의 삶을 사셨고, 고난가운데 십자가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함께 알아 보려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고난받으심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은 본디오 빌라도가 고난을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을 때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곧 이 말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구절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일부의 사람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외아들을 인간이 모욕하고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에 부담감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당하신 것은 실재로는 아니고 단지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주장이 어설프자 예수님의 고난의 일들을 단지 이야기로 꾸미려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백설공주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실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시절 역사의 한 조각안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부담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분이 우리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분은 그 모든 고난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알고 있고 깨닫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 고난을 너무 이야기로만 알고 있습니다. 내 손가락에는 가시 하나만 박혀도 아파 울면서 예수님의 고난에는 무덤덤합니다. 기독교인된 우리들은 예수님이 고난받으심을 다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박히심을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우리의 가슴으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 고난을 고난으로가 아니라 단지 고난의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위에서 겪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시가 아프다면 예수님도 동일하게 가시에 아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못으로 살과 뼈를 뚫고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실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겉으로의 형식이나, 단지 말하기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가장 큰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피가 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의고난은 창주주가 피조물에 의해 제약되어지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양에 의해 뜨거우셔야했으며, 예수님은 배고프셔야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경멸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멸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고난을 받으셨나?
예수님은 왜 그 모든 고난을 받으셔야했을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그 맘대로 하셔도 되는데 왜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그 아픔의길을 가셨을까요? 그 고난받으심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고난은 진실을 말해줍니다. 부자일 때 칭찬하는 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재산을 다 잃어 버렸는데도 사람들이 칭찬할 때 진짜 칭찬입니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고난이 왔을 때 떨어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요.좋다 말하면서도 고난이 왔을 때 싫다하면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진실인 것을 우리는 그 분의 고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분은 그 모든 고난을 몸소 당하실 정도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하여 그 모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난을 몸소 자청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구원이 논리싸움이나 말장난이 아닌 것을 말해줍니다. 구원은 '십원에서 일원이 부족한 것'이라는 말장난식으로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처절한 사랑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이 하룻밤 풋사랑이나, 지나가는 사랑이 아니라 아주 진실한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며 우리의 구원을 진실하게 원하시고 계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끔찍한 아주 흉악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로는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도구였습니다. 누가 작두대를 보고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사형집행장을 보고 기분이 상쾌하겠습니까? 사형집행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곳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십자가가 갖는 이미지는 대단히 부정적이고 끔찍한 것이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십자가를 예쁜 것만 찾지만 실재로는 십자가는 가장 투박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된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여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하지만 실재로는 이 십자가 목걸이를 할 때는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목에 걸때는 나도 십자가의 그 험한 길을 가겠다는 굳은 의지이어야 합니다. 나도 순교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나도 내 십자가를 지고 순교자의 길을 가겠다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성경에서는 저주의 대상입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가장 큰 저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저주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하실 때 그 분이 왜 박히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모든 저주와 모든 고통을 다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기에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사형집행방식 중에 가장 최악의 방법이 십자가 처형방법입니다. 십자가 처형방법은 너무 지독해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그렇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처형방법은 그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그 방법을 자청하신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는 그 분이 우리의 모든 큰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가장 큰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지요.
죽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으셨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죽으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영적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육적으로 죽으심은 실재로는 영적 죽음의 나타냄입니다. 성경은 어떤 것을 영적죽음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과 단절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길 때 죽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장 크게 고난받으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실 때 그 분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겪으셔서 그렇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분은 죄인으로서 죽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성부 하나님과 한 번도 분리를 경험해조지 않으신 그 분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도 여전히 신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리될 수 있는지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제 마음에 왔을 때 저는 너무 슬펐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해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너무 슬펐습니다. 예수님은 조롱을 당하시면서도, 채찍질을 당하시면서도 울지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이 보기에 이상할 정도로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기 위해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당하시려는 모습으로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시다가 자신의 피투성이 됨 몸과 힘없어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흐느껴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올라"(눅23:2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프고 지쳐 십자가조차도 드실 수 없으면서도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슬퍼해하셨습니다. 못이 살과 뼈를 뚫고 들어와도, 온 몸의 피와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죽어가시면서도, 못에 의지한 몸이 찢어지고 뼈가 애려와도 그 분은 소리지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라는 말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언제 소리지르셨습니까?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분은 자신이 지고 가는 죄 때문에 하나님이 고개 돌리실 때 그 고개돌림이 너무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예상하였던 일이지만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나자 그 현실 앞에 너무 괴로워 소리지르고 있으신 것입니다.이 고난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지요? 어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그 이름은 제 안에서 '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분의 사랑이 가슴에 애이며 다가옵니다. 그 분이 이 땅에서 가던 한걸음 한걸음의 고난은 다 사랑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떨어져 나가는 그 분의 살점들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울부짖음이자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너희를 사랑하노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처절한 사랑을 우리가 어찌 외면하시려는지요? 그 사랑을 가슴으로 알고 고백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살리시며>
사도신경⑦
본문: 눅 24:30-35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그랬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 속에 남겨진 그에 대한 생각조차도 잊혀져 갑니다. 그의 시체는 썩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보이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인생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썩을 인생처럼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고,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화제목이나 이야기들 속에서 부활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외에는 어떤 것도 결코 진정한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단순히 다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어도 다시 죽을 몸이라면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이란 다시 살되 완전히 다른 다시 삶입니다.
