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米親日犬公들이여!
파도에 수렴되는 포말(泡沫)의 歷史性을 覺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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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70064 글쓴이 시골훈장 (sintobule) 조회 544 누리 201 (201/0) 등록일 2008-3-28 09:39 | 대문 11 추천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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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장을 차고 전선으로 향하는 국민 돌격대원들 국민 척탄병(Volksgrenadiers 포크스그레나이디어)은 암울한 독일군의 전쟁 말기를 반영하는 부대입니다. 패퇴하는 동부전선은 소련과 대치하고, 서부전선은 미·영·캐나다군 등과 대치하면서 오랜 전쟁 수행으로 청년들은 사라지고 병력마저 고갈됩니다.
남은 자들은 청소년들과 노인들, 결국 15세에서 50세까지 징집 대상을 확대하여 기초군사훈련만 시킨 후 형편없는 무장으로 전선에 투입하지만 이들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궤멸하여갑니다. 상당수의 국민척탄병 사단은 노르망디 방어를 하면서 밀려 베를린 방어전까지 힘겹게 싸웁니다.
급기야 베를린 방어 직전에는 모든 남자들을 징병하여 '국민 돌격대'까지 만들어 돌격대 완장과 간단한 무장을 쥐여준 뒤 사격하는 법만 가르치고 그대로 전투에 투입합니다. 이를 일부 독일장교들이 비판하자 히틀러의 선전부장 요셉 괴벨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겠다고 하는 걸 해 왔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그걸 숨긴 적이 없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를 뽑은 것은 바로 저자들(독일 국민)이야." (목을 칼로 자르는 시늉을 하며) "그리고 이제 그들이 그 대가를 치를 차례지." 괴벨스는 히틀러 사망 후, 자신의 6명의 자녀를 청산가리 캡슐로 죽인 후 히틀러 지휘소 앞에서 권총동반자살을 하는 대가를 치르고 대기 중이던 SS대원들에 의해 화장됩니다.
"그들(히틀러와 추종자들)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으로 자신들의 힘겨운 정신세계만이 고통이라 느끼고 인간적일 수도 있지만, 지도 한 장에 그어진 선과 점, 말 한마디와 이데올로기의 광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밀어 넣는지는 정말 모른다."라며 영화 몰락(The Downfall 2004)의 감독 트라우들 융게는 히틀러에 대한 객관적이고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다 되려 비난받습니다.
히틀러는 지나간 시대의 부정적인 특수한 인물이 아닙니다. 불과 5년 전의 참여민주주의가 일반 국민의 운동이었듯이 민생복구라는 천박한 타이틀만 갖고도 뉴라이트의 국민운동이 열린우리당의 궁민대표들에게까지 파괴적인 영향력을 줍니다. 더욱 우리의 곁에는 늘 친일수구지배세력들과 그들의 나팔수 짝퉁식민지언론들이 거머리처럼 붙어 있습니다. 히틀러는 오늘도 우리 곁에 있으며 정치문화적 정체성이 약해질 때마다 활성화되고 확대됩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소중한 주권을 얼렁뚱땅 밥 한 술 더 먹으려 포기하거나 행사한 국민이 치루 는 것입니다. ※ 중간의 글들은 큰 제목만 훑어 보시고 나중에 자주 천천히 살피세요.
국립묘지는 아무나 묻힐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돌아가신 애국지사, 순직 전사자, 전역장군, 상이군경, 무공수훈자 등만이 묻힐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안장 자격을 법으로 엄격히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런데 결격사유, 그것도 작은 결격사유도 아닌,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부역의 범죄를 저지른 자가 국립묘지에 묻혀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범죄에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런 범죄에 시효를 정해놓고 용서해 준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다.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자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무덤에 들어가도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른다는 추상(秋霜)같은 원칙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기틀이 서는 것이다.