부활하면 이제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부활을 하면 차원이 다른 몸과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한 몸의 형태도 지금 나의 모습을 반영하겠지만 완전히 다른 몸으로서의 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문이 닫힌 방을 스르르 들어오셨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우리는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가장 영광스러운 삶의 시작입니다.
부활은 세계의 전역사속에서 모든 인류의 진정한 꿈이었습니다. 그들이 부활이라는 단어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의 내재된 생각속에는 부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은 죽지 않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도 죽지 않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죽지 않는 삶이 결코 그들생각처럼 좋은 것만은 아닌데도 그들이 바랄 수 있는 한계였습니다. 그 바람조차도 그들은 바람으로만 끝날 뿐입니다. 그 누구도 그 소망을 이룬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꿈만 꿀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 바람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부활은 모든 인류의 진정한 꿈을 실현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부활이 이해가 됩니까? 부활은 완전히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했을 때의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지를 우리는 오늘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을 우리가 소망할 수 있습니다. 소망해야합니다. 부활은 우리가 소망할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실수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불행입니다. 불행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부활을 강하게 소망하던 시기가 있고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부활을 가장 소망하던 시기는 주로 환란과 핍박이 있던 시절입니다. 부활이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시기는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지고 편안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가 진정 행복한 때입니까? 우리는 지금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언제 부활을 소망하였습니까? 일제 시대의 암흑기와 6.25동란 때의 환난과 보릿고개가 있던 그 시절 우리는 부활을 더 소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부활을 소망하던 그 때가 더 행복한 때입니다. 이의 있습니까? 분명합니다. 그 때가 행복한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환난을 만나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을 더 소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누가 더 부활을 소망할까요? 부활신앙에 투자를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시험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험이 기다려집니다. 그러나 시험공부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시험이 기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부활신앙에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알량한 이 땅의 평안과 행복에 마음을 다 빼앗겨 진짜 평안과 행복을 소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수많은 문제를 낳고있습니다. 부활을 소망하지 않고 사는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과 우리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근 500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아무에게나 그 분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이미 그 분을 알고 있고, 전부터 부활에 대해 들었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알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부활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더 만나 제자들처럼 부활신앙으로 완전히 바뀐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더욱더 찾으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내 마음속에서 진실하게 믿고 알도록 찾으십시오. 찾는자에게 그 영광스러운 부활신앙이 다가올 것입니다.
절망을 느껴보신적이 있습니까?부활신앙은 이 땅에 절망을 몰아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이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치고 어떤 환경에 처해지더라도 우리의 마지막은 부활인 것을 알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절망이란 더 이상 우리들의 단어에서 사라집니다.
인간은 언제 절망합니까? 소망이 없을 때 절망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인간은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갖게 되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 죽음에 얽매여서 끌려 다니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음에 얽매여 있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겁해집니다. 그러나 부활을 알면 용감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간하여 그것을 선택하며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의 삶
부활은 차원이 다른 삶을 가르쳐줍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부활은 차원이 다른 삶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차원이 다른 그 어떤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부활신앙은 차원이 다른 신앙을 가져왔습니다. 부활을 알기 전의 제자들과 부활을 알고 난 후의 제자들을 비교해보십시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활전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갔으나 부활을 안 후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도망자가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많이 도망자가 조금 도망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차원이 바뀐 것입니다. 부활전의 예수님의 동생과 부활후의 예수님의 동생들을 보십시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활전에 그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였으나 부활을 안 후그들은 예수님의 철저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보며낙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그 마음에 뜨거움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또 다시 잃어버릴 그 무엇이 아니라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그 무엇을 그 안에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서 조금 업그레이드 된 것이 아닙니다. 업그레이드 될 수 없는 그 어떤 상태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여전히 밥을 먹어야 살고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그 속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그 전에 그들을 조종하던 수많은 우상들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넘쳐 나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신이 그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알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알게 되면 그 전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완전히 다른 차원의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기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부활신앙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의 이 땅의 삶에서도 그 다른 차원을 소유합니다. 그 완전히 다른 삶에 우리 모두가 포함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은 육체적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부활하여 영원한 존재로 살 것입니다. 오늘만 살다가 죽을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신앙을 가졌을 때, 암울하고 나약하던 그들의 삶은 환하고 강한 삶으로 뻥 뚫렸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존재인데 이 땅의 육체적 삶에 연연하여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삶입니다. 육체적 삶에 연연함으로 그렇게 나약하고 문제 많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며 사십시오. 부활신앙에 우리의 삶을 투자합시시오. 그래서 진정으로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십시오.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으로서 오늘을 사십시오. 부활할 존재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부활할 존재이기에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를 생각하며 사십시오. 부활신앙을 믿는 삶은 완전히 다른 삶! 차원이 다른 삶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사도신경⑧
본문: 벧전3:22
사도신경 강해를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40일동안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보이셨다가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그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아 이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계심을 의미합니다.그 분은 이 땅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참 감사하게도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외줄타기와 같습니다. 어느 한곳에서 조금만 삐긋거리면 모든 것이파괴되어질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동안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왔는지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수없이 산재해있는 핵폭탄은 한 순간에 온 지구를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강해지고자 악해집니다. 그래서 주로 악한 사람이 강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벌써 악한 사람에 의해 강포와 억압 가운데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리고 그 우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분의 뜻이 있어서 이 지구는 아직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고, 그 분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이 땅은 아직 선이 발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참새 한 마리가 잡히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일도 결코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유일한 통치자는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치되고 있고 질서가 잡혀있습니다.
우리는 이 통치를 확실히 기억해야합니다.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는 원리를 우리 마음에 철저히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원리를 잊어버린 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이 기도가 부분적으로는 좋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렇게 기도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를 다스리소서" "하나님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좋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기보다는 나를 다스리며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가다가 지쳤을 때 도와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의 길을 가야합니다.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이 가라하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내 길이 철저히 주님이 다스리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기뻐하시는 길을 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세상의 통치 방식
세상의 통치 방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교통사고를 내 사람이 죽었는데 알고보니 부모님의 원수였습니다.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필연을 가장한 우연입니까?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입니까? 살다보면 필연처럼 느껴지는 일을 당할 수 있고, 우연처럼 보이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우연입니까? 아니면 필연입니까? 아니면 우연과 필연이 적당히 섞여 있습니까?
물질세계를 보면 그 통치방식이 필연입니다. 그 안에는 일정한 법이 있고, 규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무한한 개연성이 있습니다. 천방지축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가능성을 만듭니다. 이 천방지축을 조정하기 위해 통제를 하면 인간의 자유인격이 침해가 됩니다. 그러나 천방지축인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방임이 되어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어집니다.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당합니다. 실수투성이의 인간들의 삶은 엄청난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실수가 다른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몰고 올 수 있습니다. 언제 교통사고로 죽을지 모르는 시대이기도 하지요.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는 교통사고, 만남, 모든 사건들이 단지 우연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인생이 너무나 가볍고 불안합니다. 또 그런 것들이 필연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자리가 없어져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복잡한 로봇이 됩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은 더욱더 가벼워지고 좌절감까지 듭니다. 인간으로서 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절충점으로 인생이우연과 필연이 적절하게 섞인 것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설상가상입니다. 우연도 괴롭고, 필연도 괴로운 것인데 그것이 함께 있으니 괴로움에 괴로움이 더한 것입니다. 문제에 문제가 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 통치는 필연이라는 법칙이나, 우연이라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그 분이 이 땅을 친히 돌보시는 섭리라는 방식입니다. 필연도 아니요, 우연도 아닌 섭리입니다. 자유인격이 보장되면서도 아무렇게나 진행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그 분의 지혜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면서도 자유를 보장하시고, 필연이 아닌 방식으로 이 땅을 다스리십니다. 그 다스림은 우리와 상관없는 다스림이 아니요,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에 반응하시는 통치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통치입니다.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기도를 존중하고 응답하시는 통치입니다. 이 통치는 우연 아니면 필연이라는 선택외에 다른 것이 없는 우리의 좁은 생각을 넘어 존재합니다. 이 통치가 있어 인간은 행복합니다. 이 통치가 있어 인간은 인간다워집니다. 이 통치가 있어 인간은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그 분의 통치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이기에 전능하신 통치입니다. 이 땅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 일이 그 분의 선하신 뜻을 벗어날 수는 있지만 그 분의 전능하신 통치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나쁜 마음으로 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살인이 다른 선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가 된다면 그 살인을 막으실 것입니다. 