이 원칙이 세워지지 않고 나라의 불행한 시기에 조국을 배신한 행위가 단죄되지 않는다면, 게다가 오히려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자신이 모진 고초를 당한 것은 물론 처자식마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고, 부역한 자는 그 대가로 적국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땅을 은사 받아 자손대대로 떵떵거리며 산다면, 도대체 어느 누가 나라의 누란의 위기에 목숨 바쳐서 나라를 지키려고 하겠는가. 이것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부역자를 단죄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추상같은 원칙이 세워져야 나라다운 나라가 되가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세월이 지났으니 그만 덮고 미래로 나가자는 말을 한다. 그럴듯한 말이나, 전형적 물타기 수법이다. 미래는 어떻게 건설되는가. 과거와 단절된 미래가 있는가. 미래 또한 결국 과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토대가 쓰레기 더미인데 그 위에 제대로 된 미래가 건설될 수 있는가. 하긴 세월이 많이 지나긴 했다. 벌써 올해로 광복 60년 주년 기념식을 치렀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못났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우리의 못남을 탓해야 할 일을 엉뚱한 세월 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따져보면 친일 부역자들을 정권의 핵심에 다시 앉힌 미군정 3년과 이승만 정권 12년,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 정권 18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 독재정권에서는 친일청산이라는 것이 불가능했다. 친일청산을 입 밖에 내기만 해도 당장에 벌건 색이 덧칠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해방 후 47년간은 친일청산이 기소중지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물리적으로는 세월이 60년 넘게 흘렀어도 실질적으로는 13년밖에 안 됐다는 말이다. 사람을 하나 죽여도 공소시효가 15년이다. 그런데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부역죄에 대해 이제 겨우 13년 지났을 뿐인데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만 덮자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뉴질랜드의 어떤 사람이 56년 전의 성폭행 범죄로 인해 기소되었다는 기사를 몇 년 전에 본 일이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 60년 전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세월이 많이 지났다고 덮자고 하는데, 뉴질랜드에서는 56년 전의 성폭행 범죄를 단죄한다고 나선 것이다. 차이가 나도 너무 나지 않는가. 우리의 의식수준이 그만큼 낮은 것이다. 선진국은 역시 달래 선진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치독일로부터 점령당하는 민족적 수치를 겪은 프랑스에서는 나치 부역자를 가혹하게 처단했다. 나중엔 법까지 개정해서 시효를 없앴고, 아직도 나치 부역자를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모리스 파퐁' 재판을 기억하는가? 모리스 파퐁은 프랑스가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 1942-1944년 동안 1,500여 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는 등 부역행위를 하고도 레지스탕스였다고 해서 파리 경찰국장을 거쳐 장관까지 지냈다가 한 역사학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전력이 폭로되면서 1997년에 재판에 회부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인 프랑스판 부역자이다.
1940년대 부역행위로 인해 50여 년 후인 1990년대, 그것도 나이 90의 고령에 재판정에 섰던 모리스 파퐁. 이는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인 일대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90세 노인을, 그것도 60년 전 일인데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지 않았을까. 그게 문화 프랑스의 정신이다. 프랑스는 프랑스를 배신한 프랑스인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프랑스 국민에게뿐만 아니라 세계에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그러니 프랑스인이 그렇게 콧대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민족의 자존심과 나라의 기틀은 그렇게 세워지는 것이다.
나치 부역자 처단을 주도했던 드골이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프랑스를 배신하는 프랑스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추상같은 원칙이 세워져야 나중에 불행한 시절이 닥치더라도 제 나라를 배신하는 역적무리들이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가사의하고 위대한 대한민국은 어떤가? 얼마나 많은 부역자와 그 추종세력들이 면죄부를 받았으며, 아직도 이 사회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가? 거기에다 그들의 부역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인 정리마저도 방해하는 무리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많은 국민이 거기에 덩달아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부역자를 예비하고 있는 것인가? 친일부역자의 유족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마음은 무겁다.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친일청산의 현주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35년 넘은 식민지 시절의 부역자를 단 한 명도 처단하지 못한 나라. 大韓民國의 간판이 아닌 犬韓民國의 위대한 이름으로 세계만방에 고하라!!!
아니, 그들이 단죄되기는커녕 오히려 새 나라의 지배세력으로 변신하여 아직도 그 후예들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행세하는 나라. 남의 나라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분노에 종주먹을 들이대면서도 정작 제 나라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세월이 흘렀으니 경제가 어려우니 덮자는 大犬하고 大範한 나라.
친일부역자들의 후손이 아직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조상의 더러운 땅을 되찾겠다고 버젓이 활보하는 나라. 부역자의 묘를 국립묘지에서 이장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소박한 주장이 무관심에 묻히고 그 활동가들이 고소를 당하는 나라. 나는 아직도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 도대체 민족적 자존심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런 偉大한 犬韓民國에…
정식 재판이 열리기 전에 성난 프랑스 국민에 의해 처단된 숫자가 어림으로 일만 명에서 십만 명이라 하는 데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한다. 단 5년 동안 나치 앞잡이 노릇을 했거나 협력한 배신자들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단죄였다. 독일 정부는 나치 만행에 대한 철저한 사과, 반성과 아울러 나치 전범 처벌에 앞장섰다. 독일과 유럽 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는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를 없애 가면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나치 전범들을 색출 처벌하고 있다. 그들로 인하여 학살당하거나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희생자들의 정의감을 만족시켜 주고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 대하여 대량학살의 범죄자들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고 만다는 사실을 교육시키고 나치의 깃발 아래 살인의 범죄를 저질렀던 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신나치의 위험과 싸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광복 후 우리는 35년을 왜놈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민족 말살에 앞장섰던 친일 반역자들을 처단은 고사하고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했다. 그 후 친일파들은 광복정국에서 친미와 반공을 내세워 애국자로 변신하여 이승만, 박정희 정권과 결탁하여 이 나라 각 부문에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리고 하나 둘 죽어 갔는데 이제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동상 이나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법석을 떨고 기념상을 제정하여 가신님을 기리겠다고 난리들이다. 최근에 죽은 서정주와 김기창만 하더라도 일제 말기 대동아 전쟁을 예찬하며 우리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과거 친일의 선봉이었던 언론들은 모두 애석해 했고, 서정주에겐 정부에서 훈장까지 주었다. 할 말이 없다. 제 나라 제 민족 잡아먹은 놈들을 그리도 우대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서정주 ※김기창 ※김활란 ※김동인 ※김성수 ※박정희 ※유치진
1990년11월 통영의 남망산공원에 극작가 유치진 의 흉상이 세워지자 통영 시민들이 유치진의 과거 친일 행적을 과감하게 밝히고 나서 '유치진 흉상 철거 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하여 흉상 철거를 강력하게 요구하여 결국에는 유치진 흉상이 철거되고야 말았다. 다음해인 1991년엔 문화부가 4월의 문화 인물로 유치진을 선정하고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추진하려고 하자 이 지역 문화 예술인들은 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강력하게 반발, 결국 인물을 바꾸고야 말았다. 통영 시민들의 정의감과 민족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금의 박정희, 서정주의 기념관, 김활란의 기념상 등을 추진하는 인사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친일파 708인"의 명단을 발표한 민족정기를 세우려는 의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거센 친일파들의 입김을 제치고 명단을 발표한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아 정의롭고 의로운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강한 표현이요 소신과 용기있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마지막 "광복회"와 발표를 놓고 갈등을 빚었던 김성수, 방응모, 김활란 등 16인의 명단을 포함시킨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지금의 신세대들은 그들 16인을 제외하면 잘 알지도 못한다. 잘 알지도 못하고 이미 다 고인이 되어버린 사람들만 발표한다면 교훈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나마 우리 기억 속에 살아있는 16인을 포함한 것은 지극히 온당하고 마땅한 처사이다.
많은 사람이 공(功)과 과(過)를 내세우는데 죄를 지은 사람이 후에 공을 세웠다고 해서 그 죄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공을 세웠어도 그전에 지은 죄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죄를 지은 사람이 나중에 공을 세우면 과거의 죄가 씻어진다면 아마 이 땅의 친일파는 한 명도 처벌할 수가 없을 것이다. 광복 후의 공으로 왜놈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조국을 배반한 민족 반역자들을 용서한다면 우리나라는 미래가 없는 나라가 된다. 만약에 다음에 또 외적의 지배를 받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들은 또다시 외적에 빌붙어 우리 민족 말살하는데 앞장설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처벌이 늦은 것이다. 광복과 더불어 이들은 모두 처단 내지 처벌했어야 할 인물들이다.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했어야 했다.
그걸 못한 채 반세기가 넘도록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우리 사회 지도자로 군림하도록 수수방관한 우리 사회 우리 국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공은 고사하고 그들이 가면을 쓰고 지도자 행세를 하는 바람에 정의는 무너지고 애국심과 소신이 있는 사람들은 발을 못 부치고 복종과 아양에 능숙한 기회주의자들의 천국이 되고 말았다. 물론 미국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와 군부세력들의 비호 아래 그들이 우리 국민 위에 군림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라도 제도권의 틀에서 친일파를 척결하여 정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는데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의원들의 지속적인 활동을 기대한다. - 2002년3월1일
708명 중에 발표를 주저했던 16인의 面面들!!
언론 : 김성수, 방응모, 장덕수
친일파 99인과 淸算하지 못한 역사 [민족문제연구소]
을사오적 일진회 관련자
갑신·갑오개혁 관련자
을미사변 관련자왕실·척족
관료
직업적 친일분자
경찰·군인
경제
언론
학술법조
여성계
문학
음악·미술
종교
정치 역사
新친일파 박정희 시류에 따라 변신을 거듭한 기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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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1939년 4월29일 1면 머리로 실은(사진) 대표적 친일사설 '봉축 천장절' 전문을 소개한다. 한자와 옛 문체로 된 것을 요즘 말로 옮겼다. 히틀러를 찬양한 머리기사가 눈길을 끈다.