자유가 보장되기에 이 땅에 악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기에 그 악이 선을 제압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일시적으로 핍박할 수는 있으나 이길 수는 없습니다. 넘어뜨릴 수는 있으나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행하면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리는 세상의 악한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입니다. 세상을 한탄하며 사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에 그 세상에서 우리가 선하게 살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연히 세상을 원망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행동이지요.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 된 우리가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갈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을 통치하시는 그 분의 통치를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속에서 '특별관리'로 분류됩니다.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마음에 가득히 품고 계신 통치자가 보입니까? 나의 삶속에서 나를 권고하시며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권고를 듣고 있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통치를 받을 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통치 속에서 더욱 나아가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그 통치속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하심으로 아픔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 '아픔'을 누가 '기쁨'으로 바꾸어야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원을 믿고 세상속으로 들어가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해야합니다. 그 속에 난무한 악을 이기고, 그 속에 고통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분이 통치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종교라는 영역으로 좁아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교회는 세상을 품어야합니다. 교회가 교육사업, 정치, 장사를 해서 세상을 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된(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들이 세상속에서 세상을 품고 세상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삶으로 세상을 품어야합니다. 진실을 가지고 세상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 분이 진실하신 분이기에 진실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악이 드세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에 대한 열정으로 그 속에 들어가면 세상은 선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십시오.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속한 그곳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사십시오.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⑨
본문: 롬2:16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중에 하나는 '심판사상'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는 그의 실천이성비판이라는 책에서 "혹 심판이 없어도 심판이 있다고 생각해야 이 땅에 최소한의 질서가 유지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야 이 천벌을 받을 사람아" "다 인과응보야"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심판 받는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심판사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겨진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할 때 양심이 가책을 받으며 두려워합니다. 이 심판사상이 모든 사람에게 자리를 잡고 있기에 보편적 사상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보편적 사상이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인 된 우리는 이 심판을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저리로서.. 심판하러..오시리라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구절에서 '저리로서'는 어떤 뜻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던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실 때는 그 백성을 대속하심으로 죄사함을 통해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오심(재림)은 심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선한 자는 영생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요, 악한 자는 영벌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영생이나 영벌이나 영원히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영생은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영원한 삶이요, 영벌은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한 영원한 삶입니다. 단순히 말해서 심판 때에 천국행 티켓을 잡는 사람이 있을 것이요, 지옥행 열차를 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식상합니까? 어린이들에게나 해야 할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하는 이 이야기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어야 하는 사실입니다. 가장 똑똑한 사람도, 가장 우둔한 사람도 동일하게 들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땅을 사는 모든 사람이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심판 때에 가서야 이것이 식상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겠지요. 기독교인들인 우리도 이것을 명심하고 명심해야합니다. 그런데 가슴아프게도 이것을 명심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판을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 사는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 마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다음의 옛이야기에 가르침이 있습니다. 옛날에 일꾼들이 많은 큰 대갓집이 있었습니다.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일꾼들은 잔뜩 기대를 하였겠지요. 그런데 명절 하루 전날이 되었는데도 주인은 명절비를 주지 않았고 집에 갔다 오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은 입이 한자나 나왔겠지요. 그런데 주인이 와서는 지푸라기를 갔다 주며 새끼줄을 엮으라고 일을 시켰습니다. 일꾼들은 더욱더 불평을 하겠지요. 그래서 아주 건성으로 일을 하는 일꾼들도 있었을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새끼줄 만든 일꾼도 있었겠지요. 저녁이 되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손에 엽전을 잔뜩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만든 새끼줄에 동전을 끼울 수 있는 만큼 끼워서 집에 갔다 오라고 하였습니다. 엽전 한 냥도 끼우지 못한 하인은 원통해도 자업자득이니 불만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열심히 일한 하인은 많은 돈을 가지고 갔겠지요.
만약 일꾼들이 처음부터 주인의 의도를 알았다면 어떤 누가 열심히 새끼줄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다 돈인데. 우리는 영생의 심판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여전히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끼줄을 만들고 있지 않다면 심판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그렇게 형편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그렇게 열심 내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안다면 그렇게 살지 않겠지요. 그래서 심판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나 봅니다. 사실 심판은 무서운 이미지 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이산가족 상봉의 날처럼 따스한 날의 이미지가 더 강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는 하지만 재림이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과는 방식이 다릅니다. 재림!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그 분은 재림이후 우리와 더욱더 특별하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함께 하심을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함께함)를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얼굴을 대면하며 충만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과 그 분의 백성 된 우리가 행복하게 영원히 아름다운 교제를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누구를 심판하십니까? '산 자와 죽은 자'입니다. 산자는 누구이며, 죽은 자는 또 누구입니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산자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심판하러 오실 그 때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전에 죽은 모든 사람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면 죽은 사람이라 산 사람이나 모두가 동일하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 있는 사람이나 산 자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한가지 더 영적인 의미를 추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5:14) 여기에서 죽은 자는 누구입니까?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곧 하나님을 향하여 죽은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듣지 못하고, 그 인도하심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에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산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을 알지 못한채, 세상의 일들에만 반응하며 찌들어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산 자로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을 말하는것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라는 것에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편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 자식이 100점을 받아오면 기뻐합니다. 이율배반입니다. 자기 자식이 100점을 받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자기 자식이 100점을 받도록 뇌물을 쓰거나, 다른 자녀들이 공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 기뻐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다른 자식이 백 번 100점을 받은 것보다, 내 자식이 한 번 100점 받는 것이 더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를 기뻐하고, 구원하며, 그 자녀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습니까?