봄바람이 화창하고 온갖 꽃이 흐드러진 이때에 다시 '천장절'을 맞아 억만 신하와 서민은 경축하는 마음 감히 감당하지 못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 옥체 강녕하시다는 말씀 우러러 받드옵는 바 실로 다 같이 황공하옵고 축하할 바이다. 해마다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크나큰 은혜와 어짊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정성을 다하여 나랏일을 하고, 충성과 의리를 다하여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마침 중국사변(중일전쟁) 제3년의 오랜 파괴와 건설이 병행하는 중에 있어 지극히 높은 임(지존·천황)의 하루 일을 우러러 받들면, 만 가지 정무를 다스리옵심은 물론, 중대한 군무에까지도 마음을 쓰시옵는다는 데, 이는 바로 제1전선의 빛나는 무훈에다 나라 위세가 높이 드날림으로 나타나도다. 이것이 임(천황)의 위세로부터 나온 것임을 되새기면 실로 황공무지하여 감격을 이기지 못할 바이다.
신민 두루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오래오래 사실 것을 축하하옵는 동시에 만백성이 한마음으로 지극한 충성으로 위로 성스러운 마음에 보답하고, 아래로 어려운 시국에 대처하여 새로운 동아시아 건설의 성업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의 나라 일본의 위광을 한층 더 온 세상에 빛나게 하는 길이요, 또 신민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이날을 맞아 `천황'의 무강과 황실의 광영을 봉축하면서 끝으로 우리가 행복스러워하는 까닭임을 강조하여 둔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때에도 야비한 수법인 세무사찰을 받았다?
지난 3월 6일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이 창간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하며 한 말이다. 이 짧은 말에는 현재 국세청 세무조사에 대한 강력한 불만과 조선일보가 민족지였다는 주장이 함축돼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친일 문제가 나올 때마다 늘 격렬하게 받아치곤 했다. "김 사장, 제정신으로 하시는 일입니까? 반일·친일 논쟁이 에스컬레이트 하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도 안 하십니까?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1985년 4월 조선일보가 지면으로 동아일보 사장에게 보낸 공개편지 중 일부다. 당시 '민족지-친일지 논쟁'이 벌어진 것은 동아일보가 그해 4월 1일 창간 65돌 기념으로 사회면 머리에 조용만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을 실은 것이 발단이었다. 이 글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탄생과정을 밝히면서 조선일보를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으로, 동아일보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으로 묘사했다.
이 기사가 나간 지 보름 뒤인 4월 14일 조선일보는 선우휘 당시 논설고문의 이름을 단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라는 글로 지상 반격을 가했다. 선우휘 고문은 이 글에서 김성열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향해 직설적으로 "두 신문사가 서로 상처를 입을 때 이 사회에 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며 싸움을 중지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지면을 통해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며 조선일보 공격을 멈추지 않자, 조선일보도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의 초대사장"이었다며 이번 기회에 "친일계보가 속속들이 파헤쳐져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 논쟁이 서로의 치부를 들춰내자 서둘러 수습하고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조선일보는 창간 81돌을 맞아 지난 2~7일 5회에 걸쳐 쓴 '조선일보 사장 열전', 8~19일 8회에 걸쳐 쓴 '명기사 명사설'을 통해 조선일보의 일제하 행적을 '반일'에 맞춰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특집에서 그들의 다른 면, '항일'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길고 진한 친일의 어두운 그림자는 가리고 보여주지 않았다. 역사를 외눈이 아닌 두 눈으로 바로 보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지워 없앤 친일역사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실은 조선일보가 일제강점기에 썼던 기사와 논설에 그대로 남아 활자로 보관돼 있다.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육체가 유강하옵시다고 배승하옵는바,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일년일도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한 은(恩)과 광대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다."
봉건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1939년 4월 29일치 사설에 당시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천장절)을 맞아 쓴 생일축하문이다. 스스로를 낮추는 어미 '옵'자를 남발하며 비굴하게 몸을 굽힌 이 글은 신문의 사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극심한 '일왕 찬가'다. '황공'도 모자라 '성황성공'이라 하고, '경하'도 부족해 '동경동하'라 하며, '충성'도 양에 차지 않은 듯 '극충극성'(克忠克誠)이라 하고 일왕을 '지존'(至尊)이라고까지 부르는 이 사설이 '민족지' 조선일보에 버젓이 게재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친일 기사·사설은 일제 말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1920년대 4차례 정간조처를 당하고,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언론인이 축출된 뒤 조선일보의 필봉은 무디어지고 꺾여나갔다.