내가 산자에 속합니까? 죽은자에 속합니까? 간단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나의 삶이 바뀌고 있는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어야 합니다. 민감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하나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하나님 때문에 외롭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건드릴 때 잽싸게 반응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세상에는 죽은 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찔러도 죽은 자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세상이 나를 괴롭혀도 반응하지 않고, 세상이 슬픔을 주어도 슬퍼하지 않는 것이지요. 죽었으니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도덕주의,율법주의,이기주의,세속주의 등이 동일하게 무가치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악가가 멋있게 노래하는 것보다 곡조는 틀려도 하나님의 자녀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더 좋을 것입니다.
엡5:14절의 말씀은 살아있지만 잠자는 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와 잠자는 자는 무엇이 같습니까? 반응하지 않는 것이지요. 왠만한 것에는 죽은 자와 잠자는 자가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큰 충격에는 다릅니다. 만약 물 한바가지를 부어버린다면 잠자는 사람도 분명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꼭 물을 부어야 일어나겠습니까? 물 붓기 전에 일어나야지요. 너무 많은 크리스챤들이 잠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왠만한 충격요법이 아니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지도 못한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민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주님이 오십니다. 선악간에 심판하러 오십니다. 심판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현실의 삶은 심판받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더 깨어있으십시오. 주님께 더 민감하게 살아있어야합니다. 조금더 인내하십시오. 조금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심판의 날에 쥐구멍을 찾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신부가 신랑을 맛이하듯 기뻐하는 때가 됩시다. 심판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것입니다. 심판의 그 날에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심판을 가슴에 새기고 날마다 되새기며 삽시다.
<성령을 믿사오며>
사도신경⑩
본문/ 갈 5:16-6:10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이 말은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이 말을 오해하여 사용하면서 한국 기독교가 참 많이 비뚤어졌습니다. 신령하지 않은 것을 신령하게 여기고, 따라서 신령하지 않은 것을 신령한 것으로 추구하였습니다. 결국 신령한 모습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아주 괴상한 모습의 것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
영적인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우리를 영적이게 만드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성령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 분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삼위이신 성령 하나님입니다.이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라 칭하기도 하고, 보혜사라(상담자) 칭하기도 합니다. 이 성령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인은 믿음을 가지는 순간 모든 사람이 성령 하나님을 그 안에 모시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사람이 알든 모르든 그 안에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우리가 느끼고 있습니까?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해주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 성령 하나님을 느끼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느끼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 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적이라는 것
먼저 '신령한 사람'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것만을 성령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래서 기적을 통해서만 성령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제한적인 성령만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구름위의 사람의 아니라 이 땅을 밟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일상적인 우리의 삶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야 영적인 사람이요 신령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나타나는 곳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기보다는 특별한 어떤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분임을 나타내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기적은 출애굽하면서 필요성에 의해 모세 때에 많이 일어나고(그러나 그것도 기적보다는 일상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 기적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기적을 사용하던 제자들은 죽을 때 기적으로 죽음을 모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마땅히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기적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실질적으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기적 같아 보이는 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손에서 불을 뿜는다고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술입니다. 눈 속임수이지요. 라이터로 불을 켜면 되지 왜 손에서 불이 나와 켭니까? 누군가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강을 모세처럼 가르는 것을 손쉽게 한다면 그것이 아주 신령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과 상관이 없는 일은 결코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과 상관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어도 그 어떤 큰 기적만큼이나 신령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어떤 이상한 기운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적같은 것을 통해서만 느끼려 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만 성령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평생 몇 번 먹지도 않는 호텔 뷔페같은 것만 식사라고 생각하여 평상시 먹어야 하는 식사를 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뷔페는 안 먹어도 살지만 평상시 식사는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기적만 영적인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굶어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기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상시 바라고 발견해야 하는 인도하심은 바로 그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열매
성령 하나님이 우리안에 계시면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됩니까? 기적만이 아닙니다. 기적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은, 오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는 신의 성품이 아닙니다. 인간의 성품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22-23절) 서로의 짐을 지는 것, 선을 행하는 것, 자신의 맡겨진 역할을 잘 하는 것,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사주로서, 종업원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일들이 지극히 인간들만의 일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도덕으로서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같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이 현세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영원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기독교인된 우리는 체험적으로 성령의 열매라 일컫는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인간만의 것인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철저히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충만히 거할 때만이 우리는 참된 기쁨을 알고 참된 선함이 있으며 참된 절제가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안에 심겨진 이 성령의 열매들은 철저히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단히 훈련되어질 때만이 가능한 열매들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열매가 가장 인간적인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성령의 열매 안에는 결코 어떤 기적을 기대하라거나 기적을 행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인도하심을 받아 살면서 이루어 가야하는 가장 인간적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성령을 믿는 사람의 가장 핵심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금요일에 서울 중앙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이명섭 집사님의 어머님 되시는 장연숙 권사님의 병문안을 갔었습니다. 예비군 훈련이 오후1시에 잡혀 있어서 시간이 촉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계산해보니 될 것 같아 갔습니다. 