1932년 1월 8일 발생한 '폭탄 테러'를 조선일보는 호외로 보도한 데 이어 10일치 1면 머리로 이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천황 폐하께옵서 육군관병식행행으로부터 환행하시는 어료차(천황의 마차)에, 노부(천황의 행렬)가 앵전 문앞에 이르렀을 때에 어경위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료차에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 50분 무사히 궁성에 환행하시었다."
이 기사는 "천황 폐하 환행도중/노부에 돌연 폭탄을 투척/8일 오전 동경 경시청 앞에서/어료차 별무이상"이란 제목으로 보도됐으며, 기사 말미에 "범인은 …조선 경성생 이봉창(32)"이라고 썼다. 국내외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이봉창 의사 폭탄 투척 사건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일제의 편에 서서 이 의사를 '범인'이라고 딱지 붙인 것이다. 1932년께에 이미 조선일보는 친일 노릇을 마다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을 항일투쟁사건으로 규정해 특종 보도한 것은 우리의 '민족지'들이 아니라 중국의 <국민신보>였다.
1933년 계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조선일보의 친일보도는 그 도를 한층 더해간다. 이런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37년 1월1일치 1면이다. 이날 조선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으며 1면에 총독의 새해기념사와 휘호를 실어지면 변화의 획을 그었다. 조선일보는 이후 해마다 1월1일치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이에 앞서 조선일보는 1936년 12월 13일치 사설('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은 사회개조를 목적으로 한 사상범을 대상으로 하는 법령인 만큼 사회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운용을 잘못하면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사상운동에 도발적 반동기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항일 독립투쟁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낸 이 악법에 대해 조선일보는 법령의 본질을 덮어둔 채 그 사회적 의의를 강조하면서 그 운용의 묘만을 거론한 것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나자 조선일보는 마침내 일본군을 '아군' 혹은 '황군'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1937년 7월 19일). 8월 2일에는 사설('총후(후방)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이 목적')에서 "제국 신민으로서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자 시국대책을 강구 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그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는 것이 후원연맹의 중요 임무"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요는 국민 각 개인은 각각 힘자라는 데까지를 목표로 하고 응분의 성의를 다하는 데 있을 것이다. 있는 이는 있는 이대로 기만 원을 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요, 출정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전선이 확대돼 전쟁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8월 12일 아예 조선동포들에게 국방헌금을 내도록 독려하는 '사고'를 낸다. 이 사고는 신문사와 사원들의 헌금 솔선을 밝히면서 "북지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민간의 국방헌금과 군대위문금은 날로 답지하는 형편인데 본사에서는 일반 유지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접수 전달하려 하오니 강호 유지는 많이 분발하심을 바랍니다"라고 돼 있으며 이후 고정란으로 실린다. 헌금이란 이름의 재산수탈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일보 37년 12월 12일치는 "황군의 신속한 행동으로 단번에 지나 수도 남경을 무찌르게 됐다는 전선뉴스가 보도된 지 불과 수일에 이제 최후의 공성으로 단말마적 저항을 계속하던 남경성도 10일 밤으로 완전 함락을 보게 됐다"며 30만 명을 학살한 일본군의 난징 공략을 우리의 승리인 양 축하하고 있다. 38년 1월 1일 조선일보는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과 함께 미나미 지로 총독이 제창한 내선일체를 미화하는 특집기사를 싣는다. "그다음에 미나미 총독의 새 표어로 제창된 것이 내선일체이다. 일선동화도 내선융화도 옛말로 돌린 내선일여에서 내선일체로 재전환한 것이다" 신문 제호를 가려 놓으면 어느 것이 '민족지'이고 어느 것이 총독부 기관지인지 구분키 어려울 정도로 논조가 친일로 치달은 것이다.