가고 오는 길에 교통이 왜 그리 교통체증이 없는 곳으로 잘 가는지. 잘 모르는 길도 왜 그렇게 정확히 가게 되는지. 저는 운전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느끼며 감사기도를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들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고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따스하고도 깊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 귀가 열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든, 느끼지 못하고 있든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모든 일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을 더욱더 느끼고 사는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그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며 매일매일 감사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때문에 평안하며,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루가 시작되어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으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이 가장 신령한 사람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시며 우리안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탄식하게 하는 사람''성령 하나님을 감옥에 가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모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갇혀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게신 성령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야합니다.
성령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곧 신령한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간단히 말하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인기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기 있는 사람인지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가장 인기없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사형을 당하니 가장 인기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기독교인이 왜 세상에서 인기있는 사람입니까? 성령의 열매를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싸움이 있는 곳에 화평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들어가면 그 싸움이 사라지고 화평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인기가 없겠습니까? 그 사람이 들어가면 기쁨이 있고, 그 사람은 사람들을 향하여 온유하며 , 모든 일에 인내합니다. 그런데 인기가 없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이루어 가는 사람은 가장 영적인 사람으로 세상에서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이성과 역사와 자연과 사람들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신령한 사람. 매일매일의 일상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신령한 사람. 하나님과의 교제로 행복한 신령한 사람. 그런 사람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적인 사람입니다. 바로 그렇게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함께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거룩한 공희>
사도신경⑪ 본문/ 갈 6:1-10
오늘날 교회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교회는 더 이상 좋은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비쳐지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큰 슬픔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미워도, 좋아도 영원한 우리의 연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인 교회와의 관계를 사랑하고, 눈앞에 있어도 그리운 관계로 회복해야합니다.
거룩한 공회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는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먼저 공회란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조금더 자세히 말하면 보편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부분의 영어는 "Holy Catholic Church"입니다. '캐톨릭'이라는 단어에대해 로만캐톨릭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나 실제로는 '보편'이라는 의미로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보편교회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종파가 개신교이든 로만캐톨릭이든 동방정교회이든 성공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보편교회에 속합니다. 곧 공회에 속합니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가 거룩함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리고 거룩해야합니다.
동창회나 어떤 협회나 회사들도 중요한 단체입니다. 그들 안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 단체는 빼고 교회만 거룩하다고 말합니까?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거룩'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거룩이란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보수''쾌쾌묵은 것''괴상한 것'조용한 것'등의 이미지로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미지는 결코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을 다른 말로 바꿀 때 가장 적합한 단어는 '구별'입니다.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동창회나 단체들도 저마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데 왜 교회만 거룩이란 단어를 씁니까? 그것은 교회가 구원을 위하여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람들안에 이루시기를 원하는 가장 근본적인 구원을 위하여 구별되었기에 교회는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단체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는 있고, 그 안의 회원들 중 일부가 구원을 이루어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서의 구원과는 다릅니다. 그 단체들의 목적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원을 위하여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시작이요, 진행이요, 완성입니다. 교회는 바로 구원을 위하여 구별된 단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그 구원을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는 거룩한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하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교회가 거룩하기에 교회를사랑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루어 가는 그 구원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그 몸을 바쳐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십시오. 교회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교회를 향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이 살아나야합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우리의 가슴이 벅차 오르며 사랑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은 어쩌면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식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본질을 잃어 버리고, 헛 껍데기 교회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실망을 크게 하였고 이제 더 이상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안에 있는 개교회주의와 물질만능중의 그리고 허세들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이미지를 반항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저의 가슴을 슬프게 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인 교회가 (비록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때가 많음을 보고 가슴이 아픕니다. 그 지탄의 소리에 어느덧 우리도 물들어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병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고, 슬금슬금 교회 사랑에서 발을 빼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신의 몸처럼, 예수님의 몸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행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 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때로는 1000억을 번 것보다 교회에서의 작은 섬김이 더 귀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일들이 귀한 것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배경이 되지 못하고, 단지 그 일만으로 있으면 그것은 교회에서의 지극히 작은 섬김보다 못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작은 하나하나의 일들(예배, 봉사,교사..)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데에 필수적인 아름다운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들을 사랑해야합니다. 교회된 성도님들을 사랑하시고, 교회의 일들을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의 열매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후에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합니다. 이 땅에서 거룩한 일(구원)을 이루 어 가는 유일한 곳인 교회를 사랑해야합니다. 교회가 아니고는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회복되야 합니다.