이해 4월 일제는 38년 4월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만들어 조선의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기 시작했다. 38년 6월 15일 조선일보는 육군지원병훈련소의 개소를 맞아 사설과 1면 머리기사로 "조선통치사의 한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라 묘사하며 황국신민된 감격에 넘쳐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다시 중국침략 1돌을 맞은 38년 7월 7일 조선일보는 이를 기념하여 사설·머리기사 등 전 지면을 동원해 "열철일타의 일본혼이 총후국민의 의력과 같이 동아의 신질서 건설의 발단을 만든 국민감격의 기념일인 7월 7일을 맞이하여 전 조선의 도시 농산 어촌에 들끓는 총후 황국신민의 …물적 심적 총동원의 체제는 귀한 호국의 영령에 바치는 조의와 출정 장병의 신고를 생각게 하는 뜻깊은 여러 가지 행사"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폐간 4개월 전인 40년 4월 조선일보는 일왕 생일을 맞아 이제껏 신민(臣民)이라고 하던 조선 백성을 신자(臣子)로 불렀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날에 제39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사 …억 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하에 일단은 진척을 보아 선린의 새 지나 국민정부가 환도의 경축을 하는 이때에 이 아름다운 탄신을 맞이한 것은 더욱 광휘있고 경축에 불감할 바이다." 그리하여 조선 백성은 일거에 일왕의 자식이 돼 버렸다. 이처럼 극한 친일행각에도 불구하고 40년 8월 11일 조선일보는 폐간된다. 폐간과 관련해 <조선일보 80년사> 발간사에서 방상훈 사장은 "친일을 했다면 일제가 왜 폐간을 했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 원과 80만 원을 받았다.
당시 가미가제 전투기 한 대가 10만 원이었음을 보면 작지 않은 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친일행위는 폐간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방응모는 1935년 창간한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월간조선>의 전신)을 본격적인 친일 잡지로 개편해 총독부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것은 40년 11월 창간 5돌을 맞아 "이 역사적 대변혁기에 그때그때 본지에 허여된 직책을 다하기에 미력을 다해왔다."라고 자평하면서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일로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향하여 이 국책과 신문화정책에 따라 시국을 일신시키는 데 일단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힌 데서도 확인된다.
조광이 말하는 '미력'과 '일단의 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자. 조광 40년 3월호는 "일본제국과 천황에게―성은 속에 만복적 희열을 느끼며"라는 제하의 권두언을 내보내고 이어 7월호에서는 "만세 일계의 황통을 이으옵신 세계 무비의 깨끗하옵신 역사를 가진 우리 일본 황실의 번영이 이처럼 날로 점앙하는 것은 위로 성명(聖明)하옵신 천황폐하를 모시옵고 아래로 국민이 일치단결 국운의 번영을 꾀한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해 10월호에서는 일제의 조선통치 30년을 기념하면서 "지금부터 만 30년 전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병화를 위해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했다고 경술국치를 왜곡했다. 또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고 무단통치의 장본인을 찬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7명의 총독이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건설을 결실시켰다"고 떠받들고, 나아가 "중대시기인 이때를 당하여 2,300만 반도 민중은 한결같이 내선일체의 실(實)을 거하여 황국신민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며 안 될 것"이라고 친일매국을 독려했다.
41년 신년호에서는 다음과 같은 헌사로 황실에 대한 충성을 표시한다. "서기 넘치는 신년을 맞이하여 천황 폐하, 황후 폐하의 성수무강하옵시기를 충심으로 비옵는 동시에 황태자 전하, 의궁 전하, 희궁 효궁 순궁 천궁 사내친왕 전하께옵서도 어건강하옵시기 삼가 비는 바입니다." 이어 2월호 사설에서는 '쌀을 갖다 바칠 것'을 독려하고 나섰다. "내 손으로 지은 쌀을 내 마음대로 소비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이 구체제라면 내 손으로 지은 쌀, 내 자본으로 만든 물건을 모두 들어 나라에 바치고, 그 처분을 바라는 것이 신체제요, 총력 운동이요, 또 신절을 다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이 사설이 나갈 즈음 일제의 조선 곡물 수탈은 한층 도를 더한다. 1941년 쌀 수확량의 43.1%였던 일제의 수탈률은 1944년에 이르면 63.8%까지 올라간다. 먹을 것이 없는 조선의 민중은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조광> 친일 기사·논설은 끝이 없다. '해군특별병 지원제도의 광영'(43년 6월호)에 감격하고 징병제 실시에 감사드리다가(43년 8월호), 44년 8월호에서는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률(36%)이 "대만의 일본어 해독자 6할에 비하면 훨씬 뒤떨어진 것"이라고 개탄하면서 "일본 정신 체득을 위해서 국어(일본어)가 각 가정에까지 침투되도록 전사회적으로 일대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라고 외치고 나섰다.
그런데도 <월간조선>은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월간조선이 "일제치하 조선의 광명으로서 겨레의 어둠을 밝혔던 조광"의 후신이라고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7월11일치 사설에서 조선일보를 반통일신문이라고 비판하는 국내외의 주장을 반박하며 "조선일보는 어떤 협박에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그들의 친일은 길들여진 결과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었단 말일 것이다.
◈ 지성의 반역 프랑스는 단호했다.
- 고명섭 기자
▲ 피에르 아술린 · 이기언 옮김 두레 펴냄·1만2800원 |
2차대전 말기 파리 해방 직후 '프랑스 대숙청'은 지식인의 행동과 책임의 막중한 관계를 서슬 퍼런 목소리로 증언한 가장 뜨거운 역사의 현장일 것이다.
이 현장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은 언론인 주섭일씨가 1999년에 펴낸 <프랑스의 대숙청>(2004년 개정판명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이었다. 피에르 아술린이 쓴 <지식인의 죄와 벌>(원제:'지식인 숙청')은 주섭일씨의 책에 앞서 1996년 프랑스에서 나온 '나치 협력자 청산'에 관한 역사적 평가서다.
주씨의 책이 부역자 단죄의 엄정함과 단호함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숙청 과정을 역사적 거리를 두고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은이 아술린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저항자들의 기소내용과 부역자들의 변호논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저항자들 사이에서 처벌의 수위를 놓고 벌어진 논쟁도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역사의 공과를 냉정하게 기술하는 지은이의 태도가 반역자 숙청이라는 정치적으로 완료된 결과의 뒷받침을 받고 있기 때문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알려진 대로 파리를 해방한 샤를 드골의 임시정부는 나치 부역자 청산에 즉각 나섰고, 협력자 중에서도 지식인들의 부역행위를 훨씬 더 가혹하게 단죄했다. 이 책은 왜 지식인들의 더 호되게 처벌받았는지, 그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지식인이란 특히 언론인과 문필가를 말한다. 기자와 문인에게 글은 곧 칼이며 말은 곧 총이다. 그들은 언어의 힘을 빌려 수없이 많은 사람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 그들은 독일 점령기(1940년 6월~1944년 8월) 4년 동안 신문과 잡지와 방송을 통해 나치 점령을 정당화하고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순리임을 역설했다. 그들의 언어는 요컨대, 거대한 선전기관이었다.
▲ 파리 해방 직후(1944년 8월21일)나치 문장 하켄크로이츠를
가슴에 달고 끌려 나오는 나치 부역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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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파리가 해방되자 나치 군대를 따라 독일로 망명했다. 파리에서 부역자 단죄 바람이 불자 이들은 1944년 11월 지식인 숙청을 비난하는 '재독 프랑스 지식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 작성자들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지난 4년 동안 신문지상을 통해서 친독 의용대와 게슈타포, 나치 친위대(SS)가 저항민병대, 유대인, 공산당원을 사냥하는 데에 철저하게 부역했던 장본인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이제 분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이 분개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념에 따라 행동했던 작가와 기자들을 기소하고 그들의 책을 판금시키거나 폐기처분하는 일이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역 지식인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계는 치열한 논쟁으로 들끓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인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표적인 논전은 프랑수아 모리아크와 알베르 카뮈의 '관용론' 대 '정의론' 격돌이었다. 모리아크는 과도한 숙청을 우려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 된다." 카뮈는 이렇게 맞섰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카뮈의 주장이 더 힘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조르주 쉬아레즈, 알베르 르죈, 스테판 로잔 같은 부역 언론인들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35살의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크를 기소하면서 검사는 이렇게 논고했다.
"브라지야크의 반역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반역입니다. 자존심의 반역입니다."
문인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모두들 아까워했지만, 그 탁월한 재능 때문에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왜 돈으로 부역한 자들보다 말과 글로 부역한 자들이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작가 베르코르는 단호하게 답했다. "기업가와 작가를 비교하는 것은 카인과 아벨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카인의 죄는 아벨에 그친다. 그러나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다." 지은이는 이 시기 지식인 숙청에 어떤 야만적 보복의지와 개인적 권력의지가 들어 있었음을 인정한다. '프랑스 대숙청'은 결코 정의의 저울이 완벽하게 평형을 이룬 이상적인 숙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숙청의 시기가 잔인한 학살의 시대 뒤끝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사람들에게 완전히 침착한 이성을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성인의 모범이었던 시몬 드 보봐르가 브라지야크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보봐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히틀러의 선전자들을 엄벌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 독가스실만큼이나 살인적인 말들이 있다."
첫댓글 친일 청산 꼭 해냅시다. 이런 수치스럽고 오욕으로 점철된 과거 후손들에게 물려줘서는 절대 안됩니다. 친일청산 이루어 지는 그 날까지 다같이 힘을 모읍시다.