성도의 교통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교회는 또한 교육, 선교,구제,예배등 많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는 그 많은 중요한 것들을 뒤로하고 '성도의 교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많은 것 중에 '성도의 교통'만을 말하는 것은 곧 그 만큼 성도의 교통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교통'이 왜 그리 중요한 문제일까요?
먼저 '성도의 교통'의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교통은 성도간의 오고가는 그 무엇입니다. 곧 성도의 교제이지요.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왜 그 성도의 교제를 그 많은 교회의 중요한 것을 제켜두고 제일 중요하게 말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성도의 교통이 교회의 모든 것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은혜,예배,교육,선교 등은 성도의 교통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이 있어도 그런 것들이 없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통이 없다면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의 교통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이 기초가 되고 그 위에 더 좋은 것들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는 성도의 교통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통이 있어야 다른 것들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교통을 통해 성도간에 은혜를 나누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바른 교육을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통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마지막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최후의 보루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그런데 오늘날 성도의 교통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교통으로 인해 역작용 곧 부작용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교통을 하면서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받기 싫어서 이제 성도의 교통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의 교통을 멀리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어떤 돈을 받는 단체도 아니고, 어떤 의무가 주어져 있지도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순식간에 성도의 교통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성도의 교통에 대한 아주 강한 확신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강하게 확신하고 있으나, 성도의 교통은 그리 강하게 믿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통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성도의 교통에서 멀어지는 순간 그 신앙도 죽어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에서 멀어지는 순간 그 가지는 원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되어 다른 지체를 통해 영양분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을 멈추는 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름 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 그것은 너무나 위험하고 너무나 비신앙적인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고백인 사도신경에서 그렇게 성도의 교통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합니까? 성도의 교통이 있는 신앙생활이 되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것입니다. 같은 예배를 드리며 성도의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같이 교육을 받으며 성도의 교통이 있고, 함께 봉사함으로 성도의 교통을 하고, 함께 이야기하며 성도의 교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함께 삶을 나누는 성도의 교통이 복된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하는 성도가 목사를 만나면 어떨까요? 그 마음이 뜨끔할 것입니다. 목사와 교제를 하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나쁜 짓이 양심에 걸려서라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를 만나면 나쁜짓이 생각나기보다는 좋은 행동이 생각 납니다. 술친구를 보면 술이 생각이 나고, 교회 친구를 보면 교회가 생각이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교통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싶으면 성도의 교통을 간직하고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무엇을 사용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옆의 목사님이나 성도님들을 통해 그 사람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교통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교통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 없는 믿음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믿음인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교회를 믿고,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무인도와 같은 특별한 곳이나 상황이 아닌 이상 교회 없는 믿음은 불가능합니다. 성도의 교통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교회는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도의 교통은 성도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도간의 만남이 참 좋은 만남이 되어, 그 만남이 기다려지고 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그런 만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거룩한 일을 하는 거룩한 교회를 통해 거룩한 삶을 만들어 가고, 성도의 교통을 소중히 여기고 소중히 가꾸어 가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거룩한 만남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소중한 만남입니다. 이 거룩하고 소중한 인연(만남)을 감사하며 잘 가꾸어 가고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
사도신경⑫
본문/ 롬 8:2
'벼락부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가난하였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부자가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벼락스타'라는 말도 있지요. 어제까지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촛불 얼짱' 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촛불집회에 갔다가 한 네티즌이 찍은 카메라에 얼굴이 잡혀서 벼락스타가 된 사람이지요. '벼락부자''벼락스타'꿈꾸어 보셨습니까? 여성은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남성은'온달왕자'가 되는 꿈을 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벼락부자나 벼락스타가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 변화는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크고도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알고 있습니까?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얻었습니다. 사도신경은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재 부분은 성부 하나님, 둘째 부분은 성자 하나님(제일 깁니다), 셋째 부분은 성령 하나님, 넷째 부분은 교회, 그리고 다섯째 부분은 그 모든 것을 믿는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 , 그리고 일어날 일에 대한 부분입니다. 성부,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신 일과 하시는 일을 믿고,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가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성경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적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모든 사람은 영원한 절망인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망이란 단순히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절망인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죄의 심각성을 무시한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처벌하는 죄 외에는 너무 쉽게 범합니다. 