정말 훌륭한 글과 자료 잘 봤습니다. 친일빠들이 판치는 이 현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ㅜㅜ
좋은자료 고맙습니다 친일 청산은 꼭 해야합니다...
진짜 훌륭한 글이네요. 잘 봤어요
서프의 글들은 잘 생각하시고 퍼오셔야 합니다 ... 그넘들은 국민들이 뽑았으니 당해도 싸다는 식의 궤변들을 늘어 놓는 넘들 입니다.
제 개인적인 판단은 딴나라당을 좋아서 뽑아준게 아니라 과거 벌린당 넘들에 대한 심판 입니다 ... 그넘이나 저넘이다 별반 차이가 없더라 하는 생각에 더하여 집값 욕심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미미하고 ... 고 정주영회장의 이미지를 훔쳐다 쓴 쥐박이와 합심해서 혹시나 발등에 떨어진 불 조금이나마 꺼줄까 하는 바램이었겠지요 ... 중요한건 과반을 밀어줬는데도 사욕에 눈이멀어 뭉기적댄 통합쓰레기들에 대한 심판 입니다 ... 그걸 애써 감추려고 적반하장격으로 국민들 욕을 해대고 있는 겁니다 ... 투표하지 않은 54%에 대한 분석은 쏙 빼놓은채로 말이죠.
본글로 올리려고 했으나 정리가 덜되었고, 제가 게을러서 이렇게 꼬리로 요지만 남깁니다.
오늘 처음 가입햇지만 마음만큼은 뜨겁습니다. 그리고 매국노들은 쉽게 죽여선 안됩니다.온갖 모진 고통과 학설. 그리고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난뒤 국민들에게 맡겨 국민의소리를듣게한후 공개처형입니다.
프랑스의..자존심에 경의를 표하며,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쓸개빠진 몇 몇의 개만도 못한 놈들 때문에 말입니다.
다죄하고 처단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자업자득 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고, 지나친 것 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남의 고통이 나의 희열로 받아 들인다면 이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 받을 자가 용서를 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처단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가해자로 둡갑하여 처단을 받는 다면 이는 분명히 잘 못 된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지난날이 과오를 뼈저리게 후회하는 이성이면 선처를 생각 할 수 있지만, 처단받아야 될 당사자가 되러 처단자가 되어서 설치는 꼬락서는 우리 현대사에 엄청난 이성논리의 혼란을 주어 왔습니다. 이는 부끄로운 짓을 하고서 부끄로운 것을 모르는
후안무치한 불량한 양심으로 세상을 보란듯이 주유하고 사는 매국친일파들의 득세장이 된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습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인격들을 솎아 내어야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은 명박스러운 세상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 인간을 단죄를 하고 처단하는 것을 무슨 재미있는 놀이나, 어떤 만족감을 주는 희열을 갈구하는 것은 정말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냉정하고 정적인 판단으로 본질을 봐야 할 것입니다.
고의가 아닌 과실도 죄라하여 처벌을 하는데 자의에 의해 이 세상 그 어떤 범죄보다 용서받지 못할 나라 팔아먹은 저들을 단죄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은 없는 겁니다. 반드시 반드시 단죄할 수 있는 그날까지 화이팅!!!
피의 숙청...까지는 무리더라도 반드시 단죄되어야 합니다. 친일파는 떵떵거리는데 국가유공자,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니... 우리나라에 정의가 없어질 만 합니다.
일본은 전쟁당사자이기 때문에 협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민족반역자는 타협과 협상이 불가능하다. 전원 처단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민족 반역자에게 안식은 없다.
이 나라에서 언젠가는 꼭 정리되어야할 문제다, 민족 배신자 문제를 제대로 정리못하고, 우리 후손에게 역사를 물려준다는 것은 지금 이땅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 자체가 후손에게 수치일뿐이다.
괴벨스처럼 돼야 하는 인간들 쥐박이와 한나라당 모두 해당 됩니다 친일 청산에 서명하지 않는 쓰레기들 온전치 못할 것이다 쥐박이는 청산가리로 가족들 모두 죽이고 죽어라 군대 기피자니 권총 자살은 안된다 칼로 스스로 찔러 죽어라
부익협력자에 대한 청산과정이 없이 어떻게 새로운 민주주의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개인의 야심을 위해 죄 없는 국민을 학살한 전 두환과 그 동조자들도 반드시 그 죄값을 치루게 해야 합니다
불랙북 영화를 보면서...프랑스의 위대함을 알았다...대한민국에서도 불랙북--친일인명사전이 빛을 발하기를 기도하면서....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친일파. 더 늦기 전에 이장 조속히 추진되어야 합니다.