자신의 정욕 때문에 배우자를 가슴 아프게 하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순간을 모면하려고 거짓을 행하는 등 수 없이 많은 죄를 행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죄를 너무 가벼이 여겨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어느 순간 죄의 짐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짓눌러 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죄의 무게에 하염없이하염없이 절망적일 뿐입니다. 미리 지옥을 맛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들은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죄의 짐을 잊어 버리고 또 쉽게 죄를 행하면서 삽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일어난 참으로 놀라운 일은 그 사람의 죄가 사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제 죄의 쇠사슬을 끊고 해방되었습니다.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잠시 보류도 아닙니다.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죄의 짐을 벗어 버렸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 큰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법 아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의 축복이 어찌 세상의 축복과 비교될 수 있겠는지요? 죄사함의 기쁨은 참으로 안에서 넘쳐흐르는 기쁨입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우리의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전에는 무엇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죄의 문제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서 해방된 자로서의 가벼움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이미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은 이제 가장 큰 행복의 근원이 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
우리의 죄가 사함을 얻었기에 우리는 이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변에서 죽어 장사지내는 사람들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사는 존재임을 믿습니다.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다시 사는 것을 아는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차이가 나겠습니까? 엄청난 차이가 날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우리의 몸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의 그 영광의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지금의 나와, 다시 사는 나는 서로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내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먹고 마시며, 결혼하고 직장다니며 살았던 그 내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가 다시 삽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죽으면 무덤에 들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에서 일어나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뼈가 서해로 흘러가 지구 구석구석에 흩어져도 그 날에 우리의 모든 뼈들이 다시 붙고 우리의 영혼이 그 육체에 다시 합체하여 지금처럼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어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다시 살 존재로 변화된 우리는 너무나 기쁩니다. 다시 살 존재로 변화되어 이제 그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행복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는 너무나 행복한 존재입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비굴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그 날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을 아름답게 살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리 쉽게 살지 않게 됩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은 내일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는 것을 믿는 사람은 훗날의 삶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을 그 날에 잇대어 삽니다. 그 날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사는 것이지요.
영원히 사는 것(영생)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앞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사실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영원히 삽니다. 그런데 그 사는 곳이 다릅니다. 불신앙의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고, 믿음의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지옥에서 사는 것이 사는 겁니까? 지옥에 사는 것은 목숨이 영원히 붙어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기에 영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만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지옥에 가라고 말하면 그들도 싫어 합니다. 지옥은 그들도 너무 금찍한 곳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인 믿음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지도 않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도신경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성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에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으며 부활하신후 승천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ㅡ 이 모든 일을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며 오늘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우리는 교회에서, 교통을 통해 알아감을 믿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모든 것을 믿는 우리는 이제 죄 사함을 얻었고, 다시 살며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놀라운 미래이지요. 이 놀라운 일(우리의 행복)을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위해 하나님이 그 위대한 일과, 사랑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행복)이라는 하나님의 큰 프로젝트에 우리가 참여하여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전하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아멘
이제 '아멘'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이 믿음에 아멘합시다. 이 믿음이 성경 앞쪽에 기록되어 있는 활자가 아니라, 내 삶에 기록되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도록 해야합니다.'아멘'의 뜻이 무엇입니까? '진실로'라는 부사입니다. 사도들의 이 믿음, 성경의 내용을 간추려 말하고 있는 이 사도신경이 나의 진실한 고백임을 고백하는 것으로서 '아멘'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내 안에서 진실되게 고백하는 것이고, 내 삶에서 이 일이 '진실로'이루어질 것을 믿는 마음으로 '아멘'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아멘입니다. 이 것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재로는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을 믿는 사람은 복됩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진실하며, 가장 정확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복된 것입니다. 그가 영생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원한 행복의 자리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멘
사도신경!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이 믿음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될 것입니다. 이 믿음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아직 이 믿음이 마음에 사실로 다가오지 않는 분은 앞으로 기도하며 이 믿음을 아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전혀 무의미합니다. 이 사도신경을 읽고 또 읽으며 기도하십시오. 지금까지의 설교를 읽고 또 읽으며 이 믿음의 의미를 깨달으십시요.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